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17
3월2일[사순 제1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_XQyc4f4u7A (김우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야말로 사면초가, 사방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 쌓여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어 힘겨워 하시는 몇 명 형제님들과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마음이 너무 착해서, 약삭빠르지 못해서 갖은 괴로움을 홀로 떠안고 가는 순박한 형제들의 눈망울 앞에 뭐라 할 말이 없더군요. 그저 힘들 내시라고, 언젠가 이 시련의 끝이 있을 것이라고, 기도하겠노라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했습니다.
겨우 오늘 복음 말씀에 다시 한번 희망을 걸고, 더 간절히, 더 열렬히 기도해보자고 초대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7장 7~8절)
여러 가지 이유로 사면초가에 몰린 분들, ‘이제는 갈 곳이 없구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부디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온몸을 바쳐, 목숨을 걸고 한번 기도해보십시오.
나 혼자만의 기도로 부족할 것 같으면 ‘기도부대’를 동원하십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어려워하지 마시고 기도를 부탁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틈만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늘 외치십니다. “부디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기도로만 끝내서는 안 됩니다. 실생활 안으로 들어오면 최선을 다해 현실에 맞부딪쳐보십시오. 반드시 은총의 하느님께서는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좌절과 고통의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무엇을 청할까, 무엇을 찾을까, 무엇 때문에 두드릴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 지향,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스런 모습이기도 하지요. 우선 ‘나’의 만사형통, 내 가족의 안녕, 우리 가문의 번성, 우리 고장의 발전이 이루어져야만, 이웃 봉사도 가능하고, 더욱 나은 세상 건설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의 기도 지향이 너무나 극단적 이기주의로 치닫기에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기도라기보다 강요입니다. 하느님을 깎아내리는 행위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을 떠보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기도도 아닌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기도지향은 어떠해야 할까요? 무엇을 청할까요? 무엇을 찾을까요? 무엇을 위해 두드릴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의 비극이 없는, 더 이상의 무자비한 폭력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다시는 굶주리지 않는, 절대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육에 매몰된 세상이 아니라 영으로 무장되었기에 건강하고 건전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께서 그 자리에서 즉시 들어주실 제대로 된 청원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께서 산 제물로 기쁘게 받으실 가장 바람직한 기도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OdpeYxMba0
++++++++++++++++++
<당신께 누군가가 청하면 정말 다 들어주시느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청을 다 들어주실까요? 대부분 선뜻, ‘예!’라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들어주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다 믿으시는 것은 들어주시고 그렇지 않은 것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가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청을 들어주시고, 그렇지 않고의 조건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느닷없이 나오는 이 말씀에는 조건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는 ‘이웃 사랑’을 뜻합니다. 역시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계명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이 여호수아서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다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을 차지하여 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들을 사방으로부터 평온하게 해 주셨다. 모든 원수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대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주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던 것이다. 이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하신 그 모든 좋은 말씀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여호 21,43-45)
하느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땅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법이 지켜지는 나라입니다.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지켜져야 했던 것은 주님께 선악과를 봉헌하고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었습니다. 이 계명이 십계명에 그대로 나타나고 주님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뜻을 지키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도 하느님 나라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들어지지 않는 이유는 아직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 하느님 나라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소리가 그분께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간증 중에 중요한 두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선 동안교회 신도수가 늘어나자 91년도에 50억 정도의 예산을 잡아 새 교회를 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한 것입니다. “50억은 큰 돈입니다. 우리가 50억 교회를 지으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5억짜리 개척교회를 짓고 50억짜리 교회를 지으면 쉬울 것입니다.”
십일조를 생각한 것입니다. 신도들이 다 동의했다고 합니다. 그때 성전건축을 위해 6억 정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선 개척교회를 먼저 짓고 자신들의 교회는 나중에 짓자며 6억으로 개척교회를 하나 내 주었습니다. 일산 동안교회입니다. 그 교회도 나중에 크게 성장하여 김해에 20억짜리 개척교회를 세워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일산 동안교회를 짓는 동안 재정에 네 배 늘어서 아주 쉽게 100억짜리 건물을 짓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두 배 큰 예배당을 두 배 쉽게 지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청이 들어지는 순서입니다.
