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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세 때 파리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에밀 타케 신부. |
2014년 8월 14일 저녁,
대구대교구 생태환경위원회 정홍규 신부(대구가톨릭대 사회경제대학원장)는 지인인 김규씨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구한말 선교사로 오셨던 에밀 타케 신부를 아십니까? 타케 신부가 제주도에서 대구로 가져와 심은 왕벚나무가
있다는 것은 아십니까? 타케 신부가 식물학자로, 사제로 우리나라를 위해 하신 일이 많은데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고 여기에 무덤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으니….”
정홍규 신부는 에밀 타케의 존재를 그때까지 전혀 몰랐다. 김씨는 선친인 김달호 전 경북대 교수가
생전에 타케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고 했다. 타케 신부와 이웃에 살면서 가족처럼 지냈던 선친은 타케 신부의 삶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에 대해 늘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김씨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던 정 신부는 다음날 새벽 눈을 뜨자마자 김씨에게
들은 대로 대구 남산동에 있는 성직자 묘지를 찾았다. 그곳에는 과연 에밀 타케(Emile Taquet) 신부의 묘가
있었다.
‘본적 佛國
1873. 10. 30~1952. 1. 27
사제 嚴 에밀
다겟’.
비석에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안경을 쓴 벽안의 신부 사진이 붙어 있었다. 묻혀 있던 에밀 타케(세례명
에밀리오) 신부의 이름이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순간이었다. 정 신부는 그때부터 타케 신부의 흔적을 좇기 시작했다. 타케 신부가 1920년대
대구에 심었던 것으로 보이는 두 그루의 왕벚나무도 찾았다. 그로부터 2년 반, 대구대교구와 서귀포성당을 중심으로 타케 신부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그를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에밀 타케, 한국명 엄택기 신부 사후(死後) 65년.
과거완료형인 그를 현재로 불러내 기려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타케 신부는 1911년 일본에서 온주밀감 14그루를 제주도에 들여와
밀감산업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서귀포시 서홍동 204번지 ‘면형의 집’ 앞에는 그중 살아남은 한 그루가 아직도 열매를 맺고 있다. 그는 제주에서
자생하고 있는 왕벚나무(천연기념물 제156호)를 발견하고 유럽 식물학계에 알렸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일 왕벚전쟁의 결정적 열쇠를 제공한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왕벚나무는 일본의 나무가 됐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일본은 왕벚나무가 한국산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구, 마산,
나주 등 그가 부임한 곳마다 왕벚나무를 심은 것을 보면 타케 신부가 얼마나 왕벚나무를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한국식물분류학계에 남긴 흔적은 뚜렷하다. 7040여종의 식물을 채집해 유럽에 보낸 표본 중 250여종이 신종으로 분류됐다. 그중 타케 신부의
이름을 기념해 학명에 ‘타케’가 들어간 식물만 섬잔대(Adenophora taquetii H. Lv)를 비롯해 20종에 달한다. 서양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되는 구상나무를 한라산에서 처음 발견한 것도 타케 신부이다.
타케 신부의 존재를 알고 있던
식물학계에서는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에밀 타케냐’는 시선도 있다. 그동안 식물학계에서 그의 이름은 종종 등장했다. 특히 왕벚나무 원산지를
둘러싼 한·일 논쟁에서는 빠지지 않은 키워드였다. 그러나 천주교 차원에서 타케 신부는 완전히 잊혀진 인물이었다. 최근에야 식물학자 에밀 타케와
사제 에밀 타케의 퍼즐 조각이 맞춰진 것이다. 그 조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격동의 한국 근대사가 있고, 한국 천주교사(史)가 있다. 낯선 땅을
헤매며 식물을 채집하던 식물학자가 있고, 유럽식 교육을 도입해 성직자를 길러내기 위해 애쓰던 교육자가 있다. 타케 신부는 이 땅에서 식물학자로,
교육자로 살았다. 무엇보다 이 땅을 사랑하고 가난한 신자들을 품어준 따뜻한 사제였다.
