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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해들어 첫 한달은 한국에서 유관 “녀류작가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암살공범”이라 한것은 옳거니와 그것은 사실이라는 나의 주장과 근거를 내놓음으로써 학계에다 그 진상을 알리려했고 따라서 인차 반론에 부딧쳐 론전을 치르게 되였다. 한데 이번 론전은 주제를 떠나 지협적인것에 매달리다보니 예상밖에 시간을 많이 끌었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 모르던것을 알게된것도 있으니 시간을 헛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내가 반론이 있으면 당당히 나서라했건만 상대측은 그러지 않았거니와 패배를 시원스레 승인하지 않고 총망히 물러나고말았다. 그래서 기분이 잡친 나는 격한 표현으로 그러는 그를 신사답지 못하다고 비난 한 것이다. 객관인 제3자는 잇터넷에 오른 나의 마지막 글 “시시비비를 마무리면서” 를 읽어보면 누구나 이번 론전의 결과를 짐작하게 될 것이다. 왠지 “창작마당” 칼럼,기획에 올랏던 나의 마지막 몇편글은 없어졌다. 조글로의 “문학닷컴 웹진 2010년 제1호 문단쟁명 〔김송죽&리광인〕”에 그것을 올렸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 글 본체는 아직 영 지워지지 않고 “작가미니홈” 나의 클럽에 저장되여 있으니 못본 분은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이번 론전에 나와 대결했던 연변대학의 리광인선생은 시시비비에서 물러나면서 “아직도 ‘1993년 김좌진관련세미나 옳히 리해문제, 조공당화요파에 대한 극단적인 비하문제’가 남았다”고 했기에 나는 생각다못해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데서 이 글을 가첨하여 내가 왜서 감히 조공당화요파는 “미런한 짓을 하고 민족과 력사앞에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 왜서 화요파의 거물급인물을 “악질”이라 욕했는가 하는 나의 그같은 견해와 주장이 나오게 된 원인과 근거를 단지 문학계만이 아니라 력사와 관계되니 력사계에까지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론전이 이미 끝났음에도 이번 글을 더 쓰게 된 리유인 것이다. 아래 몇조목으로 나누어 문장을 꾸미니 문장이 길어지는데 독자는 내심하게 마감까지 읽어주었으면 고맙겠다.
1. 무오독립선언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단군황조(檀君皇朝)께서는 상제좌우(上帝左右)에서 명을 내리시여 우리에게 기운(機運)을 주셨다. 세계와 시대와는 우리에게 복리를 주고자 한다. 정의는 무적(無敵)의 칼이므로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4천년 조종(祖宗)의 영휘(榮輝)를 빛내고 이로써 2천만 적자(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다. 궐기하라! 독립군! 독립군은 일제히 천지를 바르게 한다.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랴. 살신성인(殺身成仁)하면 2천만동포는 같이 부활할 것이다.일신을 어찌 아낄것이냐. 힘을 기울여 나라를 회복하면 삼천리 옥토는 자가소유(自家所有)이다. 일가의 희생을 어찌 아깝다고만하겠느냐. 아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된 본령을 자각한 독립인것을 명심할것이요,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의 자립인 것을 명심하도록 황천의 명명(明命)을 받들고 일제의 사악(邪惡)으로부터 해탈하는 건국(建國)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이것은 1918년 11월 13일에 길림에서, 대종교의 제2세교주 김교헌(金敎獻)을 비롯하여 제3세교주 윤세복과 김동삼, 신규식, 박은식, 박찬익, 김좌진, 리시영, 리상룡, 신채호, 리동녕 등 대종교중진이 주축이 되여 39명의 서명자가 만주와 로령의 유지일동이란 명의로 세상에 발표한 독립선언서인 것이다. 중관단의 발기로 무오년에 발표했다하여 혹은 중광단선언이라고도 하는 이 “무오독립선언”은 일제에 항쟁한 거족적인 3.1운동의 선언서는 물론 일본 동경류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보다도 선구적으로 썩 앞섯거니와 그에 기폭제로 되였기에 무엇보다 력사적인 의의와 가치가 큰 것이다. “무오독립선언”은 민족종교인 대종교바탕위에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것은 조국을 광복시키고야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결단코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우리 조선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깨우치면서 일떠나 항일하라고 호소한 것이다. “궐기하라! 