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란 단어가 한 때 유행한 적이 있다.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때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느낌을 주는 온라인 기반 서비스를 이르는 말이다. 지금은 온라인 서비스 전반을 가리키는 말처럼 쓰이지만, 처음에는 영화 매트릭스나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대체현실 수준의 서비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소파에 앉아 기기를 장착하고 메타버스에 접속한다. 눈 앞에 북극의 얼음이 펼쳐지고 펭귄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이 세상에서는 펭귄들과 대화도 가능하다. 북극곰을 쓰다듬어볼 수도 있다. 추운 북극에서 북극곰의 체온에 기대어 따뜻함을 느껴본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기분. 그러나 디바이스를 벗으면 나는 여전히 무더운 여름날 소파에 앉아 있다. 생각만 해도 신기하다. 다만 아직 이정도 서비스들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단어 먼저 너무 뜨다 보니 인기가 조금 시들해 졌나보다. 그래도 서비스가 지속되는 중이다.
메타버스를 보면서 현대 교회 경험을 메타버스 교회로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 참여하는 교회는 메타버스 서비스인 것이다. 주중에 현실의 삶을 살다가 주말이 되면 교회라는 메타버스에 접속한다. 그곳에서의 나는 마치 내가 선택한 온라인 게임 속 캐릭터 마냥 현실의 나와는 조금 다르다. 교회의 신규 접속자들을 늘리는데 관심이 있고(전도), 이 서비스가 지속되는 것에 헌신한다(교회사역). 거기까지는 좋다. 그리고 신앙 콘텐츠를 주말 동안 즐기고 나면 로그아웃한다. 그리고 월요일부터는 주말에 즐겼던 신앙 콘텐츠는 잊어버리고 현실의 삶이 시작된다. 물론 주중에 몇 번 더 접속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에서 벗어나 교회라는 메타버스로 날아가는 것이라는 면에서 다르지 않다. 이것이 메타버스형 교회의 모습이다. 대형교회가 더 잘 되는(?) 이유도 해석 가능하다. 대형일수록 더 현실 같은 컨텐츠를 제공하기 쉽다. 마치 대기업 게임회사처럼. 인디개발사에 비유할만한 작은 교회들은 가상 현실로써의 경험이 깨진다.
이런 비유가 가능한 것은 교회경험이 메타버스만큼이나 일상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선데이크리스천이라는 오래된 개념이 왜 의미가 있는지 더 잘 이해도 되고, 교회가 세상의 문제를 잘못 짚게 되는 경우들에 대한 이유도 알게 된다. 물론 교회 구역예배와 같은 소그룹에서는 현실에서의 힘겨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주말에서의 교회 경험이 한 주를 시작할 때 힘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청소년들은 온라인 게임 채팅에서도 자기 속 마음을 터 놓고 서로 조언을 구한다. 온라인 게임 경험이 유능감과 활력을 주어서 현실을 살아가게 해 주는 경우들도 있다. 그렇게 보면 여전히 교회경험은 신앙컨텐츠 메타버스에 비유할만 하다. 본래부터 교회는 딴세상(메타버스) 구조였던 셈이다. 강력한 이원론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일까? 교회는 본래 ‘따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 아니던가? 맞다. 그런데 아니다. 교회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놓여 있다. ‘이미’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아직’은 하나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메타버스형 교회구조의 문제는 ‘이미’는 잘 반영하지만 ‘아직’이라는 면은 잘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아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하지만, 아직 임하지 않은 현실 속에 깊이 참여해야 한다. 현대의 교회 구조에서는 아직이 잘 반영되기 어렵다. 지적은 쉽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메타버스말고 여전히 관심받는 또 다른 서비스로 증강현실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길찾기 서비스를 실행한다. 그러면 내가 쓰고 있는 안경에서 걷고 있는 길의 바닥에 라인을 그려준다. 이 라인은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다. 그리고 길을 가면서 주변에 있는 가게들 중, 내가 미리 설정해 둔 관심사와 관련 되어 있는 가게들을 간략한 정보와 함께 표시를 해준다.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가 마치 이와 같았으면 좋겠다. 주중의 삶에 매 순간마다 지침이 되는 교회 말이다. 교회 생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메타버스에서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에 집중하도록 돕는 교회 말이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실 증강현실교회는 오래전부터 교회가 많이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근데 무엇인가가 가로막고 있는 마냥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사실 증강현실 서비스에 대한 비유는 메타버스형 교회에서 증강현실형 교회로 넘어가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생각해 보라. 메타버스형 서비스에 비해 증강현실 서비스를 만드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지를. 그것은 바로 현실과의 상호작용이다. 메타버스는 서비스 내부만 잘 구축하면 되지만, 증강현실 서비스는 일일이 정보를 찾아내고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고 정확한 정보를 사용자가 알기 쉽도록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서비스로서의 의미가 생긴다. ‘이미’와 ‘아직’을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세상에 대한 전문가들이 필요한 것이다. 신학과 목회라는 교회 내부의 전문가들로만 구성된 교회 지도자그룹은 메타버스형 교회는 제공할 수 있을 지언정, 증강현실형 교회를 제공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고자 그동안 교회가 인문학에, 심리학에, 사회학에 관심을 가져 온 셈이다. 그 방향이 맞다. 그리고 관심을 넘어서서 신학뿐 아니라, 인문학, 심리학, 사회학의 전문가들이 교회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가정에서, 회사에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된다. 메타버스 안에서 띄워주는 지도만 보고 길을 찾아가기가 너무 어렵지만. GPS와 도로지도, 교통상황, 운전방향 모두가 전문가들에 의해 조사되어서 제시되는 네비게이션이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듯이 말이다.
증강현실형 교회는 사실 선교적 교회라는 이름으로 오래전부터 제시되어 온 개념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생활전문가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이 교회 내에서 전문적인 역할을 맡게 되면 좋겠다. 새로운 교회 내 전문 역할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가 늘 소망하던 세상 속 교회를 마침내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