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赫居世의 가계도 |
|
|
| |||||
|
|
|
|
|
| ||||||
|
|
|
|
|
|
|
|
|
| ||
|
天神(父) |
|
|
日光(本人)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仙桃(母) |
|
|
月光(妻) |
|
|
月知(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閼英(妻) |
|
|
次雄(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大盧(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阿盧(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奉母(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虹梯(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高■(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月梯(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山梯(女) |
| |
|
|
|
|
|
|
|
|
|
( ? ~131.8) |
| |
|
|
|
|
|
|
|
|
|
|
|
|
|
|
|
|
|
|
|
|
|
阿婁(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검정색은 남자를, 청색은 여자로, 적색은 분명하지 경우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
|
|
閼英의 가계도 |
|
|
| |||||
|
|
|
|
|
| ||||||
|
|
|
|
|
|
|
|
|
| ||
|
黃貴(父) |
|
|
閼英(本人)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卯龍(母) |
|
|
日光(夫) |
|
|
次雄(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大盧(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阿盧(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奉母(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虹梯(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高■(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月梯(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山梯(女) |
| |
|
|
|
|
|
|
|
|
|
( ? ~131.8) |
| |
|
|
|
|
|
|
|
|
|
|
|
|
|
|
|
|
|
|
|
|
|
阿婁(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神(夫) |
|
|
韓那(女) |
| ||
|
|
|
|
|
( ? ~ ? ) |
|
|
( ? ~132.11) |
| ||
|
|
|
|
|
|
|
|
|
|
|
|
※ 검정색은 남자를, 청색은 여자로, 적색은 분명하지 경우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
|
|
仙桃(婆蘇)의 가계도 |
|
|
| |||||
|
|
|
|
|
| ||||||
|
|
|
|
|
|
|
|
|
| ||
|
|
|
|
仙桃(本人)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天神(夫) |
|
|
日光(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雷神(夫) |
|
|
月光(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蘇伐(夫) |
|
|
狄公(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謁平(夫) |
|
|
楊公(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仇禮馬(夫) |
|
|
宿公(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日神(夫) |
|
|
萬公(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福公(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祗沱(夫) |
|
|
火堂(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天神의 가계도 |
|
|
| |||||
|
|
|
|
|
| ||||||
|
|
|
|
|
|
|
|
|
| ||
|
|
|
|
天神(本人)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仙桃(妻) |
|
|
日光(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月光(妻) |
|
|
月刀(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月姑(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月知(妻) |
|
|
雲帝(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검정색은 남자를, 청색은 여자로, 적색은 분명하지 경우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
|
|
月光의 가계도 |
|
|
| |||||
|
|
|
|
|
| ||||||
|
|
|
|
|
|
|
|
|
| ||
|
雷神(父) |
|
|
月光(本人)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仙桃(母) |
|
|
日光(夫) |
|
|
月知(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天神(夫) |
|
|
月刀(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月姑(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狄公(夫) |
|
|
月堂(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楊公(夫) |
|
|
月長(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宿公(夫) |
|
|
長刀(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黃龍(夫) |
|
|
星帝(女)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星乙(성별 불명)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星言(성별 불명)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검정색은 남자를, 청색은 여자로, 적색은 분명하지 경우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기년 추정
이병도(1896~1989) 선생은 생전에 고구려는 태조왕 이전을, 백제는 고이왕 이전을, 신라는 내물왕 이전을 믿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본인이 남당유고를 연구한바 이병도 선생의 말이 맞았다. 너무나 정확하여 이병도 선생이 생전에 남당유고를 읽어보지 않았나를 의심하게 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병도 선생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남당유고 백제왕기와 고구려사초(략)의 자료로 고구려왕과 백제왕의 기년이 다른 부분을 보충하겠다.
지금 남당 유고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 ~ 탈해이사금까지의 기년을 살펴볼 수 없으므로 인하여 신라의 出自를 밝힐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어 부득이하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古記의 다른 기록으로 보충하였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과 김부식이 잘못이라고 부정한 古記의 기록을 청개구리 심보로 인정함으로써 본인의 고집과 착각이 심하다고 말하는 이가 많을 수도 있으나, 현재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다.