독립군!....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열혈이 끓게 하는 이 웨침! 항일민족독립운동의 이같은 명확하고도 철저한 방략이 그때 그 시절에 바로 우리가 지금 발을 붙이고 사는 이 땅에서 나온것이다. 하여 어젯날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여기 이 만주땅은 실제상 독립운동의 책원지로 되었고 항일독립전쟁의 치렬한 전투장으로 되었던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난세기 2,30년대였다. 끓어번지는 열혈과 청춘을 바쳐 싸웠던 독립군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강도일제침략자와 영용불굴하게 싸워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바친 그들을 우리는 내민족 내집사람으로 여겨야지 남처럼 다르데 보고 배척해야 할 아무런 리유도 없다. 력사는 지난일인데 돌이켜보면 무엇을 명기해야 하는가를 알게되는 것이다. 하기에 지난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의 교훈이 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우리가 력사를 중히 여겨 연구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본다. 지금으로부터 418년 전, 조선의 력사에서는 지긋지긋한 혹심한 재난에 빠진 년대였던 저 임진왜란당시, 조선의 재상이였던 유성룡은『징비록』에다 이런 글을 남겼다. “적병은 무릇 우리 나라 사람을 붓잡기만 하면 코를 베여 위세를 부렸다” 일본승려 교넨(慶念)의 『조선일일기』에는 좀더 자세히 기록되였다. “역사상 이 전쟁처럼 슬픈것은 없다. 병사들이 가는곳마다 살육을 일삼고 불을 지르니 그 연기가 마을마다 가득하였다. 조선 사람의 머리와 코를 대바구니에 담으니 대바구니가 가득했고 병사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 우리 조선사람의 코를 베여 그것으로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커다란 “코무덤”(훗날 “귀무덤”이라 고침)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서 일본밖에 없다. 사무라이족속(族屬)ㅡ 그 야만스러운 잔인성이 발작한 침략자들이 조선을 병탄하고나서 여기 이 동북까지 들어와서는 어떻게 했는가를 보자. 한가지 례만 들겠다. 괴뢰 만주국이 건립된 초 북만의 해림근처 전사호툰(前沙虎屯ㅡ지금의 중홍촌)에서 발생한 일이다. 그 마을에는 독립군이 해체되자 가정이 있음으로 하여 관내에도 산에도 가지 않고 농사질하는 독립군이 19명 있었는데 비내리는 어느날 밤, 복면한 일제살인귀 셋이 한무리의 정안군을 앞세워 마을에 들어와 독립군 19명을 하나하나 붓잡아 마을밖 “장군나무”밑으로 끌고가서는 그 마을의 중국사람을 위협하여 작두로 목을 자르게 했는데 목 하나를 자르는데 돈 3원을 주었다. 전신이 독립군의 피로 즐벅히 젖은 그 중국사람은 보복이 검나 날밝기전에 녕안쪽으로 내빼고말았다. “간밤에 중국사람이 조선사람을 죽이고 도망갔다!”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웨쳐대면서 떠들었다.며칠안되여 일본군과 할빌령사관의 <<사건조사단>> 사람 몇이 나타나 “황국신민이 된 조선사람이 이국땅에 와 살면서 되놈의 손에 이같이 참살을 당하니 과연 가슴아픈 일이요”하면서 조난자의 가정에 <<위안금>>이라면서 30원씩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집단학살당한 이들의 혼을 위로한다면서 그 자리에다 비석까지 하나 세웠다. 독립군을 최종적으로는 멸살하려들었던 잔인한 일제의 교활한 수단이 이정도였다. 한데 “혁명”을 부르짖으면서 항일을 한다는 조공만주총국(화요파)은 그 전해에 도대체 어떻게 했는가 보자. 그자들은 저들 대오내부에서 생겨난 변절자의 작간으로 꾸며진 일제의 반간책(反間策)에 보기좋게 넘어가 있지도 않은 죄를 만들어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인정되여 없애치우기로 결정”짓고는 항일대오를 이끌고 난관을 꾸준히 헤쳐나가고있는 독립군수령 김좌진장군을 죽이여 원쑤의 속을 후련히 풀어준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미러한 짓이였다. 한데도 력사를 “연구”한다는 어떤 사람은 그 진상을 잘모르면서 아직도 그때 그자들의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고집하니 력사가 오도되여도 대단히 오도된 것이다. 력사는 있은그대로 존재하게해야 한다. 이제는 화요파가 민족과 력사앞에 지은 그 수치스러운 죄를 속히지도 덮어감추지도 말아야 한다. 늦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우리의 후대가 건강하게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진상을 제대로 밝혀놓는것이 옳은 일일것이다.
