골굴사(骨窟寺)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약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 선인 일행이 경주 함월산에 정착하면서 골굴사와 기림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골굴사는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의 석굴 사원을 본떠서 석굴사원 형태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석굴사원이다.
조선 중기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볼 때 골굴사는 여러 석굴들 앞에 목조 전실을 만들고 여기에 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조선 중후기에 화재로 소실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경주에 사는 박씨 일가가 상주하면서 다시 사찰로 만들었고, 1989년에 한 개인에게 매매되어 넘어간 상태였던 것을 당시 기림사 주지였던 설적운 스님이 매입해서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본사 불국사의 말사로 등록되었다.
주불인 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이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주변에 관음굴, 지장굴, 약사굴, 나한굴, 신중단, 칠성단, 산신당 등의 굴법당과 더불어 남근바위, 여궁 등의 민간 전례신앙의 흔적까지 있어 한국적인 석굴사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골굴사에는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 수련원이 개설되어 내국인은 물론 수많은 외국인들이 전통의 불교무예를 배우는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경주 장항리사지(慶州 獐項里寺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장항리
절터는 토함산(吐含山) 석굴암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좌우에 계곡을 끼고 있는 낮은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계곡은 감은사(感恩寺) 앞을 지나 동해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의 상류이다. 절터에 있었던 절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지명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사지라고 불린다.
다만 장항사(獐項寺)라고 불린 절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이름을 장항리라고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가파른 계곡 위쪽에 위치한 절터에는 5층석탑인 서탑과 파괴된 동탑, 석조 불대좌(佛臺座) 등이 남아 있다.
현재 땅 위에 드러나 있는 건물터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金堂) 자리로 보이며, 불대좌는 이 건물터의 중앙에 마련되어 있다.
건물의 받침 규모는 동서 15.8m, 남북 12.7m로, 남아 있는 주춧돌을 볼 때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의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조 불대좌는 위아래가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졌는데, 아래 부분은 측면의 안상(眼象) 속에 신장(神將)과 신수(神獸)를 조각한 팔각형으로 되어 있고, 윗 부분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 연화대좌(蓮花臺座)이다.
크기는 아래 부분이 높이 0.6m, 최대 지름 2.4m이며, 윗 부분은 높이 0.53m, 지름 1.84m이다. 대좌 위에 놓여 있던 석조 불상은 1932년에 서탑을 복원할 때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 북쪽 뜰에 전시되어 있다.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었던 것을 복원하였지만 뒷부분의 광배(光背) 일부와 무릎 아래는 없어진 상태이다. 머리와 얼굴의 모습, 광배의 화불(化佛) 등을 새긴 수법을 볼 때, 8세기 경에 만들어진 여래입상(如來立像)으로 판단되며, 현재의 높이는 3m이지만 실제로는 4m 이상인 큰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약 10m의 5층석탑은 금당터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약 15m 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1925년에 도굴범이 탑 속에 있는 사리(舍利) 장치를 탈취하기 위하여 폭파한 것을 1932년에 복원하고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위아래 2중 기단 위에 몸돌을 올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다.
동탑은 부재가 붕괴된 상태로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금당터와 서탑 사이에 모아두었다. 이 탑도 남아 있는 부재로 미루어 보아 서탑과 규모가 같은 5층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항리사지는 계곡 사이의 좁은 대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쌍탑(雙塔)을 배치한 통일신라시대의 가람 양식을 보여주나 강당(講堂)이나 회랑(廻廊)의 존재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