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바꾼 황금 요절
요한복음 3:14-21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사순절 넷째 주일이다. 봄을 맞이하는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사랑하는 것은’(문정희)이다.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 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사랑이 봄에만 피어날까? 사계절, 365일 매 순간 사랑의 힘으로 산다. 사랑은 가장 소중하지만, 조금 넘치면 값싼 단어로 전락한다. 그러니 사랑이란 단어를 잘 다루어야 한다. 결코 인색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늘 반복하여 간구하는 목회기도 “부부 간에 깊이 이해하고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는 가장 성공적인 사랑에 대한 간구이다.
종종 금싸라기 같은 낱말이나, 표현을 줍는다. 지난주 교역자회의를 마치고 차담을 나누던 중에도 속담 하나를 건졌다. 어느 목사가 남의 말에 대꾸하며 뜬금없이 던진 말이다.
“동네 처녀 예쁜 줄 모른다더니.”
가장 가까운 데서 못 보고, 남의 동네 기웃거린다. 기실 고마운 것은 아주 가까이 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가장 예쁜 법이다.
1)
성경은 금싸라기가 널려있는 말씀의 노다지다. 황금 요절로 가득하다. 색동교회의 특징 중 하나가 요절이다. 그물짜기, 위임식, 톨레레게 등 그때마다 여러분이 선택한 요절을 기억하는가?
<세상을 바꾼 성경 말씀 100>이란 책이 있다. 지난 2천 년 동안 신앙의 위인들이 사랑했던 성경 100구절을 소개한다. 아주 행복한 책이다. 100구절 가운데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16절도 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손꼽은 요절일 것이다.
본문의 주인공은 미국 복음전도자 드와이트 무디이다. 그는 시카고에서 구두판매원을 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였다. 23세 때 그가 가르치던 주일학교에는 어린이가 1,500명이나 몰려들었다고 한다. 어느 주일날, 링컨 대통령이 그 주일학교 현장을 방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하였다. 그가 전한 말씀의 사랑의 핵심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늘 그를 감격시켰다. 그 사랑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고, 복음에 대한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세상을 바꾼 성경 말씀 100>에서 소개한 요절은 100구절이 아니다. 다만 99구절을 소개한다. 그리고 독자를 향해 100번째 구절은 당신의 몫이라고 말한다. 여러분의 요절이 마지막 장을 장식하기 바란다.
나는 새벽기도회를 위해 ‘복음서 365’를 쓰는 중이다. 오늘 밤에 215회를 쓸 차례이다. 그동안 설교해 온 익숙한 말씀이지만, 매번 쉽지 않다. 실은 밤마다 고달픈 작업을 한다.
지난 주간 새벽에 여성 집사님 한 분이 처음 나오셨다. 집사님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놀랐을 것이다. 그날 참석자가 새로 오신 분까지 다섯 손가락이었다. 아마 그렇게 소수 정예가 모이는 줄 미쳐 몰랐을 것이다. 너무 적은 무리에 용기를 얻었을까? 지난 주간에 세 번이나 나오셨다.
그래서 내가 변명을 하였다.
“여기 앉아계신 오신 분들은 대표자들입니다.”
새벽기도회 메시지 ‘복음서 365’를 같은 시간에 색동카페에 예약해 둔다. 나중에라도 여러분이 함께 하고 있으니 반가운 일이다. 작년과 올해 2년 동안 원고작업을 마치면 2025년부터 바이블25에 연재할 것이다. 색동교회에서 뿌린 씨앗에 수만 명이 동참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나는 미래의 보이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 밤마다 씨름하는 일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무엇을 할까 고민한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황금 요절이다. 하루에 황금 요절 하나씩 풀어서 소개하는 일이다. 여러분도 이런 저런 내 마음의 황금 요절을 제안한다면, 더 가까이 참여할 수 있다.
2)
요한복음 3장 16절의 배경을 살펴보자. 황금요절은 믿음의 삶에 이르는 길을 들려준다.
주인공 니고데모는 반듯한 유대인 지식인이요, 지도자였다.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만났다. 니고데모의 질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들을 수 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직접 찾아와 제자처럼 낮은 자리에서 대화했던 유일한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여느 율법학자나 바리새인과 달리 예수님의 허물을 들춰내려는 경계심도 없었다. 다만 진리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하였다.