2. 대종교와 한국독립운동
“대종교는 20세기 민족수난의 시대에 반제국, 반침략 저항정신의 중핵을 이루었으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준 민족종교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직면하여 우리 민족은 국권회복운동의 정신적 기반으로써 국조(國租) 단군(檀君)을 구심점으로 삼았다. 민족종교인 단군교(檀君敎)를 재건한 다음, 1910년에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대종교는 종교단체이기보다는 독립운동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종교뿐 아니라 외교, 교육, 경제 다방면에 걸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미(對美), 대일(對日) 외교활동 시도와 ‘을사5적처단’의거 등이 실패하자, 교조(敎祖) 나철(羅喆, 羅寅永)과 그의 동지들은 대종교총본사를 항일무장투쟁의 본거지인 중국 동북지역(滿洲)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대종교 포교를 위해 각지에 설치한 시교당(施敎堂)은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단체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포교활동을 통한 시교당의 설치도 확대되였다. 그 결과 대종교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단체는 중광단(重光團), 정의단(正義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신민부(新民府), 한족총련합회로 맥락이 이어졌으며, 대종교도들이 주류를 이룬 독립운동단체의 활동 중 대표적인 것이 청산리대첩(靑山裏大捷)이였다. 이와 함께 각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단군을 독립운동세력의 단결과 통합의 중심가치로 삼음으로써, 만주지역의 우리 민족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중국 동북군벌의 방해와 일제의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기념관 <<대종교와 한국독립운동 특별기획전>> 북로군정서를 말하려면 우선 그 창시자인 서일(徐一)을 빼놓치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이 강력한 대종교 독립군부대를 창립하고 지도한 사람이 바로 대종교의 제4종사며 북로군정서 총재(總裁)였던 그였으니까. 서일은 초휘가 기학(夔學)인데 1881년 2월 26일생으로서 조선 함경도 농안면 금희동사람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운 그는 22살에 함일사범을 졸업하고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듬해에 조국광복을 바라고 만주로 건너와 대종교에 입교한 것이다. 그리고는 연변의 화룡과 왕청에다 선후 “청일학교”와 “동창학교”를 세우고 민족계몽사업을 하면서 한편 항일무장투쟁을 목적하고 대종교청년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설립하였다. 이에 가입한 자가 무려 1,000명에 달했던 것이다. 1916년에 상교(尙敎)가 된 그는 大倧敎總本司典理로 전임(傳任)하여 경전(經典)을 저술하는 한편 포교(布敎)에 노력하여 3년내에 30만에 달하는 교도를 획득했다. 그리고는 1918년에는 중광단의 위력으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일본침략자를 향해 공개적인 선전을 한 것이다. 