이분은 이웃 사랑에 대한 간증도 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할 때 대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다 나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를 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탈북자들을 위한 공장과 사업을 위해, 곧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200억을 모아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성전을 지으면 됐습니다.
하지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것으로 탈북자들이 일할 일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고는 교회를 네 개로 분리하여 각자가 새로운 자리에서 새 교회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 교회는 지금도 매우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 목사님의 예를 들어서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분의 정신은 참으로 오늘 복음에 맞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그분의 나라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분은 에덴동산에 계십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를 바쳐야 합니다. 십일조를 바칩시다. 그리고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런 상태에서 구하는 것은 반드시 다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다만 구할 때 그 목소리가 주님께 들릴 수 있는 곳에는 머물러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과학자들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챗봇’을 개발하였습니다. 챗봇은 고객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고객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추천하기도 합니다. 인공지능 스피커는 날씨를 알려주기도 하고, 원하는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전화를 걸어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발전하는 챗봇은 우리사회 전반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온라인 상점은 챗봇을 고객 서비스 에이전트로 사용하여 제품 정보를 제공하고 맞춤화된 제품 추천을 제공하며 주문 및 반품 요청을 처리합니다. 은행과 신용조합은 챗봇을 지능형 에이전트로 활용하여 고객의 질문에 답변하고, 계좌 잔고 및 명세서를 제공하여 기본 트랜잭션을 처리하면서 저축 및 투자에 대한 조언을 제공합니다. 병원과 클리닉은 챗봇을 활용하여 예약, 의약품 정보 제공, 환자와 가장 가까운 병원을 찾도록 지원하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챗봇을 통해 학생 피드백, 교사 평가, 관리 업무를 지원합니다. 보험업계에서 챗봇을 가상 에이전트 및 어드바이저로 활용하여 청구서 제출, 상태 업데이트 제공, 기타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할 수 있으므로 직원들이 더 전문적인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습니다. 제조업체는 챗봇을 통해 공급업체 관리 및 소통, 작업자 지원, 작업장 유지관리, 제품 리콜, 인사 업무 등을 처리합니다. 항공사와 요식업계는 챗봇을 활용하여 고객의 발권, 온라인 체크인, 기타 여행 관련 사항을 지원하는 대화형 에이전트로 사용합니다. 항공사와 요식업계는 챗봇을 활용하여 고객의 발권, 온라인 체크인, 기타 여행 관련 사항을 지원하는 대화형 에이전트로 사용합니다. 저는 주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거나, 주소를 알려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챗봇은 ‘만물박사, 척척박사’와 같이 우리 주변에 이미 가까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챗봇의 사용에도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 기원은 로봇의 3대 원칙과 비슷할 것입니다. “첫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둘째, 첫 번째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로봇은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인간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더 여러 가지 지식을 소유한 로봇이 인간을 통제하거나,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도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나의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동산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가질 수 있다. 너희는 이 동산에서 마음껏 지낼 수 있다. 다만 ‘생명의 나무’는 건드리지 마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르려야 할 것들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재물과 장수를 청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재물과 장수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들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7-12: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기도를 잘 아는 민족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듣는 귀가 말하는 입 가까이 붙어있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까이 계셔 들어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요구를 내놓을 줄 아는 이를 더 사랑하신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절)라고 가르쳐 주신다. 문은 청하고 구함으로써 두드리는 이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완수하는 힘을 청하는 것이며, 찾는다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은 복됨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열렬한 마음으로 청하여야 한다. ‘찾아라.’라는 의미가 이런 뜻이다. 무엇을 찾는 사람은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두드려라.’라는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곧 열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남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께 항구하게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즉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9-11절) 하신다. 우리가 악하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골라 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속이지 않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요약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덕은, 즉 선행은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너의 동료가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할 때, 이중적으로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세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참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이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황금률>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여기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말씀은, “황금률은 신앙생활의 기본 정신이다.”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의 기본 정신이기 때문에, 황금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모두 적용되고, 신심 행위에도 적용되는, ‘신앙인들의 삶의 대원칙’입니다.
