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주도적으로 완성하실 선교 마9:37~38, 시126:1~6 10.08.14출처보기
2010 중남미 선교대회 중 메시지
◑선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요.
▶지난 나흘 선교대회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는 그런 말씀을 주셨고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도 생각하게 되고 선교 종결 시대에, 우리 정체성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선교 한국> 대회에 참석했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선교를 얘기할 때 복음서 끝으로 가는 경향이 있죠.
맨 뒤에 있는 그 지상 명령의 구절을 선교의 출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지상 명령 구절은 사실 ‘가라, 가서 해치워라’는 명령이 아니고 ‘제자 삼으라’는 명령인 것을 잘 배우셨을 겁니다.
여기 지상 명령 구절에 동사가 Go가 아니고 Make Disciples, 그게 명령이기 때문에 선교를 풀어낼 때, 복음서 끝으로 가지 말고 예수님이 제자를 삼기 시작하셨던 복음서 초반부로 가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가서 뭘 해치우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그 일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지속된다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서 뭘 한다’기보다는, 주님을 따르는.. 그래서 ‘날 따르라’, Go paradigm이 아니고 Follow paradigm이라는 것을 많이 생각하게 한 대회였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사역을 잘 요약하는 말씀이 마태복음 9장에 나오죠. 보통 지역 교회 설교하시는 목회자 분들도, 이 말씀을 인용해서 복음 사역을 예수님이 하시는 그 세 가지 요점을 이야기하죠. Preaching, Teaching, Healing.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모델로 보여주신 그 사역의 모습인데, 이 문맥을 잘 보시면 그 3가지 사역을 하시고, 예수님이 다 끝내시는 게 아니고 아직 남아 있는 사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추수할 것이 많지만 일꾼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가서 해치워라’가 아니라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하는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 굉장히 중요한 틀입니다. 마9:37~38
주어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죠.
▶현대 선교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선교의 주어가 교회나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끝내자는 생각입니다.
이번에도 우리가 선교의 완성이라는 말을 쓸 때, 조심해야할 것은 선교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은 이미 1700년 전에 어거스틴이 당시의 라틴 말로 '미시오 데이'라고 말했는데, 선교는 교회의 선교나 그리스도인의 선교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교다..
선교라는 개념 자체가 어떤 사명으로 보냄이라는 뜻인데 그 삼위 하나님의 성교,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보내셨잖아요.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는, 삼위 하나님의 신적인 행위죠, 인적인 행위가 아니고 신적인 행위며,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러니 여러분이 큰 포부를 가지고 많은 일을 한다는 개념이기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하나님을 필연적으로 선교의 하나님으로 정의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온 천지 삼라만상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향한 하나님의 조건을 클레임하셔야 하는 하나님이기에 필연적으로 선교는 하나님의 것이다' .. 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하나님의 선교,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보내셨고. 아까 우리가 마9장에서 성자 하나님이 하나님의 선교를 어떻게 수행하셨는지 보았지만 그 성자 하나님이 이제 자기 사역을 마치시고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는 그 문맥에서 교회에 보내신 겁니다.
여기에 교회의 영광이 있습니다. 신적인 하나님의 일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렇게 정의해주시고 그리스도의 몸, 신적인 몸으로 교회를 부르시고.. 교회의 영광이 여기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버거운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게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는..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그 영광스러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에서, 교회는 교회가 많은 일을 하는 가운데 선교도 하나 곁들여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선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를 가지기에 교회는 표현적으로 선교적인 교회인 것입니다.
그 유리하는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이 민망하셔서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시는 것. 선교의 완성을 위한 부르심!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신적인 일이죠.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보내신 것처럼 성자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실 때 교회를 보내시는, 성령 강림과 교회의 탄생은 같은 사건이죠. 여기에 교회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왜 추수할 일꾼을 하나님에게 청해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선교는 하나님께 속해있기 때문에! 마치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청하는 겁니다.
여기에 추수라는 중요한 개념이 등장하게 되죠. 추수. 추수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거의 자동적으로 파종을 전제하게 합니다.