제2세교주 김교헌은 여러번이나 주교의 자리를 서일에게 넘기려했지만 서일은 대종교일보다 항일독립전쟁으로 먼저 독립을해야겠다는 생각에 대종교주교자리를 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당시 주로 훈춘, 화룡, 연길, 왕청 등 4개현을 북간도라 지칭했는데 초기 대종교인이 거주한 곳이 바로 이 4개현이였다. 하기에 그 기반으로 조직된 중광단을 정의단으로 발전시키면서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당시 대종교인중에서도 주요지도자로는 서일과 라중소(羅仲昭)였다. 서일은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됩과 함께 김좌진을 초빙했다. 그 직후 3.1운동으로 인하여 망명혁명가와 구군대 그리고 애국청년들이 많이 모여와서 사람이 점점 많아졌고 민족의식은 더더욱 고조되였던 것이다. 1919년 8월 7일, 서일은 김좌진의 제의를 받아들이여 자기가 건립한 대종교의 대한정의단을 대종교의 군정부로 개편하였다. <<....우로 신성의 영광을 조정에 돌리려거든 아래로 노예의 욕됨을 자손에게 남겨주지 않으려거든 이때를 놓치지 말라. 이 몸을 생각하지 말라. 한몸을 순(殉)하여 1백몸이 속죄함은 인도의 원훈(元勳)이니라. 소수를 희생하여 다수를 살림은 정의의 공덕이니라. 누가 살려고 하지 않으리오만은 노예로 사는것은 생의 치옥이요. 누가 죽는것을 싫어하지 않으리오만은 신성하게 죽는것은 사(死)의 영광이니라. .....우리 동포 대한의 남매여! 지모가 있는 자는 지모로, 용기가 있는 자는 용기로, 기예가 있는 자는 기예로 각자 능력을 다하여 나서며 무기가 있는 자는 무기를, 량미가 있는 자는 량미로, 금전이 있는 자는 금전으로 각자 힘을 다하여 내놓아서 공적(公賊)일본을 토멸하여 천하의 공분을 씻으며 우리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며 만세에 영광을 남기리.>> 이는 대한정의단이 무장독립단체인 대한군정회로 재조직되면서 발표한 창의문이다. 열열하고 절절하며 따라서 매력적인 강한 호소력을 갖고있는 이 창의문은 피끓는 젊은이들을 정의로운 항일구국성전에로 불러일으키면서 그들을 자기의 두리에 굳게 묶어세웠던 것이다. 그당시의 북간도지역을 놓고 보면 기독교계의 북간도국민회를 비롯하여 대한정의군정사, 의군부, 광복단, 이민단, 야단 등 무려 40여에 이르는 각종 단체들이 많았지만 거개가 아직은 무기는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에 비해 백포종사 서일(徐一)과 김좌진이 주도한 군정부는 대종교도들을 기반으로 행정구역을 획정하고 자기의 군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이는 그당시 다른 독립단체들은 생각못한 것이였다. 군정부는 대원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한편 무기구입을 다그치면서 재만동포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대중교섭(對中交涉)을 했고 일제와 결사전을 하기 위한 방략구상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그 중심인물은 다가 대종교도들이였고 또한 군사리론과 군사훈련을 받은 능력자들이였다. 바로 이같이 대종교를 신봉하는 교포들의 바탕위에 강력한 군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그들은 력사적인 사명을 완수할 준비를 한 것이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부는 상해림정의 <<국무원 제205호>>정신에 립각하여 대한군정서로 고쳤다. 그리고는 西路軍政署와 대칭으로 北路軍政署라는 별칭을 가진것이다. 기실 군정부자체에는 조직의 재편에 불과할 뿐 근본변화는 없었다.