‘남’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이웃을 모두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황금률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네가 먼저’입니다. <“바라는 그대로”라는 말은, “네가 바라는 그것을, 네가 먼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네가 먼저’라는 말은, 순서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능동적인 실천’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1요한 4,10)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응답’인데, ‘능동적인 응답’이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이웃 사랑’에도 적용됩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내가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수많은 이웃의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는 것이 곧 ‘이웃 사랑 실천’입니다. 따라서 황금률은, 표현으로는 “받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이지만, 뜻으로는 “네가 받았으니(받고 있으니) 너도 주어라.”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 실천’에서도 ‘능동적인 실천’이 강조됩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7-11)
이 말씀을 황금률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황금률을 실천하셨고, 당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들을 그대로 먼저, 또는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아버지께서 이미 주셨으니, 청해서 받아라.”가 됩니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도 “아버지께서 이미 주셨으니, 찾아서 얻어라.”입니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는 “아버지께서 이미 문을 열어 놓으셨으니, 그 문을 열고 들어가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여신 것은 자물쇠이고, 우리는 잠금장치가 해제되어 있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8절의 ‘누구든지’라는 말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은총을 주신다. 그러니 ‘누구든지’ 믿고,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된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문이 어느 문인지, 우리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청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그것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내가 지금 열리기를 바라면서 두드리고 있는 이 문이, ‘하느님께서 이미 열어 놓으신’ 그 문일까, 아닐까? 모른다는 것이 바로 ‘기도의 어려움’이고, ‘신앙생활의 어려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또 기도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일단 나의 소원을 모두 하느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동안에’ 힘과 용기를 얻게 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게 됩니다. (‘기도하고 나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동안’입니다.)
그 힘과 용기와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큰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화, 즉 우리 생각을 초월하는 ‘큰 평화’, 또 우리의 간절함과 애타는 마음을 모두 진정시켜 주는 ‘참 평화’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도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살면서, 그 가르침에 합당한 기도를 바친다는 뜻입니다. 기도한 다음에는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하고, 어떤 결과가 생기든지 간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믿음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십니다. ‘일의 결과’가 내가 바라던 것과 다를 수도 있고,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세 구절로 표현되는 예수님 말씀은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권고입니다. 청하기는 기도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찾는 것과 문을 두드리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특히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유다교 라삐의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비유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기도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빵과 생선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 사는 이들에게는 기본 음식입니다. 그리고 돌과 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유혹에서도 언급되듯이, 빵과 생선에 견주어 보면 먹을 수 없는 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비교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고 유익한 것을 많이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믿음은 기도의 바탕입니다.
마지막 말씀은 마태오 복음에서 전하는 윤리적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는 이 가르침으로 정리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라는 가장 큰 계명의 구체적인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을 먼저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
[부산교구 최현욱 베네딕토 신부님]
세탁소를 하는 사람과 농부가 기도하는 것 때문에 하느님께서 참 머리가 아픕니다. 세탁소를 하는 사람은 제발 비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고, 농부는 비가 오지 않으면 농작물이 말라죽기 때문에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할 수 없이 하느님께서는 세탁소를 하는 사람과 농부에게 잘 합의해서 언제 비를 내려주면 좋을지 의논해 보라고 했습니다.
