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히브리 1,1-6 마르코 1,14-20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들으시나요?
잘 못들으신다구요? 왜 그럴까요?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아서 못들을 수도 있고 그분이 말씀하시는데 내가 못알아 들을 수도 있겠지요?
그분이 말씀 안 하실 때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분이 말씀하시는데도 내가 못 알아 듣는다면
문제가 있겠지요?
그분은 옛적에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대요.(히브리서 1,1)
그런데 이젠 당신 아드님을 통해서 주로 말씀하신다네요. 제 말이 아니라 히브리서의 저자가
하는 말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리서 1,2)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면 복음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이겠지요. 물론 읽고 묵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삶으로써 응답해 드리기 위해서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성탄시기를 마치고 연중시기를 마치는 우리에게 오늘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1,15)
하느님 나라는 아주 먼 나라였습니다. 나는 거기에 들어갈 꿈도 꾸기 어려운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내 코앞에 와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방향만 잡아 뒤돌아보기만 하면 바로 거기 하늘나라의 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해야만 합니다. 회개란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고 세상을 향해 있던 나의 시선을 하느님 나라로
돌리는 일입니다.
성탄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내가 향하는 방향은 어디인지 잘 살펴봅시다.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지 세상을 향하는지, 사랑과 생명을 향하는지 미움과 죽음을 향하는지,
화해와 용서를 향하는지 분열과 증오를 향하는지...
우리는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죽은 후에 나는 과연 천국 혹은 극락이라고도 불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혹 나는 죄와 허물이 많아서, 또는 먹고살다보니
남을 위해 살지도 못해서 이런저런 이유 땜에 지옥이나 연옥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때론 걱정이 되기도 하지요.
예수님은 오늘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기쁜 소식(마르코 1,14)
이라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
걱정하지 마. 하느님 나라는 너에게서 멀리있지 않아. 아주 가까이 있어.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너도 들어 갈 수 있는 나라야."
그러시면서 두 가지만 요청하시네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르코 1,15)
회개는 방향전환을 말하니, 내 욕심보다 이웃의 행복을,
내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습니다.
복음을 믿으라구요? 하느님 나라가 더 이상 멀리있지 않고 정말 가까이에 와 있음을,
하느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심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알아듣습니다.
이미 이런 기쁜 하느님의 복음을 들은 하느님 나라의 제자들은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마르코 1장 18절.20절), 이 기쁜 소식의 전파자들이 됩니다.
이렇게 마음을 이웃과 하느님께로 돌려놓고 그분이 여러분의 삶에 아주 가까이하고 계심을
믿고 있는 여러분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러분의 것이니까요.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도 오늘 여러분이 들은 이 기쁜 소식을 즉각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에게
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제자가 되십시오. 아멘.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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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히브리 1,1-6 마르코 1,14-20
반인반수, 반인반신의 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되며 주님의 공생활도 시작되는데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그 첫마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치십니다.
이 말씀이 제게는 복음을 믿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리고,
복음을 믿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이미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도 나에게만은
아직 가까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회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이며 그 복음을 믿음으로써 행복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우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슬픈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인 사람이고,
그러니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 반대인 사람입니다.
왜냐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오면 이 세상 나라는 끝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단적인 예로 이 세상 삶이 끝나야 하느님 나라 곧 천국에 가잖아요?
그런 것이기에 가장 간단한 저의 회개 테스트는
'지금 죽게 되면, 예를 들어 암 선고를 지금 받게 되면 나는 기쁠까?'입니다.
저의 이성적 믿음은 그렇게 돼도 기쁘거나 적어도 담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제가 어떨지 아직 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떨까 또 생각해봅니다.
이 세상을 지금 바로 떠나는 것이 아직은 기쁠 정도가 되지 못했더라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Life Style대로 사는 것은 어떨지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생활 양식이라면 수도자들이 살기로 서약하는 바로 그 복음 삼덕 곧
가난, 정결, 순명을 복음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사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 이것은 지금 즉시 그렇게 살겠노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기로 이미 서약까지
한 저이지요. 하지만 이 또한 주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는 아직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회개를 시작은 하였지만
아직 충분히 또는 완전하게 살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솔직히 인정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기쁘게 살고는 있는 편이지만,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 기쁘고
너무 행복하다고 할 정도는 아직 되지 못했음이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반인반수라는 말이 있지요.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이라는 말 말입니다.
어제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세례를 통해 우리는 인성과 신성을 살게 됨을 얘기했지만
어쩌면 저는 반인반수이기도 하고, 반인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짐승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느님스럽기도 하는 저는
앞으로 한참 회개의 여정을 가야 할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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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노 신부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히브리 1,1-6 마르코 1,14-20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부터 연중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을, 독서는 사무엘 상권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로 시작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1,15)
이는 세 개의 내용으로 된 문장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일이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준비해 온 결정적인 ‘때’(카이로스)임을
밝혀줍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원어의 뜻: 손 안에),
곁에 혹은 예수님과 함께 ‘온’ 나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요 은총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결코 가는 나라, 곧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미’ 온 나라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은 ‘복음’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요,
‘회개’는 이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동시에 바로 지금이 ‘회개의 때요, 믿음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가져온 예수님 자신이 곧 ‘복음’이요,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루카 11,20).
결국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르코 1,17)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버리는 일입니다. 곧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아버지도, 삯꾼도, 배도, 그물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결국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실현을 위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요,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가치관과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요, 반면에 새로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잘못된 것, 좋지 않은 것은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이지만, 좋은 것으로 여기던 것마저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 더 값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생계수단인 배와 그물보다도 더 값진 예수님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을 버렸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찾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리기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기 위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복음’을 따르기 위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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