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상본문: 요11:1-44
- 제목 : 무덤이 있어야 부활생명이 있다
◆ 본문묵상
*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3km 정도) 베다니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여기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세 남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도 살고 있었다. 오빠인 나사로가 병에 심하게 들자 누이들은 예수님께 와주시길 간청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11:3) 그런데 예수님은 베다니 행을 일부러 지체시킨다(11:6). 예수는 그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한 사건」이라고 말씀한다.
역설적으로, 나사로는 그래서 죽음을 맛보도록 방치된 상태가 된다. 마치 욥의 모든 환란 가운데 잠시 침묵하신 것처럼, 나사로가 죽어 4일째 되기까지 예수의 발길은 지체되었다.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의 권세가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며, 예 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백히 증명한 사건이다(11:23-27).
* 나사로가 죽어가는 그 시간을 예수께선 다 알고 계셨다(11:11). 그러니 실상 나사로가 방치된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기 위해, 잠시 그에게 향한 예수의 도움이 유예되었다. 욥도 그렇고, 나사로도 그렇고... 둘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었다(욥1:8). 그들에게 임한 고통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영광을 취하시는 사건을 일으켜, 하나님을 알아차리고 믿게하는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만유의 주인이므로, 그분께는 이 만유에 속한 무한한 권리가 있으시다. 그분은 죽일 권세도 살릴 권세도 있고 그 뜻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과 예측보다 깊고 넓어 예단할 수 없다.
*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은지 4일만에 오시자 마르다가 마중한다. 그녀는 만일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빠가 안 죽었을거라 말한다(11:21). 그러나 만일 예수께서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구하신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주실 것을 안다 말한다. 이에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다" 대답한다. 마르다는 마지막날 부활의 때를 말하는 줄로 알고 "저도 그때는 오빠가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말한다.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하신다. 마르다는 긍정하며 고백하기를, 예수를 메시야이며 세상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대답한다(17:27).
* 마르다에 이어 마리아도 예수를 만난다(11:28-30). 마리아와 함께 조문객들도 따라나서서, 이제 그곳엔 마르다와 마리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게 됐다. 마리아도 마르다와 같은 말을 하며 운다(11:21, 32). 예수께선 이 무리들이 우는 모습을 보며 비통히 여기시며 마음이 격동하셨다('불쌍히 여기다' 보다 원의의 뜻).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다. 이때 흘리신 눈물을 신으로서 인가, 인간으로서 인가? 슬픔이라면 어떤 종류의 슬픔인가? 본문의 무리들은 예수의 눈물을 보고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 했으면 이리 우느냐' 추측하기도 하고, '맹인의 눈도 뜨게 했으면서 이 사람 병도 진작 좀 고쳐주지'라고 탓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께선 이미 나사로의 병세를 알고 계셨을 뿐 아니라 그가 죽도록 기다리셨다(11:4, 11,14-15).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들 포함)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게 하시려는 계획이다(11:15). 그러니 예수님의 통분한 눈물은 나사로를 향한 조문의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못하는 자기 백성을 향한 안타까운 눈물로 보는게 맞을 것 같다.
* 예수님은 무덤의 돌문을 치우라 명한다. 마르다는 죽은지가 4일이어서 이미 사체의 악취가 나기 시작한다 말한다(11:34). 메시야의 말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며 예수는 돌문을 치우게 한다. 그리고 소리를 내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소리내어 기도하는 이유는)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1-42) 기도하신 후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니 그가 수의를 감싼 모습 그대로 걸어나왔다. 다시, 살아났다.
◆ 나의 묵상
스스로 신앙이 무너져 감을 느껴 절박한 심정으로 세웠던 공동체마저 소리없이 사라졌을 때, 더이상 시도할 것이 없어 절망감이 나를 감싸던 그때, 소리치고 악을 쓰고 패악을 저질러도 나를 돌아봐 주지 않는 부모의 등을 보며 절망에 빠지는 아이처럼 내 마음은 결국 무너져 내렸다.