사제, 에밀 타케
1873년 프랑스 노드주에서 태어난 타케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24세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는 다음해인 1898년 1월 부임지인 한국 땅을 밟은 후 죽을 때까지 한국을 떠난 적이 없다.
그에게 한국은 제2의 조국이었다. 아시아 선교를 내걸고 만들어진 파리외방전교회는 죽을 때까지 선교지를 떠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선교사가 될
수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658년에 세워진 후 아시아에 4500명, 한국에 360여명의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는
부산, 진주, 마산, 목포, 나주 등 남쪽 지방을 두루 다니며 선교를 맡았다. 그의 행적이 가장 뚜렷한 곳은 1902년 파견돼 13년을 머물렀던
제주와 말년을 보낸 대구이다. 그는 1922년 대구가톨릭대 전신인 성유스티노 신학교 교수로 부임해 제3대 교장을 거쳐 심장마비로 눈을 감기까지
대구에서 30년을 보냈다. 안타깝게도 식물학 분류 자료 등을 비롯해 마지막 행적에 대한 기록은 1964년 대구대교구청 화재로 소실돼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나마 그가 제주에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1880~1933년 체류)에게 보낸 18통 등 프랑스어 편지들을 통해 그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저는 권총에 총알을 재고 불한당들이 베르모렐 신부에게 한 것처럼 저를 공격해 올 경우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주교님 편지가 진주에서 마산까지 300리를 가는 데 22일이나 걸렸습니다.’(1899년 7월 28일,
진주)
‘허술한 집 여기저기에 비가 새고 있습니다. 바닥은 땅과 같은 높이여서 위아래로 습기가 차 있습니다. 문 앞에
있는 지붕은 제 어깨까지 내려옵니다. 방안에서는 여기저기 벽 틈을 통해 바람이 들어옵니다. 더구나 그곳을 뱀과 다른 벌레들이 지나다닙니다. 집은
논에서 10m 정도 되는 곳에 있으므로 마을 사람들의 절반이 말라리아 열병 때문에 제게 키니네를 달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교님을 한 번 더 괴롭힐 각오를 하고 말씀드리자면 저는 제가 좀 더 적절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주교님께서 도와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습니다만 저는 1898년 이래 여섯 번째 집에 살고
있으며 이제 일곱 번째 집을 찾고 있으니 제 돈 주머니는 적자일 뿐입니다.’(1902년 6월 27일, 제주)
그가 제주도
서귀포에 파견될 당시는 천주교와 제주도민이 충돌한 신축교안(이재수의 난·1901)으로 선교의 기반이 붕괴된 후였다. 천주교에 대한 여론은
최악이었다. 그는 지역민들 속으로 들어가 밀착형 선교를 펼쳤다. 그는 제주에 온 지 1년 만에 30여명밖에 남지 않은 신자를 130여명으로
늘렸다.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는 특히 돈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저는 돈이 없이 죽어도 괜찮지만 하느님의
대리자로 빚을 지거나 파산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다’라며 주교를 압박하기도 하고, 집을 짓느라 빚을 많이 져서 주교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영세를 받은 어린이들에게 작은 두루마기를 사줄 것이며, 작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야겠다, 교리 공부에 열의가 없는 아이들도 좀
더 격려해야겠다는 소소한 내용도 등장한다.
식물학자 에밀
타케와 왕벚나무
타케 신부는 어떻게 선교사 이전에 식물채집가로 이름을 남기게 됐을까. 사제 중에는 유독 식물학자가
많다. ‘유전학의 아버지’ 그레고르 멘델도 사제였다. 그는 식물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식물채집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06년
이후이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식물학자 포리 신부와의 만남이 계기였다. 제주를 찾은 포리 신부는 그를 데리고 한라산을 누비며
식물채집에 나섰다. 포리 신부를 통해 제주의 자연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포리 신부가 일본으로 떠난 후에도 홀로 한라산 일대를 헤매고
다녔다.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도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하루 8시간 이상씩 풀들을 돌보느라 심심할 틈이
없다.’
