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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묵상글 ( 연중 제15주일 수요일. - 민족주의를 초월하는 신앙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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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연중 제15주일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민족주의를 초월하는 신앙인
어제와 오늘의 탈출기는 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민족주의자와 신앙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말입니다.
어제의 모세는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자기 민족이 이집트 왕과 백성들에게 억압받고
괴롭힘당하는 것 때문에 분노하고 동족을 구해 내는 모세였습니다.
오늘의 모세는 그런 단순한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동족을 이집트 억압으로부터 구출해 내라는 소명을 받는 모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단순한 민족주의자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초월합니다.
이렇게 모세는 초월하는 사람인데 요즘의 저는 어떤 사람인지,
아직 민족주의자인지 모세처럼 초월한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북한과는 적대시하고 일본과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후꾸시마 오염수를 처리수라고 하며 그냥 해양 방류하려 합니다.
그렇게 문제없는 처리수라면 일본 내에서 처리하지
왜 해양 방류를 하는지 저는 일본의 양심을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분노합니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고 더 분노하는 것은 우리 정부의 태도입니다.
우리 대통령과 정부가 우리 국민을 보호하고 대변하려는 사람들인지,
일본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사람들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화까지 납니다.
그런데 화까지 나는 저를 보며 이것이 민족주의자로서의 분노인지
그것을 초월한 사람으로서의 의로운 분노인지 자신이 없는 겁니다.
저를 솔직히 반성하면 저의 분노 안에는 두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저의 분노는 아직 민족주의자의 분노이고,
그러나 모세처럼 그것을 초월하려고 애쓰는 차원입니다.
중요한 것은 민족만을 보는 것을 넘어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하시고
어떤 명령을 나에게 내리실까 성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후꾸시마 오염수뿐 아니라 모든 원자력 발전을 반대하시고,
북한의 핵무기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의 모든 핵무기까지 반대하시고,
탈핵, 탈원전, 탈화석연료 사용을 명령하실 겁니다.
하느님이라면 그리고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대변하는 모세라면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여 모든 불의를 반대하고 그 불의에서 돌아서라 할 것입니다.
역사 안에 늘 있었던 강대국에 의해 왜곡되는 정의와 그들의 횡포,
예를 들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와 개발은 괜찮고,
힘없는 나라들의 핵무기와 개발은 막으려는 강대국의 횡포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분노하시고 막으실 것입니다.
물론 북한의 핵무기에 대해서도,
우리나라도 핵 무장해야 한다고 하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하실 겁니다.
아무튼, 저는 그리고 여러분은 민족주의자인지,
모세처럼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이고,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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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연중 제15주일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요, <뒷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오늘은 두 개의 절로 된 <앞 장면>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 장면>의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마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니 기도가 수난의 길을 앞두고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로서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감추시고”와 “드러내 보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드리십니다.”
그리고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찬미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았기에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이 이루어졌음을 찬미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사실,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드러내시고 철부지에게는 감추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당신 사명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슬기롭다는 자들이 당신을 알아준다면 굳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오히려 반대로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에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눈에 감추어 있더라도 드러나 있더라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일을 이루시는 당신을 찬미하며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당신께서는 그 선하신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십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오니, 주님!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시고, 이 모든 것 안에서 저의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의 선하신 뜻”(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당신께서는 그 선하신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십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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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연중 제15주일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때 묻지 않은 철부지가 되어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는 것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아는 것이 병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게 약입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는 종종 ‘내가 무엇을 했다.’고 으스댑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철부지처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셨다,’고 합니다. 진정 우리가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필요에 쓰십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내가 커지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필 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기득권층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주시기 위해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 현명하고 박식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알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알지 못하고, 하느님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고 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장관, 대법관 등 고위 공직자의 청문회를 보면 잘난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로라하는 사람과 그 가족에게 감추어진 부정이 많습니다. 