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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9일(월)
* 시작 기도
주님...
하루를 내가 이렇게 살아서 만족을 하고, 이렇게 살지 못해서 괴롭고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주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자로 서기 원합니다.
감정을 따라 조변석개하지 않도록 나를 붙잡아 주소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부평초가 물결을 따라 떠다니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의 말씀에 붙들려 말씀하시는 대로 나를 내어놓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여전히 내 속에 시꺼먼 죄가 똬리를 틀고 있으나 이것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살아계신 성령께서 나를 장악하여 주의 뜻을 이루는 자 되게 하옵소서.
나의 의를 드러낼 수 없는 지금 이 자리가 나의 무덤이오니 주님과 함께 연합하는 무덤이게 하옵소서.
이곳에서 주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덮어 새 사람으로 재창조하여 주시며 오직 주의 음성에 걸맞는 자로 걸어가게 하옵소서.
천천히 그리고 비록 절뚝거릴지라도 올바른 걸음의 소유자가 되게 하소서.
오늘 이 하루도 주의 날이 되길 원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약 5:12-20
제목 : 기도로 기도하라.
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 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은 것임이라.
* 나의 묵상
본문은 고난에 대한 성도의 대처 방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고난 중의 기도와 미혹된 자에 대한 바른 길로의 권면이다.
야고보 사도는 먼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권면한 후에 특별한 문제의 하나인 질병에 걸린 자에 대해서 성도들이 취해야 할 자세를 설명하면서 고난에 직면한 성도들은 이를 합심 기도로 극복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엘리야의 기도를 예로 들면서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서 성도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기도에 있음도 적시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후반부에서는 미혹되어 진리에서 떠난 자들을 돌이키게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는 합심기도와 함께 성도 간에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는 공동체적 신앙생활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곧 질병이다.
무언가 좀 할라치면 암이든 무슨 질병이 걸려서 병원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그동안 힘들여 세워놓았던 모든 계획은 차순위가 되고 제일 먼저 질병을 낫게 하는 것이 순위의 가장 앞에 놓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아픈 몸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07년도에 교회를 개척하고 2012년도에 장로를 세우고 교회가 힘있게 부흥하던 시기였다.
무언가 해보려고 청운의 꿈을 안고 사역의 시동을 거는데 그만 폐암이 온 것이다.
물론 부교역자들이 있어서 사역은 멈추지 않고 이어갔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담임목사의 폐암 소식을 들은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기도모임을 만들어서 릴레이 기도를 이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덕분에 수술이 잘 마쳐지고 온전히 회복되어 지금은 건강하게 살고 있다.
성도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기도한다고 하여 모든 사람의 기도를 그들의 뜻대로 다 들어주시지는 않는다.
기도의 열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 본문 17절에 기록되어 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이 바로 ‘간절히’라는 말이다.
이 ‘간절히’의 의미는 그저 고침 받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고 열심을 다하여 하는 그런 간절함이 아니다.
게다가 지성이면 감천이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나의 열심을 보고 하늘도 감동 하여 기도에 응답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저 나의 열심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간절히’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프로슈케’이다.
헬라어 ‘프로슈케’의 정확한 말은 ‘기도’라는 명사이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다’는 헬라어를 보면 ‘프로슈케 프로세윅사토’로서 프로슈케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를 동시에 병행해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간절히 기도한즉’의 헬라어 ‘프로슈케 프로세윅사토’의 보다 정확한 해석은 ‘기도로 기도했다(prayed with prayed)이다.
이는 같은 단어를 반복하여 강조의 의미를 두드러지게 하는 히브리식 표현법이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의 내용이 나오는 곳이 열왕기상 18장인데 거기서 살펴보면 엘리야는 비가 오기를 기도할 때 땅에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였다.
(왕상 18: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이는 기도하는 자로서 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겸손을 표시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기도하였을지라도 기도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7번을 기도해야 했다.
그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손바닥만 한 구름이 일어나 점차 하늘을 덮으며 비가 내리는 응답을 받게 된다(43-45절).
그런데 엘리야의 기도도 완전한 기도의 본이 될 수는 없다.
단순히 간절히, 열심히, 정성을 다하여 하는 기도는 우리 기독교 말고도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등종교가 아닌 하등종교(미신, 샤머니즘)와 같은 데서는 그 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상상을 초월한다.
엘리야의 기도가 최고로 낮춘 겸손의 기도였으며 또한 응답받을 때까지 간구하는 인내의 기도였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뜻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다.
이것이 바로 ‘프로슈케 프로세윅사토’ ‘기도로 기도하는 것’의 가장 확실한 예이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나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다.
(마 26:39, 42)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자이시다.
우리가 믿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것이다.
