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럇여아림 사람들 (삼상 6:19-7:4)
1. 사무엘상 네번째 설교입니다. 오늘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을 설교하려 합니다.
<기럇여아림>이란 “숲속의 성읍” 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 가라는 벧세메사 사람들의 말을 듣고, 군말없이 언약궤를 그들 성읍으로 가져온 사람들입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언약궤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다곤신상이 부서졌고, 독한 종기로 고생하였고, 심지어 에그론 사람들은 언약궤가 자기들 성읍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전쟁에서 힘써 빼앗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냅니다. 언약궤를 돌려보낼 때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삼상 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소에게 멍에를 메우면, 목이 아파서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소에게 멍에를 메우고 수레를 끌게 하였습니다.
젖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게 하였고, 송아지는 떼어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어미 소는 송아지 생각에 수레를 제대로 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최악의 방법을 동원하여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다곤 신상이 깨어진 것처럼 언약궤가 부서지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마리의 어미 소는 아주 신중하게 수레를 끌었습니다.
삼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우리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윽고 언약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였습니다.
2.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언약궤를 보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어떤 성경은 오만 칠십명이 죽었다고 기록하였고, 또 다른 성경은 그 성읍에 오만 칠십명이나 살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오만 명을 뺀 것 같습니다.
어쨋든 벧세메스 사람들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더 이상 언약궤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언약궤를 가져가라 하였습니다.
물론 기럇여아림 사람들도 언약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언약궤로 인하여 벧세메스 사람들이 재앙을 당했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언약궤는 뜨거운 감자와 같았습니다. 좋은 것은 맞지만, 그게 너무 뜨거워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으로 기럇여아림에 또 재앙이 임하면 어찌합니까?
기럇여아림 사람들도 에그론 사람들처럼 언약궤가 자기 성읍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군말 없이, 순순히 그곳에 가서 언약궤를 옮겨 왔습니다.
3. 성경은 기럇여아림 사람에 대하여 아주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다가,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시켜 언약궤를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삼상7:1절,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여기에도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잊지 말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과 구별하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거룩한 것이 구별된 것이고, 구별된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과 뒤죽박죽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하나님 물건을 신중하게 다룬 것입니다.
20년 동안 그곳에 있었습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삼상 7:2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공동번역에서는 “이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이스라엘 족속은 모두 여호와께로 마음을 돌렸다” 번역하였습니다. 사모하였다는 말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점점 참된 신앙을 회복한 것입니다. 이제 언약궤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4. 세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옮겨가라는 말에, 어떤 이유도 없이, 즉시 벧세메스로 가서 언약궤를 옮겨왔습니다.
둘째,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엘리아살은 20년 동안 언약궤를 지키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셋째, 20년 동안 기럇여아림에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즉 어떤 재앙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께로 마음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5.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바람직한 신앙의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2차 전쟁 때에 언약궤로 승리를 얻고자 했던 사람들처럼, 그런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언약궤를 통하여 어떤 이득을 얻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물건이기에 신중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두었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잘못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단도리를 하였습니다.
성경학자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언약궤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냄새를 발하였는데,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손에 있음으로,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를 발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물건이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손에 있음으로 평안의 향기, 은혜의 향기, 생명을 구원하는 향기가 난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과 기럇여아림 사람들을 대조하게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기쁨으로 맞이했다가 나중에는 슬픔으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언약궤로 인하여 성읍 전체가 평안하였습니다. 이전보다 더 경건한 모습이었습니다. 처음에도 좋았고, 과정도 신중했고, 나중도 보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일로 모두가 평안하고, 감사하고, 더욱 만족스럽기를 축복합니다.
6. 둘째로,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은 20년 동안 헌신하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아비나답의 집에다 언약궤를 두었을까요?
말씀을 보면, 그는 레위인도 아니고, 제사장의 집안 사람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아비나답의 집이 산에 있었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언약궤를 좀 더 높은 곳에 두고자 하는 마음이지 않을까요?
아비나답은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에 하나님의 물건을 두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당시에 레위인도 있고, 제사장도 있었겠지만, 일반 성도의 집에 언약궤를 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거룩한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 하였습니다. 아비나답은 자기 아들 엘리아살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우선 언약궤를 두는 장소를 깨끗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눈비가 오면 젖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 사람이나 쉽게 고개 내밀고 들여다 보지 않게 하였을 것입니다.
산짐승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단도리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아살이 밤낮없이 그곳을 지켰을 것입니다.
20년의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엘리아살이 20살부터 그 일을 시작하였다면 나이 40까지 그 일을 한 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의 헌신이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누가 대신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믿음이기를 축복합니다.
7. 셋째로, 그렇게 20년이 지났고, 이스라엘 온 족속이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공동번역은 “하나님을 사모하였다”를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렸다”고 하였고, KJV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애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모하다는 용어인 “나하” 는, 사모하다는 뜻도 있고, 사모함으로 애절하게 소리내어 우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였다는 말씀이 주는 의미가 상당합니다.
(1) 언약궤를 바라보던 신앙이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2) 지난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언약궤를 바라보았던 잘못을 통회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 20년 세월이 지나고보니, 언약궤만 바라보았지, 막상 하나님을 찾지 않았음을 애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지요.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영이 새살처럼 돋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은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게 될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8. 그러나 그런 마음도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 다음에는 사무엘이 등장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다른 국가처럼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왕을 요구합니다.
사무엘이 몹시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과 세상적인 권세와 능력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어찌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떻게하면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 있을까요? 살수록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인생을 어찌 달랠 수 있을까요?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도다”라 하였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9. 정답은 아니지만, 제가 최근에 작게나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 손녀가 두 주간 다녀갔습니다. 못생겼지만 참 이뻤습니다. 두 주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목요일은 제가 테니스를 하는 날인데, 테니스도 하지 않고 손녀랑 지냈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손녀에 빠져 있다가 손녀가 가면 어찌하려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도 새벽기도 마치고 아침 시간에 손녀를 보내고 얼마나 더 보고 싶으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좀 부족하다, 아쉽다 정도로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주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안아주었습니다.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불렀고, 젖먹이는 시간이면 제 애미를 밀쳐내고 제가 젖을 먹였습니다. 심지어 저녁이면 제가 목욕을 시켰습니다. 마음을 다 쏱았습니다.
근데, 그렇게 많이 아쉽지가 않습니다. 아쉬움과 부족함은 채워지지 않아서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면, 오히려 그 마음에 흡족함이 있습니다.
마음을 줄 만큼 주고, 쏟을 만큼 쏟으니, 아쉬움도 사라지고, 부족함도 채워지는 것이었습니다.
10. 다윗이 이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주셔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 마음이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마음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흡족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채우고자 하면, 그것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만을 더욱 자극할 뿐입니다.
욕망의 길 위에는, 나보다 더 잘 뛰는 놈이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나쁜 놈이 있는 것입니다. 그 끝은 더 나쁜 놈에게 먹히게 마련입니다.
인생은 욕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흡족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함으로 만족하고 흡족한 것입니다.
11.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신앙의 자세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언약궤로 인하여, 처음에도 좋았고, 과정도 경건하였고, 결과도 흡족하였습니다.
아비나답과 엘리아살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거룩하였고, 구별되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언약궤를 지켰습니다.
20년 동안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할 때,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흡족한 것입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과 같은 믿음이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