불법으로 이득을 챙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공공기업도 그렇고 존경받아야 할 무리에서 뻔뻔한 사람이 생각 외로 많아 평범한 사람들을 허탈하게 합니다. 자칭 많이 알고 총명하며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착각에서 깨어나기를 희망합니다. 아는 것이 남을 등쳐먹는 데 사용되지 않고 남을 풍요롭게 하는 데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철부지들, 그야말로 촌사람, 상것들, 별 볼 일 없는 밑바닥 사람들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습니다.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 곧 근본적인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활작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많아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철부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 단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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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연중 제15주일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하면서 말씀카드를 만들어서 나누어 주곤 합니다. 지난번 이스라엘 성지순례에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뽑았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제가 가톨릭평화신문을 만들기 때문에 ‘평화’에 대한 성경 말씀을 뽑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좋은 기사와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독자들에게 ‘평화’를 주겠다고 묵상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환난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고통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이탈리아 성지순례에서는 루카복음 12장 15절을 뽑았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사실 그즈음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4년간 팬데믹의 시간을 보내면서 신문사의 재정에도 손실이 있었습니다. 저는 8월부터 신문사에서 급여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직원들도 주 4일 근무에서 주 3일로 근무시간을 조정하면서 급여를 조정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동안 마음고생이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뽑으면서 제 마음에도 평화가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이제 하느님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사명을 받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파스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신약의 파스카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틀’에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을 보았으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누렸던 ‘기득권’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을 때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동방박사들로부터 메시아가 왔음을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의 아들을 죽였던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어렵게 쌓아왔던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권력에 취해서 ‘진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파스카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을 치던 목동들입니다. 양을 돌보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입니다. 율법과 계명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아기 예수님께 ‘선물’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갈릴래아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입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관장 자캐오입니다. 자신의 재물을 기꺼이 이웃에게 나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습니다.” 오랜 동안 하혈하는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였던 바오로도 신약의 파스카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있다면,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순수한 마음이 있다면, 가진 것을 나누는 헤아림이 있다면, 절박한 믿음이 있다면,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가 있다면 우리는 모두 신약의 파스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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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연중 제15주일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광야 인생의 수련자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 수련장이시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끊임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찬미의 사랑이 있어 마음의 순수와 겸손의 관상가요 신비가입니다. 어제는 아름다운 시화詩畫가 잘 어울리는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이란 시를 참 많이 나눴습니다.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이지만 실은 제 고백이기도 합니다. 7월16일 아침 산책중 장마철 어둔 날 환하게 무수히 송이송이 피어나는 꽃들이 하늘 사랑의 끝없는 고백처럼 느껴졌고 순간 떠오른 시였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제 강론을 카톡으로 정리해 보내주는 자매님 이 꽃과 시가 어울린 아름다운 시화를 만들어 보내줬고 자매님의 기발한 착안과 솜씨에 감사했고 감동했습니다. 얼마전 나눴지만 또 좋아서 나눕니다.
-일년내내
아니 평생을
날마다
위로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며
사랑을 배웠고
날마다
아래로
땅 어머니를 바라보며
흙의 겸손을 배웠습니다
“사랑합니다!”
때되니 하늘 사랑 고백하며
송이송이
환대의 사랑으로 환하게 끝없이 피어나는
무궁화꽃들
깊고 깊은 하늘 사랑의 고백이구나!-
깊고 고운 나라꽃 국화國花 무궁화꽃에 시가 참 잘 어울렸습니다. 7월부터 10월까지 약100일간 날마다 새롭게 줄기차게 피고 지는 무궁화꽃말은 “섬세한 아름다움, 일편단심, 은근, 끈기”라니 꽃말도 하느님을 찾는 열정의 사람들인, 광야인생의 수련자들인 우리와 참 잘 어울립니다.
“멋지십니다. 깊고 깊은 하늘 사랑”
댓글의 카톡도 받았고,
“감사합니다. 신부님이 무궁화꽃이네요!”
라는 위로와 격려가 되는 메시지도 받았고,
“시화 감사합니다. 시의 내용이 참으로 깊습니다.”
라는 메시지에,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비는 기도같습니다.”
“무궁화꽃 시화 너무 예쁘네요.”
에 이어 조카의 댓글 메시지에 예전 제 강론에 “사랑의 향기마을” 카페에서 꼭 느낌을 달아주던 조카의 아버지, 셋째 형님이 생각났습니다.
“무궁화 삼천리가 아버지 아이디였던거 같은데 마침 삼촌 신부님께서 시를 쓰셨네요.”
그렇습니다. “무궁화 삼천리” 바로 사랑했던 지금도 그리운 셋째 형님의 아이디였고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애국가 후렴도 생각납니다. 오늘 시간되는 대로 애국가 4절까지 불러보고 가사도 익히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마음의 순수입니다. 날마다 평생을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며 넓고 깊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어디서나 하늘 사랑 배우라 눈만 들면 하늘입니다.
아, 바로 그 모범이 탈출기의 모세와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모세야 말로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두분 다 광야인생중 수련장 하느님을 일편단심 사랑했던 참 순수하고 겸손한 수련자였습니다. 두분 다 우리 국화 무궁화꽃을 닮았습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500권을 저술한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국심愛國心”이라 답했던 박석무님의 지체없는 고백도 문득 생각납니다.