우리가 선교 종결 시대에 디아스포라를 생각하는 이유는 성경 전체에 일관적으로 하나님의 선교가 계시되면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추수를 지향하는 파종을, 즉 하나님께서 어떠한 추수꾼들을 보내실까요? 특별히 종결시대에 하나님이 비축하신 그 추수꾼들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죠. (답은 ‘디아스포라’입니다.)
◑조선이 예수 열심히 믿었는데.. 일본에 ‘포로’가 되다 그건 디아스포라로 만들어 선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내일이 광복절인데, 광복절에 많이 교독하게 될 시편 126편이 있습니다. 시온의 포로들을 다시 해방시켜주시는 그러한 기쁨을 노래하는..
우리가 36년이라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40년 동안 침탈당했습니다. 을사늑약(1905) 때 주권을 빼앗겼고, 경술국치(1910)는 공식화했을 뿐이죠. 그래서 실제 침탈당한 기간은, 총 40년인 것입니다. (1905~1945)
그때 우리가 해방되는 기쁨을 생각해보면, 여기 시 126편에서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열방에게 포로로 잡혀가면서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그 사건과 이 추수를 맞물리는 즉 파종과 추수가 같이 나옵니다. 시126편에요!
파종이라는 개념과 추수가 같이 나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추수의 주이신 하나님이, 어떠한 파종을 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추수꾼들은 어떤 사람들일까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대하드라마와 같은 성경 전체를 꿰뚫는 하나님의 목적론적인 섭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려면 성경 전체에 면면이 흐르는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이해해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126편에 우리가 지금 흩음, 흩어짐의 섭리가 나타나는 것이죠.
여러분이 디아스포라로서 특별히 신앙적인 관점에서 여러분 개인이나 신앙 공동체가 우리의 하나님의 섭리적인 그 우리를 흩으신 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이해를 할 때 이 흩음과 흩어짐의 섭리에 대한 이해를 따르지 않으면, 해법은 없기 때문이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금년 2010년은,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금년에 우리가 그 해에 이러한 디아스포라라는 화두를 가지고 선교대회를 모이는 것은 대단히 시의적절합니다.
우리 개신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획을 그었던 에딘버러 선교 대회(1910)와 경술국치가 오버랩되는 것도 저는 대단히 절묘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딘버러 선교 대회(세계 최초의 세계선교대회), 현대 선교 대회의 중요한 획을 그은, 그 대회의 후속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에딘버러 컨퍼런시스라는 말을 씁니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2010년 6월에 에딘버러에서 모였고 10월에 남아공에서 모이는 여러 개의 에딘버러 컨퍼런시스, 100년 전에 있었던 선교 대회에 대한 큰 이해이죠.
우리는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상관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이 교회사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세속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역사적인 손길 속에, 같은 해 1910년에 에딘버러 선교 대회도 있었고, 경술국치도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민족의 분산, 이것은 파종과 연관되어 있죠. 시편에서 본 것과 같이. 파종(경술국치)과 하나님의 추수(에딘버러 대회)가 동시에 일어나는 겁니다. 시126편에서 보듯이요.
▶금년에 유학생들 전 세계에 지금 20개 이상의 나라에서 모이는 금년의 주제가 <복음, 민족, 땅 끝>입니다. 저는 이 모임을 마치면 또 하나의 유학생 수련회를 가게 되는데 그 화두들을 가지고 성경 강의를 하게 됩니다.
