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1요한 4,19―5,4 루카 4,14-22ㄱ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핵심적 가치를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가리키는 메시아 시대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활짝 열렸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이 자리, 이 시간에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메시아가 어디 있는지, 은혜가 어디 있는지,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복음을 읽으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주어지는 이들을 되짚어 봅니다.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니다.
‘나는 가난한가? 나는 잡혀갔는가? 나는 눈이 멀었는가? 나는 억압받는가?’
우리가 외면한 이들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은총을 진하고 강하게 체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에 덩그러니 홀로 있게 되었을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 토닥여 준다면, 참 고맙겠지요.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한 은총은, 삶이 무너진 이들이 받아 누리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잘살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허전하고 외로워지지 않습니까?
외롭지 않다며 으스대는 가식의 옷을 벗어 던지고 서로의 손을 잡아 줄 줄 아는 따뜻함이
구원입니다. 루카 복음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갑니다.
그 길에는 가난한 이, 다리저는 이, 눈먼 이들이 늘 함께합니다.
우리는 위로 받고자 합니까, 위로 받기를 부끄러워합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참된 은총을 받고자 합니까, 누군가에게서 저만을 위한
거짓 은총을 얻고자 늘 어딘가를 헤매고 있습니까?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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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1요한 4,19―5,4 루카 4,14-22ㄱ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1요한 5,3)이고,
"그분의 계명은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1요한 4,21)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어렵거나
버겁지 않습니다.(1요한 5,3) 왜냐하면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5,4)
요한 사도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학 개론"을 전해줍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기승전'애'(起承轉愛)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사랑이고,
우리의 믿음도 사랑이며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참으로 맞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선되지 않았던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줄도,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가여운 존재로 남았을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나자렛 회당에서 독서를 하시고 강론을 시작하시는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는 침묵중에 그분의 음성이 울려 퍼집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사야가 전해 준 메시아의 소명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hic et nunc)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소명이 바로 예수님의 소명이고, 그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루카 4,18-19)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행업을 계속하는 것이 메시아의 소명이고
예수님의 소명이며,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소명입니다.
이 사랑의 소명은 언뜻 세상의 탐욕 앞에 패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승리자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아멘.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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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1요한 4,19―5,4 루카 4,14-22ㄱ
늦게 사랑해도 괜찮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늦게 사랑해도 괜찮다. 오늘 요한의 편지를 읽으면서 탁 떠오른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고 그래서 하느님을 늦게야 사랑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늦게라도 사랑치 않는 것이요 끝내 사랑치 않거나
사랑이 점점 쪼그라드는 것일 겁니다.
아오스딩 성인도 고백록에서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또 늦게 사랑하게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참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사랑을 참사랑인 줄 알고 방황했다면 먼저 그것을 아오스딩 성인처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그러므로 방황의 끝에 늦게라도 그 사랑을 발견하면 됩니다.
이에 대해 아오스딩 성인은 이렇게 계속 얘기합니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 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 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참사랑을 맛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 사랑을 이웃에게로 향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을 똑같이 사랑하되 우리가 갈망하고 만족하는 사랑은 다릅니다.
만족은 하느님 사랑으로만 하고, 이웃의 사랑에서는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사랑에서 만족을 구하려다 불만을 경험한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사랑에서
만족을 구하지 않게 된 사람도 있지만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인간의 사랑에서
더 이상을 만족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된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더 완전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느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는 말씀처럼
이웃 사랑이 힘들지 않기에 지치지 않고 사랑하고 완전한 사랑을 합니다.
그러니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으로 먼저 충만해지고
그런 다음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순서를 어기지 말아야겠습니다.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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