주일은 함께 교회에 가야 하니까 비가 오면 너무 불편하고, 월요일은 얘들이 학교에 가야하고, 화요일은 농부도 빨래를 해야 하고, 수요일은 뭐 때문에 비가 오면 안 되고, 목요일, 금요일……. 등등. 아무리 논의를 해봐도 비 오는 날을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이렇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 문제는 하느님께 맡기기로 합시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비를 내려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운동 경기를 앞두고 양 팀 선수들이 서로 자기 팀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실력이나 노력은 둘째 치고 무조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과연 어느 팀의 기도를 들어줘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느 팀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입시철이 되면 너도나도 개신교회에서, 절에서, 성당에서 자기 자녀가 시험을 잘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점수가 많이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이런 기도를 들으실 때 과연 어떻게 하실까요?
우리들도 참 많은 기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게 해 달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게 해 달라고, 내 남편이 다른 사람을 제치고 진급하게 해 달라고, 내 자녀가 다른 얘들보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이러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자기 기도를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기를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사람 기도를 들어주면 저 사람은 피해를 보아야 하고, 저 사람 기도를 들어주면 이 사람이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저보고 이러한 하느님을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만일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면 아마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거나, 다 빠져서 대머리가 될 것 같습니다. 정말 골치가 아플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바치는 청원기도 중에 많은 것들이 이렇게 하느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기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청하여라, 주실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 청원 기도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만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면서까지 내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라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노력은 없으면서 좋은 결과만을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순절이 시작된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걸어가는 이 사순시기에 하느님을 난처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기도보다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전해주는 기도를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바빌론 유배 시절 수사 성읍에 사는 유대인들을 몰살하려는 재상 하만의 음모와 크세르크스 입금의 명령 앞에 에스테르 왕비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에스테르(ʾEstēr)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 크세르크세스(기원전 486년-기원전 465년) 왕후입니다.
와스티 왕비폐위가 되고 대신 유다인 모르도카이의 조카이며 양녀인 에스테르가 왕비로 뽑힙니다.(에스텔서 2장 17절) 왕의 측근 하만은 전권을 가지고 왕비를 포함하여 모르도카이와 유다인들을 죽일 계획을 진행하고 이런 극적인 위기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성경은 유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죽게 될 위기에서 에스텔의 이야기와 특히 그녀의 기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연약한 이의 청을 거절하시지 않으시고 들어주신다는 굳은 믿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그리고 모르드카이 기도(에스텔서 4장 17절[1절-11절])와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에스텔서 4장 17절. 12절-30절)에서 드러납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위태로운 위기 앞에서 에스텔 왕비는 하느님만이 구해시리라는희망과 의지가 기도에서 나타납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 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에스텔서 4장 17절. [14절.15절.25절])의 기도는 오늘 화답송의 노래로 이어집니다. 마침내 에스텔의 기치로 <하만>의 음모가 드러나고 <하만>은 처형되고 아달월 13일에 유대인 학살 명령은 취소됩니다. 남에게 청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때로는 염치도 없다는 소리부터 ‘낯 두껍고 뻔뻔하다.’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합니다.
남편이 천직으로 알던 사업이 기울어져 그 부인이 쳐진 남편의 어깨를 보다 친정으로 시댁으로 손을 벌리러 다녔습니다. 평소에 다정하던 친정아버지도 ‘야 너도 우리 사정 다 알면서도 염치없는 소리를 다하는구나!’ 하는 매정한 소리로 딱 끊으며 뒤로 돌아서는 것이지요. 그 자매는 찬바람 이는 친정을 뒤로하고 돌아설 때는 눈물을 바가지로 흘려야 했습니다.