① 신라 건국의 해(A.D.25)
≪삼국유사 新羅始祖 赫居世王 기사 발췌≫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 建虎元年 又云 建元三年 等皆誤〉 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B.C.69) 〈古本에는 建虎 元年(建武 元年, A.D.25년)이고, 建元(나라를 세운 임금이 연호를 칭함, 후한의 건원은 A.D.23년) 3년이라고도 했다. 이것들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6부(六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② 임인년(A.D.42) 기사 모음
㉮ 고구려가 신라를 침범하다.
≪삼국유사 弩禮王 기사 발췌≫
建虎十八年 伐伊西國 滅之 是年高麗兵來侵
건호(建虎) 18년(A.D.42)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 탈해의 입국
≪삼국유사 脫解王 기사 발췌≫
脫解齒叱今〈一作吐解尼師今〉 南解王時(古本云 壬寅年至者謬矣 近則後於弩禮卽位之初 無爭讓之事 前則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이사금이라고도 한다〉은 남해왕(南解王) 때〈古本에 임인(壬寅, A.D.42)년에 이르렀다는 것은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노례왕(弩禮王)의 즉위 초보다 뒤의 일이니 제위를 양보하는 일을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먼저의 일이라면 혁거세왕(赫居世王) 때의 일이다. 그런 연유로 임인(壬寅)년이 아님을 알겠다.〉
㉰ 가락국의 건국
≪삼국유사 駕洛國記 기사 발췌≫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浴之日 所居北龜旨 〈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A.D.42) 3월 계욕일(禊浴, 부정을 씻는 목욕재계의 행사)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③ 탈해의 재입국(혁거세왕 39년)과 탈해의 원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머리기사 발췌≫
脫解尼師今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 其國王 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裹卵幷寶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 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在位三十九年也
탈해 이사금〈토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이며,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 리 밖에 있다. 본래 그 나라 왕은 여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상자는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그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다. 이 때가 곧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견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혁거세왕 39년은 B.C.19년이고, 탈해이사금 원년은 A.D.57년이다. 혁거세왕 원년에 탈해는 76세가 되므로 잘못이다. 또한, 혁거세왕의 원년과 탈해이사금의 원년 둘 중 하나만 알면 나머지는 찾을 수 있다.
신라의 3姓(朴,昔,金) 시조격인 혁거세(赫居世), 탈해(脫解), 알지(閼智), 금관국의 시조인 수로(首露)는 난생(卵生)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혹은 태어나자마자 성인(成人)으로 자랐다는 믿지 못할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고기(古記)에서 출자(出自)를 밝힐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유사에 의하면 탈해(脫解)와 금관국의 시조 수로(首露)왕은 임인(A.D.42)년에 태어나서 수로왕이 A.D.44년 2월 궁궐을 완성한 이후에 탈해가 등장하여 두 성인(聖人)이 나라를 두고 다투었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7년 후인 A.D.51년이 탈해의 재입국해인 혁거세왕 39년이 된다.
즉, 혁거세왕의 원년은 A.D.13년이 되고, 혁거세왕의 원년에 나이가 13세이니 혁거세왕의 출생년은 A.D.1년이 된다. 탈해이사금의 원년은 62세가 되는 해인 A.D.112년으로 추정한다.
남해차차웅과 유리이사금의 재위기간의 합이 14년 차이가 있으나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 없다.
혁거세(赫居世)의 出自 추정
혁거세왕의 出自에 대하여 古記가 함구하고 있는데, 혁거세왕에게도 분명히 아버지는 있었을 것인데 밝힐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①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발췌
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사로(斯盧, 신라)의 시조왕(始王)은 선도산(仙桃山)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夫餘帝室)의 딸 파소(婆蘇)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았다.
≪견해≫ 1. 대한제국의 말기 대종교의 2대 교주인 김교헌(金敎獻)의 신단실기(神壇實記)에는 “부여제실의 여자 동신성모(東神聖母)인 파소(婆蘇)가 남자와 혼인하지 않은 채 잉태하여(중략)"라고 하였다.