‘식물분류가 일인데 포리 신부의 식물도감 덕분에 잘 해나가고 있다.’
‘이대로 풀들을
거두면 1년 동안 1000 내지 2000종류의 풀 또는 잎사귀만이라도 갖게 되리라 기대한다.’
그의 채집 활동은 여러
경로를 거쳐 유럽 각국에 전달됐다. 채집된 표본의 일부는 미국 하버드대 표본관에 목본식물 일부, 영국 왕립식물원 에든버러 표본관에 2500점,
파리 자연사박물관 표본관에 375점, 도쿄대 표본관에 161점이 소장되어 있다. 그의 채집 활동은 20여년간 계속된다. 그가 보낸 새로운 식물
표본들에 유럽 학계는 환호했다. 조선은 그야말로 ‘신종 식물의 낙원’이었다. 1908년 4월 15일, 그는 제주도 한라산 북측 관음산 뒷산에서
자생하고 있는 벚나무(표본번호 4638호)를 발견했다.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제주도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왕벚나무
전문가인 정은주 강원대 교수가 주간조선과의 전화통화에서 설명한 한·일 왕벚나무 논쟁의 전말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왕벚나무는 일본에서 먼저 발견됐다. 1901년 도쿄 우에노공원에 있는 새로운 벚나무가 발표됐다. 일본 학계는
해당 벚나무의 자생지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1912년 타케가 발견한 왕벚나무 표본을 받은 독일 베를린대 쾨네 박사는 두 나무가 똑같은
왕벚나무이고, 그 자생지는 제주도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두 왕벚나무의 유전자가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며 자생지가 없는 이유는 다른 두 벚나무를 접목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김찬수 박사도 목소리를 높인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왕벚나무가 한국산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본 학자도 있고 기록도 있지만
광복 이후 말이 바뀌었다. 현재는 단 한 명도 없다. 일본의 왕벚나무가 제주도에서 가져갔다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왕벚나무 논쟁은 결론이
나기 어렵다.”
일본은 일찍부터 사쿠라 외교를 펼쳐왔다. 미국 워싱턴에서는 매년 벚꽃축제가 열린다. 1912년 일본은
미·일 우정의 표시로 6000여그루의 벚꽃을 기증했다. 그때 워싱턴 포트맥 강변에 심어진 벚꽃 중에는 제주도 왕벚나무도 포함돼 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1943년 이승만의 미국 망명 시절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 내 반일 감정이
팽배했다. 벚꽃을 베야 한다는 주장도 심심찮았다. 그때 ‘왕벚나무는 한국산’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승만이 나섰다. 국회와 언론을 상대로 “일본이
한국의 왕벚나무까지 침탈해가 자신들 것이라고 우기고 외교에까지 이용하고 있다” “‘Japanese Cherry tree’가 아닌 ‘Korean
Cherry tree’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워싱턴 아메리칸대에 왕벚나무 네 그루를 심었다.
2011년 이 대학의
루이스 굿맨 국제관계대학장은 이런 역사를 알게 되자 그곳에 한국 정원을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이 뉴스는 미국 국립수목원 벚나무 연구자로 가
있던 정은주 교수에게도 전해졌다. 정 교수는 DNA 분석을 통해 이승만의 벚나무가 제주산 왕벚나무라는 것을 확인하고 제주도에 있는 김찬수
박사에게도 표본을 보내 확인했다. 현재 1만3000여㎡ 규모의 한국 정원에는 한국 토종수목들과 제주도 돌하르방 등이 있다. 이승만의 왕벚나무도
네 그루 중 세 그루가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다.
정 교수의 설명이다. “타케 신부가 우리나라 식물학에 남긴 업적은
엄청나다. 식물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면서 어려운 식물 분류를 한 것을 보면 남다른 눈을 가졌다.”