글쎄요? 한 서너 번이면 사람들은 대게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그녀는 평소 가깝다는 친지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모두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동네 성당에 들어가 돈도 없으신 예수님 성체 앞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세상은 야속하더니 남편의 사업은 문을 닫을 정도가 되고 그렇게 믿었던 직원들은 하나둘 떠나는 것입니다. 남편의 모습은 옛 모습은 어디로 가고 초췌한 모습에 이제는 아이들과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관계하던 한 업체에서 쥐꼬리만한 상환금을 돌려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회사를 전처럼은 아니더라도 정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경험으로 알지만 주님의 응답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고, 또 너무 슬며시 해주셔 생각하지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나중에는 여러 일에 묻혀서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때로는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잊혀질 때쯤에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눈치채지 않게 응답하시고 우리는 곧잘 잊어버립니다. 급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열심히 청하지요. 그리고 그 후는 우리도 모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비정한 세상과는 다르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오 복음 7장 7절-8절)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청하고 또 청하라고 하시면서 아무리 부모가 악해도 자녀가 청할 때에는 좋은 것을 주려는 부모의 마음을 빗대어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오 복음 17장 11절)
그리고 주님께서 하느님께 믿음을 갖고 청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이서 우리가 야속한 세상에 살지만 신앙인은 ‘베풀어야 하는 삶’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오 복음 7장 12절 2) 이 말씀을 ‘황금율(黃金律 Golden Rule)’이라고 일컫습니다.3) 현대인들의 특징 중에 ‘많은 정보의 지식은 있는데, 그것을 곧 잊어버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정보가 하루에도 넘쳐 흐르고 습관이 되어 버린 스마트폰에 그 정보를 실어 나르고 또 보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망각의 세계에 산다.’하는데 그것은 아무 노력 없이 많은 것을 펼쳐보기 때문이지요.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가 청원의 간절한 기도, 이웃에게 베푸는 배려와 헤아림의 마음은 잊고 또 무뎌지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돌아보며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1) 주님께서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더 세부적인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아이테이테 Αἰτεῖτε)’,‘찾아라(제테이테 ζητεῖτε), ’문을 두드려라(크루에테 κρούετε)’ 마태오는 하느님께서 청하고 찾고 두드린 것에 대한 응답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청한 것에 대해 그 결과로 ‘주어질 것(도테세타이 δοθήσεται)’것이고 찾은 것에 대해 결과로 ‘찾을 것(에후레스테 εὑρήσετε).’이입니다. 그리고 두드린 것에 관한 결과로 ‘문이 열리게될 것( 아노게세타이 ἀνοιγήσεται)’이라는 말씀이십니다. 마태오는 청하는 것들과 확실한 응답이 있으실 것이라는 세 가지 것들을 나누어 전하고 있습니다.
2) ‘너희도 그렇게 하라(휘메이스 포이에데 ὑμεῖς ποιεῖτε)’ 이것이 “율법(호 노모스 ὁ νόμος)‘와 ‘예언서 (호이프로페타이 οἱ προφῆτα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는 ‘정신’이라는 말은 없고 ‘이것이 율법서와 예언서들이다.’(마태오 복음 7장 12절)’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3)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토빗트기 4장 15절), 동양사상에서,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기소불욕 물시어언(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가르침, 대학(大學)에‘자로 자기를 재듯,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을 살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린다.‘라는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고대 근동, 유대교 전승, 동양 사상 등에서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내 중심,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하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제주교구 허찬란 임마누엘 신부님]
<서로의 처지가 되는 날>
교구 신부님 가운데 미카엘 신부님이라는 분은 항상 제게 모범적인 사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신부님이 젊은 사제였을 때, 한번은 각 종교간 대화와 만남을 위한 행사 준비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으셨답니다. 신부님은 당시 외국인 교구장님을 모시고 함께 가셨는데, 모임이 한창 진행될 무렵, 당신의 생각을 피력해야겠다 싶은 순간이 있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더군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한 분 한 분을 보면서, 솔직히 제가 보기에 스님은 스님으로만 보이고, 목사님은 목사님으로만 보이는데 혹시 제가 스님이나 목사님들 눈에 신부가 아닌 여러분과 같은 신분으로 보이는 분이 계십니까?