복음은 개인이 어느 날 예수님 만나서 천국 가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처음부터 이 언약 공동체를 이루시는 그것이, 결국 천국 백성들과 연관되어 있는, 처음부터 공동체적이었고, 그래서 복음과 민족은 함께 가는 것인데
그러나 그 복음이 어떤 한민족이나 한반도에 갇힐 수 없는 이유는 필연적으로 땅 끝을 지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중 포부가 큰 누군가가 땅 끝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은 처음부터 땅 끝을 품습니다. 민족 복음이 아니라 한국 복음이 아니라 천국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통합적 이해와 맞물려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인위적인 오해가 항상 문제죠. 소위 이익의 충돌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을 때 우리의 관점에서 복음을 거의 자동적으로 풀어냅니다. 뒤틉니다. 우리가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이 예수 잘 믿는 나를 축복해야 한다는 그런 관점에서 뒤틀죠.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시 성경적 관점에서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평양 대부흥 운동과 백만인 구령 운동, 바야흐로 예수 잘 믿는 한민족을 하나님이 일제에게 맡기시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항상 비극은 어디에 있냐면 인간의 기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도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 예수님이 오셨기에 옛날에 아시리아, 바벨로니아 등 그 중동의 열강들 유럽의 마케도니아의 위인인 알렉산더가 시작한 그 그리스 제국과 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침탈을 당하면서.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그 상태에서 메시아가 오셨으니. 그 메시아가 당연히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기대를 했지만 여기에 충돌이 있는 것이죠. 우리 기대와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복음의 선명성을 살려내기 위한 운동에 관한 재밌는 표현이 있습니다.
'길들인 하나님을 놓아드리자. 길들인 하나님' 우리의 기대에 하나님을 맞추고. 많은 간증들이 문제가 있죠. 내가 길들인 하나님, 내 말 잘 듣는 하나님에 대해서 간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데 실패하면, 성경은 없는 것이죠. 그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데 실패한 사람이 선교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사람입니다.
왜요? 선교가 공로가 되기 때문에. 복음에 가장 반대되는 개념은 공로입니다. 우리에게 공론은 없습니다. 은혜가 있을 뿐이죠. 구원도 은혜이며 사역도 은혜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주께 갚으심을 받겠느냐.’
▶관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익의 충돌 속에서 인간의 기대가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었고,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한반도 안에 잘 먹고 잘 살도록 보호해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예수 잘 믿는 민족을 흩으신 사건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표를 만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왼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일반적 기대치이며, 오른쪽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 잘 믿기에 내가 선택한 곳에서 산성을 쌓는, 하나님은 내가 이 산성 쌓는 곳에 도움을 주셔야 하는 하나님으로 기대하죠.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흩으시죠.
선교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영웅적으로 해치우는 것이 아니다. 까불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선교에 끼워주시는, 저는 그런 깨달음이 왔어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를 생각해봅니다. 엄마, 아빠, 내가 주물러 드릴까. 세 살 먹은 애가. 그래 그래, 그 고사리 손으로 때립니다. 그건 뭐. 아, 시원해. 아마 그게 더 맞을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한다는 게. ‘우리가 빨리 하나님을 도와드려야겠네. 큰일났네.’ ‘그만! 이제 됐거든요.’
◑기독교인의 본질은 ‘디아스포라’, 나그네
▶인본주의적 접근은 지금 아메리칸 드림에서도 최고의 가치가 안전 Security인 것 아시죠. 불확실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가 컨트롤해야 합니다.
왜 돈에 미치냐면, 미래에 내 운명을 내가 컨트롤해야 하니까. 내 저축이 쌓여야 내가 미래를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하나님이 해야 할 일은, 내 저축에 대박이 터지도록 만드는 게 하나님의 역할이죠. 그것이 인본주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요. 내가 네 안전 Security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내가 네 지극히 큰 상급이다.’ 내가 Reward다. I am the fortress. 나의 반석이고, 산성이신 하나님. 하나님 자신이 Rock이고 Fortress죠.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그래서 창세기는 이렇게 말하죠. ‘유리하는 방랑자다. 목적이 없는 유리하는 방랑자.’
제가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우리는 목적 지향적 순례자인데, ‘유리하는 방랑자’를 생각할 때, 기독교 세계관에 나오는 문구가 생각났어요.
목적 없는 세계에 의미가 있을까. 의미 없는 세계에 가치가 있는가. 비기독교적 가치관에서 세계는 목적 없는 방황을 계속 하겠죠. 주인을 잃은 세계는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방황을 계속 하겠죠.