그는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초점을 하나님께 맞췄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압니다’라든지, ‘당신이 행하는 표적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라는 그의 말과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당시 바리새인은 전국적으로 6,000명을 넘지 않은 소수의 엘리트 그룹이었다. 그런 인물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실은 놀랍다. 의외였다. 밤은 자신을 감추기에 좋은 조건일 것이다. 게다가 공의회 70명 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와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면 타인의 까다로운 이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니고데모는 매우 신중하였지만, 새로운 사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마 그의 학식, 곧 많이 아는 것이 병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진심 어린 하나님 타령에 대해 ‘하나님 나라 비밀은 거듭난 사람이어야 그 진실을 바로 알 수 있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그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는 그 ‘거듭남’에 대해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또 반문하였고,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고 대답하셨다.
사실 하늘에 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맹랑하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하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경험을 예로 들어 말씀하신다. 그 광야는 의심의 광야, 불평의 광야를 뜻한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출애굽 광야의 불뱀 사건에 대해 말씀하신다. 공동번역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대들었다.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은 공공연히 모세에게 반복하였고, 심지어 은총의 양식인 만나에 대해 대놓고 경멸하였다. 그때 광야의 불뱀이 불평하는 백성들을 물어 죽였다. 그들은 곧 후회하였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질렀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민 21:7).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불뱀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고 하신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 고통을 겪는 광야의 유대인들은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무 위에 들려있는 그것을 바라보라! 바라봄, 그것은 믿음의 출발이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그 가운데 십자가의 비밀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그 십자가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거듭남의 비밀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나무에 달리는 일은 율법에 따르면 저주받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나무 위에 달려 죽으신 일도 율법의 관점에서는 저주받은 일이다(갈 3:13).
이제 예수님은 나무에 달릴 것이다. 저주받은 자가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은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신 대속적인 죽음이다. 광야에서 나무에 달린 놋뱀의 형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회복되고 생명을 얻었던 것처럼, 저주받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진리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나무 위에 달린 불뱀의 형상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들일 때에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한때 이 놋뱀 형상(느후스단)을 믿음의 목적으로 삼을 때가 있었다(왕하 18:4). 그러면 우상이 된다. 지금도 이단들도 십자가를 도깨비 방망이처럼 해석한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이다. 그 나무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그 저주의 나무, 그 비참한 죽음이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임을 믿는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황금 요절이 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유튜브(You Tube)에 미국 프로 미식축구선수 팀 티보우 이야기가 있다. 그는 쿼터백을 맡은 선수로 역전승의 귀재인데, 정작 그를 유명하게 된 것은 눈 아래에 붙인 아이패치 때문이었다. 아이패치의 문구는 ‘John 3:16’이었다.
필리핀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팀 티보우는 동네에서 풋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후 플로리다대학팀에 스카웃되었고, 대학 팀을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티보우의 활약은 프로에서도 계속되었고, 꾸준히 역전승을 이어갔다.
그는 프로 경기에서는 아이패치를 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대신 성공적인 터치를 할 때마다 한쪽 다리를 꿇고 기도하였다. 기도하는 티보우의 모습을 사람들이 따라 하면서 ‘티보잉’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팀 티보우의 믿음과 역전승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구글 사이트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12억 회나 검색되었다고 한다. 그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평생 사랑했던 드와이트 무디를 쏙 빼어 닮은 스포츠 선교사이다.
3)
내게 선물과 같은 황금 요절이 있다. 신학교 입학하기 전 겨울방학에 시골집에 갔다가 어린 시절 다녔던 대화감리교회에서 봉사하시는 당시 대화국민학교 선생님을 만났다. 그때 내게 시집 한 권(<사랑하는 님이 계시기에>, 헬레 스타이나 라이스)과 말씀 한 구절을 선물로 주셨다.
지금 선생님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받은 요절은 평생 내가 사랑하는 말씀이 되었고, 여전히 ‘제3일, 새벽 빛, 늦은 비’와 같은 상징적 개념들을 사랑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1-3).
성경은 그 흔한 사랑이야기를 거듭거듭 말씀하신다. 자칫 넘치지도, 조금 모자라지도 않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고백이며,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였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아들을 잃고 빈소를 지키고 있는 아버지를 조문하였다. 한자어로 이런 경우를 ‘참척’(慘慽)이라고 한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할 말이 없었다. 늦은 저녁이지만 권하는 식사를 사양하였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시더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으니, 더 이상 애지중지할 것이 없어 보이더라. 집에 누워도 내 집 같지 않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앞에서 더욱 옷깃을 여밀 일이다.
어쩌자고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을까? 그 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 요한복음은 말한다. 그 사랑은 진리의 영역이고, 심판보다 더 강한 것이지만, 우리의 삶 가장 가까이에 빛으로 머물고 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21).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이처럼 내 삶에 복을 주시고 나와 함께하신다.
바라기는 사순절을 통해 나의 길, 나의 밤, 나의 십자가를 새롭게 하는 은총의 제3일을 맞이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