비록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중병에 걸리든지, 사업이 힘들어지든지, 자녀가 마음대로 되지 않든지, 여려 가지 우환이 집에 겹치든지 하면 거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사람이기에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안하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한다.
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 곧 기도이다.
이 기도가 간절한 기도 즉 기도로 기도하는 ‘프로슈케 프로세윅사토’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영생에 있다.
이 영생은 창세전 곧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 묵시의 시간 안에서 이미 약속하신 창세전 언약이다.
이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해 가신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영생의 신비를 맛보게 되면 지금 내가 육신적으로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 크로노스로 겪는 그 시간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는 자리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당하는 현실만을 두고 기도하다가 영생의 빛을 보게 되면 땅에 있는 것이 지극히 작은 모래알갱이와 같이 보이게 되며, 그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때 주께서 주시는 선물이 있다.
바로 ‘평강’이다.
이 평강의 마음이 나를 통하여 지경이 넓어져서 다른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로 확장되게 된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이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하신 기도의 내용이 바로 그렇다.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을 앞에 두고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상태에서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세상의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주님과 함께 못 박혀 죽어가는 한 편의 강도, 그가 주님께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 한 마디에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이 말씀은 목마른 자에게 가장 큰 생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가장 최악의 고통 중에 있는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기보다 그 앞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챙기는 모습이다.
비단 이것은 육신의 어머니만을 돌아보는 차원을 넘어 이 시대의 모든 이들을 위하여 하시는 말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영적 분리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부르짖는 소리이다.
육신적, 정신적인 모든 고통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으셨지만,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인 영적인 고통, 그것도 단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된 적이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기에 crying out 하시는 것이다.
5. 내가 목마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사역을 이루실 때 심한 갈증이 나셨다.
군인들은 예수님이 당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쓸개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님은 거절하셨다(마 27:34절).
이 목마름은 단순히 예수님 자신의 육신적 목마름을 넘어 이 땅에 있는 주의 백성들의 목마름을 대신 당하신 것이며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우리 모두의 목마름을 해결하셨다.
6. 다 이루었다.
결국 예수님은 외견상으로 볼 때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마귀에게 진 것 같은 형국으로 죽으셨다.
그러나 그 죽음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는 순간이었음을 이 한 말씀으로 대신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 원사도로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이루신 우리 주님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영생의 빛이시다.
7.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두 번 부르짖으셨다.
마 27:46절과 마지막 말씀인 눅 23:46절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아버지와의 분리가 결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기에 부르짖으셨으나 아버지와 떨어져 완전한 결별 상태가 되었음에도 다시 자신을 아버지께 의탁하는 최후의 부르짖음을 드린다.
이제 죄악 덩어리가 되어서 더 이상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자였지만, 그는 마지막 진액을 짜내시면서 아버지께 내 영혼을 부탁하신다는 그 기도는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부르짖음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는 가장 귀한 기도는 기도로 기도하는 것, 곧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기도이다.
그 뜻을 이루는데 나를 고통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면 나 또한 내 뜻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뜻을 위하여 나를 드려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런 기도의 참 맛을 알지 못하는 자였다.
그저 내가 힘들면 힘든 것 해결해 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하고,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예레미야 33:3절과 같은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비록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나를 향하신 크고 비밀한 것’을 보여 달라고 얼마나 목 놓아 기도했는지 모른다.
이것이 나의 실상이며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 주님은 공의로 심판하셨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어 날마다 주님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으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나 비록 연약하여 넘어질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힘입어 다시 일어나 아버지의 품으로, 아버지 집으로, 창세전 영생의 빛으로 파레시아로 감히 뻔뻔스럽게 나아간다.
그곳만이 내가 거할 처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 있는 곳’임을 알기에 오늘도 그 자리를 향하여 한 걸음을 뗀다.
주의 영광의 빛이 하늘과 내 마음에 충만하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모르고 행하던 때는 귀엽기라도 하지만, 알고도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얼마나 많이 역겹고 비위가 상하는지요.
이런 나를 주님은 어떻게 참으셨나요?
십자가에서 당신을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그 위대한 기도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요?
나는 조금만 차별을 받는 것 같고 무시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하는데 말입니다.
이건 아직도 내가 죽지 않고, 내 의가 살아서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는 나의 욕심과 정욕 때문임을 아오니 이 종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 말씀하셨으며 또한 주께서 친히 보여 주셨사오니 나의 기도가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가 되며 기도의 지경이 더 넓어져서 열방 가운데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이들에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가득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이곳 베트남은 우리 한국과 같이 구정 설을 쇱니다.
그래서 뗏이라 불리는 이 설날은 이들에게 가장 큰 명절입니다.
뗏에는 1주일 이상 쉬는 이들도 많이 있어서 정말 대이동이 현실화되기도 합니다.
벌써부터 그 분위기로 들썩들썩합니다.
이들이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 절을 하는데 이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