이 시대에 대표적인 무신론 지성인 버틀란트 러셀도 그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가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물으니까 ‘그걸 왜 나에게 묻느냐, 나는 무신론자이다.’ 신을 정의하지 않은 목적론적 논의는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이 목적인 줄 착각하기에 다들 벽을 쌓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분산하시죠. 한나 자매님이 있었던 이라크, 3대 문명의 발상지인 그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는 이게 언약이죠. 복음의 본질이에요. 역설이에요.
메소포타미아로 우리를 인도하셔야 여러분이 그렇게 추구하던 아메리칸 드림으로 인도하셔야 그게 복음일 것 같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길들인 하나님을 자꾸 간증하려 합니다.
▶저는 그 때 혼란을 느낍니다. 왜냐면 대박은 예수님 안 믿어도 터지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이기에.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시고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티켓을 주시기에. 여러분이 꼭 성공했다는 간증을 가지고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일반 은총의 영역을 가지고 자꾸 하나님을 증명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은혜로운 역설 속에 여러분이 살아야 합니다.
가진 것은 쥐뿔도 없는데,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가치죠.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그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뽑아내신 하나님, 여기에 언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목적 지향적인 순례자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그래서 이방 땅에 우거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영속적 거주자가 아니라 잠시 있는 방랑자들, 그리고 여러분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 큰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텐트에서 사는 것이다, 텐트에서.
이번에 우리가 그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여행 인생. 제가 가방만 들고 다닌지 어언 10년입니다. 제가 돌아다닐 때, 무슨 뭐 무거운 크리스털로 된 감사패 주는 사람 제일 미워요. 무거워서요! 어디 둘 때도 없고. 그것 참 골치 아픕니다.
이번에 혹시 미션에서 저에게 감사패 줄 생각했다면 꿈 깨세요. 짐이 가벼워야 움직이죠. 이게 우리 문제에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선택인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살도록 부르신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거죠. 아메리칸 드림이 복음이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이 왕국을 가도록 하는 우리는 여기에 우거하는 이방 땅에서 잠시 텐트치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거죠.
끊임없는 패턴,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기대의 충돌, 또 다른 이집트의 메소포타미아 못지 않은 나일 삼각주에 정착하죠. 다시 그들을 흩으시죠. 그들이 출애굽하게 하시죠. 그들이 정착하면 다시 디아스포라로 흩으시죠.
▶깨달아야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는 미국에 와서 사시는 여러분들,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언약 구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가서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했습니다. 거류, 방랑자로서 잠시 머무는 것이죠.
자기 자손들도 마찬가지. 오늘 우리가 2세 이야기 했습니다. 1세들의 희생은 잘 알죠. 그래 내가 희생할테니 너희들은 잘 살아라. 그러면서 2세들을 놓치는 일이에요. 불행한 일입니다.
1세들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기 위해서 새벽 기도 나오고 철야기도 나와야겠지만 아까 (그 왼쪽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2세들은요, 예수님 신세 안 져도 영어 잘하고 1세의 희생적인 교육열 때문에 다 아이비리그 나와서 꼭 교회 나올 필요 없어요, 2세가. 이게 우리의 불행입니다. 부모님들 희생하신 것 알아요. 그러나 For what(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이게 우리의 비극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손들과 함께 텐트에 살았어요. 자기 자식들도 ‘너도 텐트에 살아라. 너 알아라. 너는 다른 가치를 향해서 가는 아이야. 우리는 그 다른 가치를 위해서 부르심 받았어. 여기서 정착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그 영원한 나라를 향해서.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았음이라.’
For he was looking for the city, 그게 어떤 City냐면 Whose architect and the builder is God. 히11:10
설계자도 시공자도 하나님인. 하나님의 선교에요. 저는 설계 사무실과 시공 사무실에서 다 일을 해봤어요. 설계와 시공을 따로 하죠. 그런데 하나님은 설계자고 시공자에요. 같이 하세요. 하나님의 그 선교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죠. 이게 바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파종과 추수의 논리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할 때, 주님은 그 이야기를 하셨어요. 파종과 추수의 개념을 이야기 했어요. 씨를 뿌리는 자, 농부이신 하나님, 씨앗, 30배 100배의 추수. 이게 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메리칸 드림의 완성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추수를 생각하신 걸까요. 일반적인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도 모임과 흩어짐의 역학이 나오죠.
