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토요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전 복생반 모임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옵시고
주일을 잘 준비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 탐심을 부린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보혈로 덮어 정결케 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실 때 나의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본문 주해)
11~12절 : 야고보는 ‘형제들아’ 부르며 비방과 판단을 하지 말라고 한다.
형제라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형제들, 즉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의 은혜를 동일하게 입은 자로서의 형제인 것이다. 그렇게 동일하게 은혜로 된 형제 사이에서 우월감을 가지고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에 대한 비방과 판단이 되는 것은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아홉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요, 더 나아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주신 이와 심판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 어떤 사람도 이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비방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을 헐뜯거나 멸시하는 행위는 말씀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행위로, 이는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는 것과 같다.
13~17절 : 인간이 계획을 세우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깨우친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10:23)
허탄한 자랑(16절)이란 인생의 자랑거리를 말한다.
인간 자체가 안개와 같은 존재이니 그 자랑거리란 것도 안개와 같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믿는 자들의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바울사도가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삶의 태도는 늘 주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다.
‘주의 뜻이면 너희에게로 가리라,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식으로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이나 비전을 품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였다. 그런 자는 결코 자기의 자랑을 할 수가 없으니,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만이 선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제쳐두고 인생의 야망을 쫓아 살아가는 것이 다 악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행하리라고 하는 것이 인생의 마땅한 태도인 것이다.
인생이 안개인데도 그 신분을 모르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악인 것이다.
(나의 묵상)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18:8)
이때의 ‘남의 말’은 거의 비방하고 판단하는 말일 경우가 많다. 얼마나 재미나면 별식처럼 맛있다고 할까?
이렇게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재미나는 이유는 아담 안에 태어난 인간의 죄악 된 본성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대로 살면 자연스럽고 재미가 있지만, 본성을 거스르는 일은 거북하고 힘이 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인 공동체라면 이런 비방과 판단이 그쳐야 한다.
왜냐 하면 구원받아 성령으로 사는 자들이라면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복음 생명을 통해 은혜받기 전에는 내가 무엇이라도 된 줄 알았다.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뛰어난 자들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속한 단체-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에서는 수십 년의 세월을 그렇게 스스로 잘난 체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매일 말씀 앞에 나아가게 되니 나의 진짜 모습을 보고 알게 되었다.
죄범벅이....못나도 이렇게 못날 수가 없고, 더러워도 이렇게 더러울 수가 없고, 무지몽매하기가 이를 데 없는 자라는 사실이다.
성경의 말씀대로 보면, 나는 먼지와 같고(창2:7), 나는 안개와 같고(약4:14), 나는 지나가는 그림자 헛것과 같은(시144:4)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런 내게 주님은 십자가를 보게 하셨다.
십자가는 단순히 구원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아니라, 이 땅에서 주님을 따르며 사는 삶을 실제적으로 인도해 주는 보배이다.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붙듦으로 죄에 대해 나는 불구가 된 몸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의와 나의 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죄의 세력이 더 이상 나에게 역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에 연합되는 삶이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비방과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대하면, 과거에는 이런 말씀을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죄성이 가득한 나는 이것을 절대 지켜낼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꾹꾹 참은 것을 저기서 토해 내고야마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는 나의 결심이나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비방과 판단의 그 재미나는 일을 하고픈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 짓는 나의 입이 벙어리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물론 때때로 실패할 때도 있지만, 그때도 말씀 앞으로 나아가 십자가를 붙든다. 나의 죄를 회개하며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시길 간구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은혜는 날마다 말씀 앞에 나아갈 때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또 하시는 것을 들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내가 아무리 어느 순간에 큰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때로부터 지속적으로 말씀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그 은혜는 한 때의 은혜로 그치고 만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 그러려니 하며 살아가는 무감각하고 무능한 크리스찬이 되고 만다.
문제는 이렇게 사는 이들이 더 많으니 서로를 바라보며 엉뚱한 위안을 받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매일을 말씀으로 살면 두 가지가 확실하다.
하나는 자신의 비참함을 인정하게 되고 그런 나를 덮어주시는 주님의 보혈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점점 더 알게 되고, 이것을 알게 되는 기쁨으로 더욱 말씀의 자리를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주의 뜻만이 선한 것이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어느 새 인생의 뜻이 선으로 둔갑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본성적으로 원하게 되는 나의 뜻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이 내 모든 영역의 기도가 되어야 하리라.
(묵상 기도)
주님,
십자가를 주셔서
본성적인 죄악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십자가는 그저 마음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말씀이신 주님을 통하여 새롭게 붙잡을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합니다.
비방과 판단으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주님의 뜻대로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증거 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