모임도 좋고 만남도 좋지만 서로 처지가 되어준다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종교인들이 서로 입장을 바꾸고 서로의 처지가 되어서 서로를 존경하는 날이 올 때 즈음해서야 이 모임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줄로 믿는데,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상대방의 입장이 되고 서로의 처지가 되어줘야 한다는 이 말씀을 깊이 공감하며 오늘 복음을 묵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좋은 것을>
2023. 03. 02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마태오 7,7-12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오직 좋은 것을>
좋은 것을
주시는 분께서
주고자하시는
좋은 것을
쉼 없이
찾는 겁니다
나에게 좋듯
남에게도 좋아
참으로
좋은 것을
정성을 다해
청하는 겁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러나 받고 얻고 열리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지 안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리게 될 것입니다. 응답받지 않는 기도는 없으니만큼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구한대로 응답받지 못한 것이 더 큰 은총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우리의 청이 헛된 수고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혹 받지 못했다고 생각이 들 때는 나의 욕심으로 청하고 있지 않은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면 넘치도록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좋은 것을 주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시기 바랍니다.
한두 번 청하고 두드리다가 그만두지 말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끈질긴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각각 차 사고를 연출한 장면을 보여주기 전에, “차가 부딪쳤다.”라고 설명해주고 보여준 그룹과 “차가 박살 났다.”라고 설명하고 보여준 그룹의 기억 차이를 비교한 것입니다.
그 결과 ‘차가 박살 났다.’라는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그 장면에서 ‘차의 유리 파편이 튄 모습이 있었다.’라고 기억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보여준 사고 장면에는 그런 모습이 없었습니다. ‘박살 났다.’라는 강한 표현의 단어를 들은 것만으로도 사고가 크게 났다는 느낌이 마음에 남았고, 그로 인해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을 돌이킬 때 유리 파편이 날리는 모습까지 같이 떠올린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은 거짓 기억 또는 잘못된 기억이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기억만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억이란 결코 바뀔 수 없는 명확한 기록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때로는 거짓 기억, 잘못된 기억에 의해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경우도 너무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어쩌면 우리의 거짓 기억, 잘못된 기억에 따른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는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가득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멈추지 말고 바라는 것을 청하고, 포기하지 말고 얻을 것을 찾을 것이며, 망설이지 말고 하느님을 향한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따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고 하십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곡된 사랑이 아닌 진실한 사랑을, 나의 욕심을 채우는 사랑이 아닌 이웃의 만족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을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기억과 거짓 기억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남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줄 수 있습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주님께서는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이요, 나아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네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라고 하십니다.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께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듯이 우리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곧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들으며,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
오늘 독서는 에스델기로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에스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에스델이 제게는 참으로 존경스럽고 감탄하게 하고 나도 같은 상황이 되면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케 합니다.
오늘 독서의 시작을 보면 에스델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얘기하고, 그러나 이어서 주님께 피신처를 찾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랑의 경우, 다시 말해서 신앙이 없는 사람의 경우, 공포에 사로잡히면 공포 이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당장 내 앞에 있는 두려운 것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기에 하느님도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때 하느님은 아무것도 아닌 분이 되시는 겁니다.
거듭 얘기합니다. 두려움 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면 하느님도 아무것도 아닌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두려움에 싸였을 때 두려움 외에 아무것도 내게 보이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그때 내게 아무것도 아닌 분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지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공포에 휩싸일 때도 그리고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도 에스델처럼 하느님께로 눈을 돌려 청할 수 있을 때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델처럼 하느님 외에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고 믿고 청할 때 오늘 주님 말씀처럼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믿음, 그리고 삶>
-기도의 훈련과 습관화-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히 세우시니,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시편138,3)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공감이 갑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내외적 일치에 부패와 분열이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 요소인지 깨닫습니다. 부패도 문제이고 분열도 문제입니다. 부패와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기도는 필수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늘 새롭게 하나되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좌우명 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셋째 연도 이를 상징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맑게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듯 끊임없이 기도해야 맑고 깨끗한 삶입니다. 이래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기도의 훈련과 습관화가 중요하며, 이는 우리 수도자들이 절절히 깨닫는 진리입니다.