잠언은 말합니다. 선교적인 것을 떠나서라도 사람이 일반적으로 사는 지혜라고 했어요. 이 세상에서도 이미 이 역학을 이해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흩어져서 구제하는 사람들. 고넬료 같은 사람들. 예수 안 믿어도, 예수 믿는 우리보다 훨씬 더 이타적이고, 더 이 흩음의 논리의 축복을 받는 것보다 주는 자의 축복을 이미 누리는 안 믿는 사람들도 많아요. 아십니까?
요즘 코스타에선 그래서 ‘배워서 남 주자.’ 옛날에 여러분이 공부 안하는 자녀들, ‘배워서 남 주나?’, 이랬죠. 좋은 Motivation이 아니에요. ‘배워서 남 주자, 돈 벌어 남 주자. 흩어서 구제하여도 더 구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요즘 사회적 기업이라는 개념 아십니까. 사회적 기업이 깨달았어요. 자기들이 열심히 벌어서 움켜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흩어버리는 것이다. 안 믿는 사람들도 깨달았다니까요.
요즘은 예수 믿지 않는 기업들 중에, 훌륭한 기업들 많아요. 뭉치면 살지만 흩어지면 더 산다. 흩어버려라. 하물며. 하나님의 선교의 부름을 받은, 여기 우리가 교회론이 나오죠.
▶어제 우리 송민호 목사님이 The mission of church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교회가 모임이 반드시 필요하죠.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명령을 두 개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Come, 다른 하나는 Go. 굉장히 명쾌한 분석이에요.
성경의 모든 가르침, 명령을 크게 두 개로 대변하면 하나는 오라는 것이고, 하나는 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참의 하나님의 Fellowship, 뭉침의 역할. 그것에서 미션이 나오죠. 가는 일.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신. 초대 교회의 공동체가 삼위 하나님을 반영하는 요즘 이 시대의 교회들이 많이 결여하고 있는 공동체성.
회교권 이야기가 나왔지만 기독교회가 회교도들의 그 공동체적 탁월함보다, 기독교의 공동체적 탁월함이 승하지 않고서는 회교도들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것에 달린 게 아니고 어떤 한 개인을 개종시켜도, 그 사람을 붙잡을 수 있는 강력한 공동체가 없이 그 사람은 자기 신앙을 유지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회교로 다시 돌아갑니다.
한 사람의 회교도가, 한 사람의 불교도가 예수 믿는 사건을 우리가 침소봉대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다시 돌아가 버립니다.) 우리가 공동체성을 잃어버리면, 그 개인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회교의 ‘우마’(공동체)보다 빈약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회교의 견고한 진을 파하겠다는 겁니까.
근본적으로 우리의 구원의 속성이 하나님과의 망가진 관계의 회복이고, 이웃과의 관계의 회복이라면 교회가 그 끈끈한 초대 교회적인 그런 공동체가 회복되지 않고 선교의 미래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퀄리티를 가져야 합니다. 그게 초대 교회의 공동체죠.
훌륭한 교회지만, 그러나 아직 목적지향적인 교회는 아닙니다. 그 뭉침이, 에너지의 농축이 목적 있는 농축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의 비축이 우리가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선교)을 향해서, 그래서 Go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초대 교회가 디아스포라가 됨으로써 그들이 사마리아로, 헬라인에게 가는. 그런 성경의 패러다임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안디옥 교회라는 다민족 공동체가 또 생겨나죠. 끈끈한 공동체. 오늘 우리가 많이 묵상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공동체가, 다민족 공동체가 된다면 얼마나 멋있습니까. 어제 우리가 많은 감동이 있었잖아요. 천국이 저런 곳일까요. 맛보기죠.
