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우 루카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1요한 5,14-21 요한 3,22-30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다."(요한 3,28)
'파견된 사람들!'
오늘 복음(요한3,22-30)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모두의 구원이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지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파견되셨습니다.
자신을 신랑이신 예수님의 친구로 비유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29-30)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
모두의 구원이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지니고 이 세상에 파견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파견된 우리들!
파견되었다는 것은 파견한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파견된 사람들은 먼저 항상 겸손한 자세로
파견한 분의 뜻과 파견한 분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늘 기억해야 하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수많은 성인성녀들'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3,27)
우리도 '파견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러니 '항상 겸손하게 그리고 기쁘게'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충실하게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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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1요한 5,14-21 요한 3,22-30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요한 5,14)
여러분은 기도를 하면 잘 이루어집니까?
기도를 많이 하는데 하느님은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걸까요?
그건 아마도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확신이 부족하던가, 아직 때가 아니던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에 따라 청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세 번째가 문제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분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의 논리는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통해서만 그분을 알 수 있고,
그분의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라 살다보면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분의 뜻을 알게 된 사람은 복됩니다. 그 뜻에 따라 청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1요한 5,16 참조)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세례를 베푼 것은 요한이 원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렇게
세례를 베푸십니다. 요한이 시작한 세례운동이 예수님을 통하여 확장되고 완성됩니다.
물로 시작한 세례가 성령과 불로 완성됩니다.(루카 3,16)
요한에게서 배웁니다. 내가 시작한 일이 다른 사람을 통해 계속되고 확장, 발전되는 것이
더 큰 기쁨이란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 보통은 '원조' 논쟁을 통해,
먼저 시작한 나의 존재가치가 더 우월함을 증명하려고들 하지요.
원조 음식점들처럼 말입니다.
"나의 시작은 보잘것 없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욥 8,7 참조)라는 구절을 우리는 내가 이루어야
할 무엇으로 해석하기 쉬운데, 그 끝이 창대하게 되는 것은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일 가능성이 더 많다고 여겨야 하겠습니다.
나는 시작한 것으로 충분히 행복합니다.
그 보잘것 없는 시작을 창대하게 만들어준 그 사람에게 감사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면,
나는 또다른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 나의 성장과 발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성장과 발전을 보며 크게
기뻐하는 요한의 모습에 한참을 머무르면서, 내가 추구하는 기쁨과 행복은
어떤 것인지 다시한번 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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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1요한 5,14-21 요한 3,22-30
거절도 수락도 사랑으로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믿는 바인데 요는 그 믿음이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그 확신인지 성찰케 됩니다.
믿지 못하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단계와 정도가 있지요.
불신이 있고, 의심이 있고, 흔들리는 믿음이 있고, 흔들림이 전혀 없는 믿음 곧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제 생각에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거라는 것을 적어도 우리는
불신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의심이나 의문은 가질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한가?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은 차별이 없으시니 그에게도 주셨는데 그가 받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야겠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
경우와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셨지만 인간 측에 문제가 있는 경우입니다.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가 주저하거나 변호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대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뜻에 맞으면 다 들어주시지만 당신 뜻에 어긋나는 것은 청하더라도
주시지 않습니다. 마약을 달라는 자식의 청을 들어주는 부모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런 사랑의 거절을 경험한 우리는 온당한 청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신할 수 있고, 그래서 이젠 하느님께 청하기보다 자기 힘으로 벌려고 하는데
이런 불신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청을 드릴 때는 거절도 수락도 하느님께서는 사랑에서 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으로 하고, 그래서 들어주시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사랑이요 더 큰 사랑 또는 다른 사랑을 위한
거절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선이 아니고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왠지 생각들이 얼키고설켜서 더 이상 풀어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나눔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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