지난 사순 제1주일 강론 주제는 악마의 유혹이었습니다. 유혹자가 악마였습니다. 교황님의 강론에서 또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악마(Devil)는 분열자(divider)를 뜻한다 합니다. 악마는 언제나 분열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 악마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광야에서 악마는 끊임없이 하느님과 분리시키도록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참으로 내외적으로 끊임없이 분열을 획책하는 악마의 유혹인 것입니다. 이래서 주님과의 일치를 위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에 말씀 공부와 실천, 회개가 필수입니다.
어제의 강론 주제는 ‘회개’였고, 오늘은 또 ‘기도’입니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회개와 끊임없는 기도가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참으로 영적탄력좋은 삶을 위해 한결같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오늘 복음은 깨우쳐 줍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항구한 기도와 믿음, 삶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고 집요하게 노력하는 백절불굴의 자세, 칠전팔기의 자세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탄력좋은 기도와 믿음, 삶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다보면 마침내 내외적으로 정화되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식으로 응답되어, 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청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좋으신 하느님은 참으로 기도하는 우리를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좌우간 한결같이, 좌절함이 없이, 간절하고 항구하게 기도하다 보면 정화되고 성화되어 하느님과 일치에 이를 것이고 꼭 필요한 것을 청하게 되고 또 응답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은 황금처럼 귀하다 하여 그 유명한 황금률이요 어느 문화권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황금률은 사랑의 이중 계명과 함께 가장 포괄적인 계율로, 이 두가지 지상 계율에 따라 세부 지침들을 풀이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바로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잘 훈련되고 습관화되어 하느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황금률을 잘 이해하고 지킬 것입니다.
바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에스테르입니다. 하만에 의해 절멸 위기에 처한 유다인들이 왕비인 에스테르의 간절한 항구한 기도에 의해 유다인들이 구원받는 내용입니다. 오늘 에스테르의 기도 앞에는 그의 삼촌이자 양부인 모드도카이의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구구절절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참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기도뿐 아니라 삶도 이처럼 간절하고 절박해야 합니다. 평소 기도가 잘 훈련되고 습관화 되어 있기에 이런 간절하고 절박한 삶에 기도와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닐 수 있어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합니다. 하느님은 어쨌든 우리 방식이 아닌 당신 방식대로 우리를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인도해 주셨고, 인도해 주시고 있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다시 산다 해도 이렇게 살 수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그러니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와 믿음과 삶이, 기도의 훈련과 습관화가 필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시편 51,12.14)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오늘 복음(마태7,7-12)은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라는 말씀과 '황금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인 에스테르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음의 물음들을 먼저 던져보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무엇을' 청하고 찾고 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해, 곧 청하고 찾는 것을 주시는 분께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가? '어떤 열정'을 드러내고 있는가?"
"어린아이처럼 울고불고하며 떼를 쓰면서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만을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하느님의 것,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인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그리고 복음 후반부에 나오는 '황금률'(황금과도 같은 율법), 곧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7,12)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는 산 위에서 군중을 두고 하셨다는 말씀인 '산상설교(마태5-7장)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산상설교의 결론'이자 '황금률의 뿌리'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레위19,18)는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 세상 떠날 때 함께 할 수 없는 것들,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그것을 얻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지만 말고, 이 세상 떠날 때 함께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사랑의 업적'을 쌓는 일에도 '관심과 열정'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UnC8YcJONpM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 11)
하느님 없이는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뜨거운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이시간입니다.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기도는 생활의
실천이며 생명의
풍요로운
깊이입니다.
기도 안에서
생명의
길을 찾습니다.
넘치게 주시는
선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의 길이
기도의 길이
됩니다.
살아계신 그분을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신앙인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로
이 어려움을
잘 뚫고
나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시작도 마침도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