우리 역시 평생 예수님을 수련장으로 모신 평생 수련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수련자로 선택하셨고 우리는 평생 예수님께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수련자들인 우리요 평생 수련장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광야의 고독과 침묵은 축복입니다. 한밤중 강론 쓰는 시간이 저에겐 광야의 고독과 침묵중에 주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누구나 광야 인생을 살아갑니다. 참으로 예수님 수련장과 함께 할 때는 예수님을 닮아 성인이지만 예수님을 떠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늘 모세가 광야 인생의 축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광야에서의 수련중 정화되어 마음이 순수와 겸손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때가 됐을 때 모세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주님은 그 장구한 세월을 끝까지 겸손히 인내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속에 나타난 주님입니다. 다음 장면은 읽을때마다 감동이요 새롭습니다. 아브라함을, 야곱을 다정하게 불렀던 하느님은 이번에는 모세를 다정하게 부르십니다. 주님과 모세의 숨막히는 긴박한 대화가 오고 갑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여기 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우리 역시 똑같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찾을 때 바로 오늘 지금 여기는 하느님을 만나는 꽃자리요 신을 벗어야 할 거룩한 땅이 됩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고, 이어지는 하느님의 파견명령이요 서로 주고 받는 대화가 또 감동입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광야에서의 관상축복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파견되어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관상 친교의 꽃은 세상의 선교로 열매 맺어야 함을 배웁니다.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아, 이래서 주님은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수한 모세를 택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겸손히 비워졌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평생 당신의 수련자인 겸손하고 순수한 모세와 함께 하겠다는, 영원히 모세의 살아 있는 배경이 되어 주시겠다는 모세의 수련장이신 하느님의 확약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탈출기가 주님과 모세의 만남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순수와 겸손의 철부지 예수님에게 나타나신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 예수님의 감동에 벅찬 감사와 찬양의 고백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고독과 침묵의 광야 여정중 하느님 아버지를 만났기에 이런 감사와 찬양의 고백입니다. 대우가 대지입니다. 철부지들이 상징하는 바, 생각없는, 영혼없는 바보가 아니라 순수하고 겸손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거룩한 바보들입니다. 바로 모세는 물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에 속하고 무수한 교회의 성인성녀들이 그리고 오늘 우리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용기와 힘의 원천이 됩니다. 모세를 능가하는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드님이자 하느님의 종으로 계시되는 예수님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드님의 은총이 있어야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데 이런면에서 예수님을 평생 수련장으로 모신 우리들은 참 행복한, 축복받은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 그리고 장구한 세월에 무수한 예언자들에 성인들에 이어 마침내 때가 되어 예수님이 나타났으니 복음의 이때가 오기를 지금까지 기다렸을 하느님 아버지의 인내와 겸손의 기다림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광야인생의 오아시스와 같은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우리의 수련장으로 평생 수련자들인 우리와 함께 지내고자 오십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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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연중 제15주일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왜! 예수님만이 구세주이어야 합니까? 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은 다른 예언자나 사제를 통해서 사람을 구하지 않고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셔야 했을까요? 굳이 예수님이 구세주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라는 구절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다.’를 네 글자로 하면 ‘하늘나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동산 이름이 뭔가요? ‘에덴’입니다. ‘에덴’에는 또 누가 살고 있었나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람은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있는 곳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곳이 하늘나라이고 태초에 그곳을 ‘에덴’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어기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는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었던 교만의 결과는 ‘에덴’에서의 추방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던 ‘에덴’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느님과 살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졌다는 말입니다. 죄는 하느님과 인간을 멀어지게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멀어지고, 멀어지고, 멀어지고 이젠 거리가 너무 멀어져 버렸습니다.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이 멀어졌는데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십니다.
너무 멀어져서 사람의 능력으로는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당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당신의 아들을 보내십니다.
당신의 아들을 구원자로 보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같기 때문입니다. 멀고, 멀고 멀어진 인간을 다시 하늘나라로, 하느님 곁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도록, 그분의 뜻을 이해하도록 해 줄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은 아들 예수님을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신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고, 우리를 하늘나라에 초대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은 길
2002년 4강 신화의 주역 중 하나인
이영표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갈림길에서 더 나은 길은
항상 내가 선택한 길입니다.
참으로 멋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보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고
늘 최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뒷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최고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 생애 최고의 날이 되기를
그 안에 기쁨과 즐거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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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연중 제15주일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손끝에 생긴 작은 티눈을 오랫동안 방치했다가 이것이 피부암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암은 원래 정상이었던 세포가 암세포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발생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암세포가 발생하는 부위가 손끝에 생긴 작은 티눈처럼 하찮은 몸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몸의 지체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손끝의 티눈까지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데,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소중하지 않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소중한 것은 소홀히 여기는 ‘어리석음’ 안에 살고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판단이 아마 타인에 관한 판단이 아닐까요? 그들 역시 하느님의 창조물로 소중한 존재인데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너무 쉽게 판단하고 때로는 단죄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그러면 우리도 판단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소중한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우표 수집에 푹 빠져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정말 가지고 싶었던 우표가 있었고, 적금을 부어 그 우표 한 장을 살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우표를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었을까요? 애지중지하며 혹시나 손상될까 늘 걱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러실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하느님께서는 혹시라도 우리가 손상될까 잘못될까 걱정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까지도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창조물인 사람에 대해 같은 모습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심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세상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만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에 반해 철부지들은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그들의 자리를 없애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십니다. 그들 역시 하느님 사랑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해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골칫거리였던 악의 세력이 꺾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면서 악에 대한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보잘것없다면서 무시하고 판단하는 삶이 아닌, 그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찾는 삶이 중요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다가서는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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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나의 운명이 결정된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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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연중 제15주일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뜻>
착한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착하신 뜻
곧은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곧으신 뜻
맑은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맑으신 뜻
밝은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밝으신 뜻
여린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굳건하신 뜻
낮은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높으신 뜻
작은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크신 뜻
찾는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감추신 뜻
열린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넓으신 뜻
믿는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오롯하신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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