근데 거기에 머물러 사는데, 머물 곳은 천국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하나님이 만족하실 분이 아니니까, 우리가 각 종족과 각 백성과 각 언어에서. 아무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때까지 ethno-doxology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드려지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는 거룩한 불만족으로 끊임없이.. 그래서 바울과 바가바를 파송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Missional church라는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끼리 뭉쳐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끊임없이 교회가 가야 할,
어떻게 세상을 향해 가야 할 것인가. 우리가 얼마나 모이냐로 우리의 건강을 측정하지 말고 얼만큼 소모하는지..
마치 여러분이 보릿고개를 넘길 때는, 먹을 게 없어서 살찌는 것이 부러웠어요. 배 나온 사람 보면, ‘몸 좋다’고 그랬어요. 몸 좋다고.
근데 깨달았죠. 몸이 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죠.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에너지를 잘 쓰는 것이죠.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 교회가 얼마나 모이냐보다도 그 교회가 얼마나 세상을 향해서 다가가고 있는가,
우리가 교회의 규모와 무관하게,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Missional church라는 개념은, 이 하나님의 큰 선교의 구도 속에서 중요한 개념입니다.
▶저는, 교회의 미래는 기성세대도 아니고, 차세대도 아니라 믿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지금 교회 밖에 있는 그 사람들에게 있어요.
교회 밖에. 오후 5시에, 장터에서 서성거리는 그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가.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가 그들에게 가고 있는가로 교회의 미래는 결정됩니다.
어제 이야기 했죠. 송 목사님도 인용했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 이야기. (저는 그 이야기를 15년 전에 한국을 방문하신 존 스토트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집단 중에서 유일하게 Non member들을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 교회다.’ 이게 Missional church의 핵심을 찌르는 이야기입니다.
멤버들을 위해서 maintenance(유지보수)로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라 Non membership 들을 위해서! 여러분 이미 다 가졌잖아요. 여러분의 질그릇에 그리스도를 담아줬으니, 다 가졌잖아요.
교회의 에너지가 여러분을 위해서 다 소모되라고? 그런 교회가 무슨 교회인데요? 그런 교회가 만 명, 십만 명이 모이면 뭐하는데요?
▶이제 결론을 향해서 가야겠습니다.
우리가 아까 시편 126편을 읽으면서 그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분산됐고, 하나님의 선교가 가속되는 한 세기와 우리 민족의 분산이 맞물려있는.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이 씨를 뿌린다는 개념이라는 것입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나오는 씨뿌림.. 그게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시편 126편은, 민족의 분산/포로를 말씀하지만, 그와 동시에 디아스포라가 되어서, 눈물을 위해 씨를 뿌리는 자여, 기쁨으로 거둘 것이다..
즉, 우리는 파종의 개념을 통해서, 여러분 스스로가 자기의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가요?
농부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이 씨뿌림이라는 행위는 의도적이고 정확한 행위입니다. 실수로 뿌려진 게 아니라,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그런 게 아니고. 농부이신 하나님이 정확한 장소와 정확한 시간에, 하나님의 계절에. 절묘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각자가 지금 그 자리에 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이 가장 상태가 좋을 때, 평양 대부흥운동(1907)을 통해서 그 영적인 생동성은, 기독교 세계 역사의 어디다 내놔도 빠지지 않는, 가장 진정한 부흥이었습니다. 가장 Prime time 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흩으신 거죠. (1910~)
이게 바로 농부의 일입니다. 모판에서 가장 튼실한 모를 뽑아서, 논에다 심는 법입니다. 병든 무를 심는 것은 낭비죠. 튼튼한 모를 심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때, 하나님이 왜 예수 잘 믿는 우리를 흩으시는지 원망스러웠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 가운데 우리는 깨달았죠. 하나님의 추수를 위한 것임을!
여러분이 능동적으로 가셨든지, 어떻게 가셨든지 그 배후에 있는 여러분을 씨앗으로 뿌리신 하나님의 큰 손을 이해하는 것이, 이 수고의 결론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 종교를 생각해봅니다. 선교 종결시대에 한인 디아스포라, 꼭 한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흩으신 그 흩어짐 자체가 사실은 Default죠.