시도할 수 있는 게 없었으며 구조의 손길은 보이지 않았다. 백약이 무효하듯 어떤 설교도 어떤 위로도, 어떤 격려도 나를 되살리지 못했다. 안 맞는 처방으로 나를 살려보려던 그들은 결국 나름의 상처들만 안은 채, 떠나가는 환자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나사로의 묵상을 하며 갇힌 동굴문 같은 내 상황을 받아들였다. 나의 죽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예수의 부활과 관계없는, 부패로 향하는 죽음이었다. 나의 삶은 부패로 치달았다. 세상의 욕망과 인정, 소유, 향락, 죄들이 주는 즐거움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 사람들은 내 속도 모르고 좋아하더라. 어쩌면 이제사 '정신을 차렸구나'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 영적 무덤 같은 내 삶이 가져다 준 유익도 있었다. 타락한 교회의 현재를 바로 보게 됐고, 이상향에 대한 미련을 버렸으며, 사람에 대한 기대감도 접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일 뿐이어서, 상처를 줄 수도 오해를 할 수도 혹은 나를 이용할 수도 있는 존재이며 나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깊이 체득했다. 미움이 사라졌고 감사의 마음이 생겼다. 기대를 버리니 받은 것과 누리는 것들이 소중해졌다. 더 가지려고 욕심 부리지 않게 되고, 다만 성실하고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 속, 무덤 속이었다. 그리고 내 삶에 찾아든 죽음의 동굴에서 왜 하나님의 동아줄은 나타나지 않고 있나 의문이었다. 오늘 마르다의 마음이 내 지난날 결론처럼 들린다. "..마지막 날에는 알게 되겠죠." 쓸쓸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이라 한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사건이라 한다. 내게 임한 고통의 시간도 그런 걸까?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나의 하나님에겐 그런 권리가 있으시다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피조물이므로,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라 내 인생에 행하시며, 그 계획이 설령 나의 고통이 될지라도 그것이 선하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느냐" 물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길과 뜻은 내가 헤아리거나 deal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감사한다. 무덤 같은 시간을 주신 것도 감사하다. 패악질 속에서도 기다려 주신것도 감사하다. 환상을 깨뜨리시고 현실을 보게 하신 것도 감사하다. 그 현실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일깨우신 것도 감사하다. 내 상태, 내 꼬라지를 바로 알게 되어 비통대신 겸허의 마음을 다소나마 갖게 된 것도 감사하다. 나의 죽음의 시간도, 하나님 안에선 감사가 된다.
여전한 죽음의 시간, 말씀과 연합하여 보내려 한다. 오히려 살아나는 시간이 된다. 죽었으나 실상 살아있는 자되어 예수의 영에게 인도함 받는 오늘... 무덤에서 누리는 영생의 신비가 어쩌다 내 것이 되었나?!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을 이 영광 누리기 위해 나는 무덤에 들어가게 되었던가?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나는 퇴보하지 않고 전진하였다. 멸망 중인줄 알았으나 오히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예수를 믿는자는 참으로 죽어도 살며 영원히 죽지 않는구나.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던 제자의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이 된다. 나는 하나님의 계획도, 계획의 목적과 이유도, 종류도 다 알지 못한다. 피조물의 한계다. 그러나 "그것들을 내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본다는 사실" 하나다(요1:25).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로 알아볼 수 있는 오늘이 감사할 뿐이다. 무덤의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비로소 감사의 마음이 생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를 살리실 것이, 이제 조금 믿어진다.
◆ 기도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깊고 넓어 다 알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제게 주신 아픔들 속에서 저도 주님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제 존재의 그릇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그저 안개와 이슬같은 존재인지 체감하게 되었고, 나귀 턱뼈만 갖고도 1천명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던 솟은 마음도 꺾이게 되었습니다. 너무 쉽게 죄를 선택하고 반역의 길을 선택하는 저를 보면서 사람에 대한 분노가 연민으로, 공감으로 바뀌었습니다. 다같이 타락을 인정하자는 뜻이 아니라 다같은 몸부림의 인생과 신앙을 걷고 있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된 후, 다만 읽자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한 묵상의 시간... 주님이 주님으로 채워주고 계십니다. 이 신비를 다 정리하고 설명할수는 없으나, 주님.. 이 시간이, 그리고 주께서 생명이요 빛, 양식이며 주인, 유일한 문이며 목자이심을 알고 믿게 됩니다. 그저 주를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의 자기주장 의지는 계속 무덤에 머물게 하소서. 이미 주의 심판아래 죽었으니 계속 그리 있게 하소서. 주인되신 예수님. 선한 목자의 음성 따를 수 있는 눈과 귀를 계속 열어주시기만 바랍니다. ◎
첫댓글 할렐루야!
무덤에서 누리는 생명의 부요함이 눈부시다.
새 일 행하실 주님을 찬양하며,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삶을 고대하며 기도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