3. 북로군정서
하다면 북로군정서는 대체 무엇이였는가? 그에 대해서는 력사학가 박영석선생이 다음과 같이 귀납했다. “북로군정서는 在滿韓人社會의 바탕위에서 조직된 가장 큰 抗日獨立運動團體였다. 더구나 이 북로군정서는 단군(檀君)을 중심으로 한 救國宗敎團體일 뿐만아니라 大倧敎 救國抗日民族獨立運動團體로서 철저하게 정신무장이 된 단체인 동시에 民族軍隊의 性格을 띤 强力한 獨立軍部隊였다.” 당시 북로군정서가 자리잡은 곳은 왕청현 서대파인 청명향(淸明鄕)이였다. 1,600~1,700여명 군정서구성원(軍政署構成員)의 대다수가 大倧敎人으로서 강한 민족주의자들이였다. 그들은 로씨야로부터 구입한 무기로 무장했고 속성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계속적인 강훈련으로 정예한 독립군을 배출했던 것이다. 북로군정서 하나만 그런것이 아니였다. 얼마지나지 않아서는 각지에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정의군정사, 광복군사령부, 한민회(부민단), 대한독립단, 대한청년연합의용대, 대한독립군비단, 광복단, 의성단, 천마대. 태극단, 대진단, 향약단, 백산무사단, 의용단.... 등등 독립군무력이 생겨나 그를 본받아 다그쳐 림전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하여 만주의 넓은 산야에서 우렁찬 <<독립군가>>의 노래소리 메아리쳤다. 이해 즉 1920년 2월 17일자 <<독립신문>>은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론하여 독립전쟁의 결행을 경축하면서 그 승리를 기원했다. “2천의 독립군의 승첩은 동아의 대혁명의 개시를 <宣 >하는 경종이라하노라. 이미 불은 당기였도다. 독립전쟁의 제1기는 림박하였도다. 폭풍우의 선구자 지평선을 스치고 가도다. <중용한 대한의 남아여, 혈전의 시 광복의 추가 來하였도다. 너도 나아가고 나도 나아갈지라. 정의를 위하야 민족을 위하야 총과 혈로써 조국을 살릴 때가 이때가 아닌가> (군무부포고) 독립전쟁의 제1보에 우리에게 돌아온 이 승리는 즉 독립전쟁의 전도를 하는 승리요, 동아대혁명의 성공을 祝하는 승리로다. 승리를 축하하는 자는 나오라. 승리를 향하야 돌진할 자는 나오라.” 각 독립군들에서는 훈련을 더욱 다그쳤다. 1920년 9월 6일, 중국파견군의 혼성려단장 맹부덕이 부하 200여명을 거느리고 직접 북로군정서 병영이 있는 서대파에 나타났다. 완력으로 독립군을 쫓으러 온것이 아니라 일제측에게는 <<토벌>>을 내세우면서 내면적으로 북로군정서의 근거지를 조속히 이동시킬것을 간청하러 온 것이였다. 이런 때에 일본군의 대거침입정보를 수집한 홍범도로부터 안무(安武)등 국민회부대와 함께 장백산밀림으로 들어가서 기회를 보아 일대 격전을 하자는 서신이 날아왔다. 홍범도 역시 독실한 대종교인이였거니와 그가 거느리는 부대도 꼭같은 대종교항일부대였던 것이다. 서일과 김좌진장군은 그의 제의를 쾌히 접수하여 사관련성소에서 6개월간 훈련해온 298명의 사관련성생의 수련을 다그쳐 끝내고는 9월 9일 제1회졸업식을 성대히 했다. 그리고나서 김좌진은 9월 12일까지 졸업한 사관생을 중심으로 한 려행단(교성단)과 150명가량의 사관으로 사령부부대와 북로군정서의 본대를 편성하고 장정준비를 마무리하였다. 9월 17일과 18일에 드디여 가족을 포함한 서원전체가 80여대의 운송마차에 무기와 짐을 적재하고 서대파의 본영을 떠나 서남쪽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로 진군했다. 그것은 일제토벌군의 간도침략을 사전에 막고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장정이였다. 2만여명 적군가운데 청산리로 추격 침임한 것이 5,000여명으로 추계, 이를 상대하여 서일, 김좌진, 홍범도는 도중에 청산리회전을 한 것이다.
1920년 10월, 조선독립전쟁사상에서 금자탑이 되는 청산리대첩!
상해림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제91호, 1921년 1월 21일자에는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부하 300명은 대소전투 10여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 1,200명중 적이 자상사살한 자 400명>>이라고 청산리대첩을 기술했다. 이어서 2월 25일자 신문에는 북로군정서총재 서일이 림시정부에 써올린 일본침략군의 참패와 독립군의 승전원인을 분석한 글을 발표했다. 중국조선족력사학계에 보내는 글 김송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