제주 밀감의 아버지
타케
신부는 2011년 일본에 있는 포리 신부에게 왕벚나무를 보내고 답례로 온주밀감 14그루를 받는다. 기존에도 재래종 감귤 재배는 했지만 임금님
진상용이었다. 그때까지 잘해야 본전인 감귤농사는 농민들로부터 기피 대상이었다. 타케 신부는 온주밀감이 제주도에서도 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서귀포
홍리에 있는 농민에게 분양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본 일본인이 1912년 서귀포 서홍동에 처음으로 ‘제주과원’이라는 밀감 과수원을
시작했다. 제주도 밀감산업의 시작이었다. 이후 밀감나무는 제주도민의 생명줄이었다. 밀감 농사로 대학까지 보낸다고 해서 ‘대학나무’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우리가 귤이라고 먹는 것이 바로 온주밀감이다.
타케신부기념사업추진위원회 오충윤 회장은 타케의 밀감나무는
제주도에는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왜 밀감나무였을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908년 포리 신부가 왔을 때 밀감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타케 신부의 행적을 보면 사람들이 먹고사는 걱정을 많이 했다.”
타케의 편지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오늘 6주 만에 처음으로 비가 내렸습니다. 보리 수확은 좋지 않았고 비가 적어 기장이
자라기는 어려울 것이니 또 2년째 흉년이 될 것 같습니다. 곡식을 조금도 살 수 없습니다. 올해도 수많은 궁핍한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1902년 7월 20일)
타케 신부가 식물 채집에 몰두했던 것도 경제적인 이유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성당
건립과 선교 활동에는 돈이 많이 필요했다. 당시 식물 표본은 꽤 돈이 됐다고 한다. “교통편도 없고 제대로 된 길도 없던 시절이다. 걸어서
항구에서 묘목을 받아 얼마나 힘들게 옮겨왔겠나. 한라산을 누비며 또 얼마나 고생했겠나. 그 모습을 상상하면 안타깝고 너무 늦어 미안하다.”
오충윤 회장의 말이다.
타케 신부 알리기는 이제 시작이다. 지난해 대구와 제주도에서 기념사업 추진위가 발족했다. 타케
신부의 왕벚나무를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고 화폭을 통해서도 타케 신부가 살아났다. 지난 1월 22일까지 대구 범어동성당 드망즈 갤러리에서는 정미연
작가가 타케 신부의 일대기를 내걸었다. 정 작가는 “받은 자료는 희미한 사진 두 장과 편지 몇 통이 전부였다. 그분의 삶 속으로 들어가 따라가다
보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고 말했다.
대구에서는 정홍규 신부가 앞장서고 있다. 정 신부는 먼저 대구신학교 내에 타케
신부의 작은 박물관을 만들고, 오는 4월에는 왕벚나무 사진촬영대회를 계획 중이다. 프랑스에 있는 타케 신부의 고향에 왕벚나무도 심고 싶다고
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타케 신부를 주인공으로 한 독립영화를 만드는 것도 고민 중이다. 일본은 초·중등학교 교과서에 사쿠라 노래가 있는데
우리도 왕벚나무 노래를 만들자는 것이 정 신부의 생각이다.
제주를 맡고 있는 오충윤 회장은 오는 4월 대구에서 열렸던
정미연 작가의 전시를 제주도에 유치하고 타케 신부의 두상을 제작하고 있다고 했다. 오는 11월에는 한논성당순례길을 ‘타케 신부의 거리’로 선포할
예정이다. 또 ‘면형의 집’ 1만㎡(3000여평)에 타케가 발견한 식물들을 모두 모아 타케의 식물정원 조성도 추진한다. 장기 계획으로는 기념관
건립이 목표다. 이를 위해 재일동포 좌옥화씨는 1억여만원을 쾌척했다.
120년 전 가난한 조선 땅을 밟은 젊은 사제는 이
땅에 자신의 모든 것을 묻었다. 대구대교구를 비롯해 그의 부임지에 심은 왕벚나무는 올해도 눈부시게 화사한 봄을 피워낼 것이다. 우리는 그를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그가 남긴 선물은 여전히 우리 옆에 있다. 그 선물에 대한 보답은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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