2. 동국여지승람,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이적에도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경우 파소성모의 잉태지역이 부여가 아닌 중화(中華) 또는 한실(漢室)로 적어 놓은 것이다.
② 북사열전 신라기사 발췌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그 나라왕은 본래 백제사람으로 바다로부터 도망하여 신라로 들어가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③ 남당유고 본기신편열전 도절태자기사
都切太子母阿爾后 召西奴生優台女也 類利太子娶之 生都切及女五人 而十三年崩 十四年 扶餘請都切爲質 王以其無母不肯之 群臣力請遣之 中途得疾不發 扶余怒 發兵來侵而掠 都切去帶素 以其女妻之 生一子 于扶余 而歸 辛酉正月薨
도절(都切)태자의 모(母)는 아이(阿爾)후인데, (아이후는) 소서노(召西奴)가 낳은 우태(優台)의 딸이다. 유리(類利)태자가 장가들어 도절과 딸 다섯을 낳았으며, (유리왕) 13년(B.C.7)에 죽었다. (유리왕) 14년(B.C.6) (동)부여가 도절을 볼모로 주기를 청하였다. (유리)왕이 어머니가 없음을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군신들이 힘써 청하여 보냈다. 가는 도중에 병을 얻어 출발하지 못했다. (동)부여가 화를 내며 병사를 보내어 침략하고 약탈했다. 도절이 대소(帶素)에게 가서 대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동)부여에서 아들 한명을 낳고 돌아왔다. 신유(辛酉, A.D.1)년 1월 (도절태자가) 죽었다.
≪견해≫ 1. 환단고기에 말하기를 부여공주 파소(婆蘇)는 아버지 없는 아들을 낳았다고 하나, 古代에 아버지 없는 자식이 흠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정치적 망명을 택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2. 도절이 유리왕의 아들임으로 인하여 도절을 고구려계라고도 한다. 도절은 고구려에서 용납되지 않았으며, 도절이 동부여에 볼모로 갈 때와 돌아왔을 때 외할머니 소서노와 외삼촌 비류가 죽었다. 백제왕기와 고구려사초(략)의 해석을 통해 보충하겠다.
3. 남당유고 추모경에 금척(金尺)의 기사가 나타난다. 혁거세왕릉과 관련하여 금척에 관한 설화가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에 금척리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추모경에 관하여는 김성겸선생의 해석본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4. 만약 혁거세왕이 유리왕의 장손(長孫)이라면 밝히지 않을 근거라도 있는 것이냐? 백제왕기에 의하면 추모는 유리와 아이후의 소생으로 후사를 이어나가기를 바랐으며, 이는 고구려와 백제계의 통합을 위한 추모의 유언이었다. 그 유언을 받은 후왕은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만약 도절이 살아남아 신라를 건국했다면 이는 고구려 추모왕의 적통이 바뀌는 일이므로 대무신왕이 나라를 다스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신라를 침략하였으리라 보인다.
우리가 삼국사기를 통해 혁거세왕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기사를 살펴볼 수 없는 것은 대개가 고구려가 낙랑을 통한 대리전이었고, 삼국유사가 전하는 건호(建虎) 18년(A.D.42)의 기사는 누락시켰기 때문이다.
신라가 자신들이 도절의 후손임을 이야기하였다면, 고구려는 도절이 신유(辛酉, A.D.1)년에 사망하였음을 말할 것이고, 도절이 유리왕의 아들임을 인지(認知)해 줄 外家쪽의 인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도절이 동부여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머니 아이(阿爾), 외할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이미 사망하였고, 외삼촌 비류(沸流)도 연루되어 사망하였다. 온조(溫祚)가 비록 있었더라도 자신을 지켜줄 세력이 없었다고 여겨진다.
도절은 비록 나라를 세웠음에도 나라를 경영할 뜻이 없었으며, 어린 아들 혁거세에게 선위(禪位)를 한 듯하다. 신라의 건국의 해인 A.D.25년은 유리왕이 죽고 외삼촌인 온조가 재위하던 시기로 고구려(백제계)가 신라의 분립(分立)을 공식적으로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이하 글쓰기를 통해 보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