아까 제가 표를 하나 보여드렸는데, 흩어짐이 결국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흩어짐이 어떤 예외적 사건이라기보다는 흩어짐이 기본이다. Default setting이다. 기본은 흩어짐이다.
제가 70년대 선교에 헌신하게 될 때 저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도전을 했던 전재옥 선교사님이 있어요. 파키스탄에 처녀의 몸으로 가서 60년대에 7년동안 사역하고 오신 분이에요.
그 당시에 제가 신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 바지 저고리들아!’ 하면서 남자들 다 여기 있었네. ‘거기 처녀들 가서 고생하고 있는데 뭣들 하는거야?’ 하면서. 그때 전재옥 선교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은 손 들어보라’고 했어요. 왜냐면 흩어짐이 Default기 때문에.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씨앗이라면 우리가 Field로 가는 것이 Default지 남아있는 것이 Default겠어요.
▶캐나다 토론토에 그 선교하는 지역 교회의 모델이 되는 교회의 담임 목회자였던 오스왈드 스미스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여기 굳이 머무르라고 하면 순종할 각오를 하면서도 우리 모두는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게 Default니까. 흩어지는 것이 정상이니까. 특별한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흩어지는 것이 왜, 휘어져서 추수할 때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종결 시대에 왜 디아스포라인가를 생각하면서 말씀을 맺읍시다. 바울이 이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바울이 크리스천 Ministry를 얘기할 때 바울은 그 경주 개념을, 그 이미지를 도입하죠. 경주 이미지.
선교라는 것은 혼자 단거리 100m를 뛰는 것이라기보다 장거리, 릴레이 달리기 개념입니다. 이 세대로부터 세대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하나의 그 통시적인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인 것처럼. 선교는 지난 이천년 동안 성령 강림 이래로 이어져 온 릴레이죠.
우리가 바통을 놓쳐서는 안 되죠. 그런데 이 이어달리기의 최종 주자는 일반적으로 가장 잘 준비된 사람을 세웁니다. 맞죠? 선교 종결 시대에, 하나님이 어떤 최종 주자를 준비시키셨을까요. 디아스포라보다, 최종 주자로서 더 준비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요.
바울과 바나바보다. 그 부모가 그들도 청운의 꿈을 안고, 여러분이 1세대의 꿈을 안고 여기 왔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이 모르는 사이에 여러분을 보내시고 여러분의 자녀들을 준비시키신. 속았죠? 알았으면 안 왔을건데요.
그 정체성의 이해가 필요하죠.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사실 거예요. 무엇을 향해서 가실 거예요. 선교 종결 시대에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를 준비시키셨는지. 오늘 간증 들었잖아요.
저 자매가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 갖는 그 정도로 하나님이 저 자매를 부르시지 않는다는 걸 들었잖아요.
여러분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최종 주자. 마지막 단계. 저는 야구 경기 개념도 생각해봅니다. 야구 경기. 적시안타.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도대체 우리가 그냥 안타를 때려서는 점수가 안 나는데, 만루에서 안타를 치면 영웅이 되죠. 홈런이 아니라도. 하나님이, 가장 적시에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그 디아스포라 기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동의합니다. 예수님 사역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사도행전의 시대를 준비하시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다음에 그 이루신 복음이 극대화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디아스포라를 포진시키신 일입니다.
이제 종결 시대에 하나님은 똑같은 일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또 새로운 때입니다. 저는 그 생각을 해요. 이 최종 주자들인 디아스포라가. 6천 개의 미전도 종족 중에 마지막 종족을 향해서 가는 거죠.
아직도 남아 있는, 자기네 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종족의 맨 마지막 종족에게 가는 그 순간. 3년 전에 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우리가 쿠바를 누르고.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온 선수와 온 한민족이. 폭발적인. 그 축복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 안타를 기다리고 계시는 거예요. 누가 그 안타를 칠까요. 저는 여러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분들. 다 같이 일어섭시다.
J.H.W 타자 |
출처: 냉수 한 그릇 원문보기 글쓴이: 김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