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4일 가해 연중 제25주일 마태오 20,1-16
-전삼용 신부 다 갚을 수도 없고, 갚았다고 믿어서도 안 되는 한 데나리온의 가치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포도밭 일꾼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주인은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하고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다섯 시에도 일꾼들을 불러 모읍니다. 다섯 시에 와 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는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이 자신들은 더 많이 받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지 못하자 투덜댑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 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는 가장 낮은 종이 되어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오늘 하루 종일 일한 종들처럼 자신들이 주인에게 더 해 주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데나리온’의 가치입니다. 우리가 받는 한 데나리온은 지옥이 가지 않고 천국에 이르게 만드는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일만 탈렌트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일만 탈렌트로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일만 탈렌트의 가치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 신 가죽옷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자신을 그리스도라 할 수 없고 그러면 주님 앞에 나설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많은 것을 드린다고 착각했을 때 주님 께서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체 성혈 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양이 우리에게 주는 빛에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처지가 연꽃의 씨에 불과함을 알면 됩니다. 연꽃 씨 는 물 밑 진흙 속에 묻혀있습니다. 그것이 스스로 자신을 깨고 나올 힘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태양의 따사로움이 그 씨앗 에 전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때 연꽃이 어떻게 태양에게 더 많은 것을 준다고 착각할 수 있을까요? 배우 박철민 씨가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자식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 한없이 오열하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왜 슬플까 요? 더는 어머니가 자신이 보답해드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운 게 아닐까요? 그는 어머니의 음식을 맛보고도 눈물을 흘립니다. 이미 저세상에 계신 어머니의 은혜에 더는 보답해드릴 수 없다는 것이 슬픈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만한 일꾼들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한 데나리온보다 더 일을 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한 데나리 온의 값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가치입니다. 우리를 하느님 자녀라 믿게 해 준 하느님 피의 값입니다.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 데나리온이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지옥에 다녀오게 된 것이 자신을 가장 많이 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가야 할 지옥에서 건져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다만 한 명이라도 지옥에 가지 않게 하도록 수천 번 죽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하루 종일 일해도 언제나 그 한 데나리온에 보답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것을 겸손함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다 갚을 수도 없지만, 이미 다 갚았다고 믿으면 더 큰 일입니다. 제가 신학교 때 들은 말 중에 “사제가 되려 고 하지 마라!”였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면 더는 할 게 없어서 이제 누리려고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여자, 돈이 나 비싼 차, 돈 많이 드는 운동이나 여행 등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내심 ‘내가 사제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라는 마 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제로 불러주신 분께 감사하기 위해 성인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라만차의 기사에서 돈키호테를 쫓아다니는 산초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 이익도 없지만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칩 니다. 알돈자가 그에게 왜 얻는 것도 없는데 그런 이상한 노인을 쫓아다니냐고 할 때 산초는 노래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한 데나리온 때문에, 곧 우리가 받은 정체성 때문에 그 피에 대해 한없이 기뻐하며 영원히 찬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나의 털을 몽땅 뽑는대도 괜찮아. 묻지 말아요. 이유가 뭔지. 그런 건 눈을 씻고 잘 봐도 없다 오. 발가락을 썰어서 꼬치구일 한데도 꼬집고 할퀴고 물리고 뜯겨도 하늘에 외치리. 나는 주인님이 그냥 좋아 ~~~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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