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별 마2:1~12절 2022.12.25. 성탄절 주일오전
* 유대인의 왕
2절에“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려 왔노라 하니”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헤롯과 예루살렘이 소동하게 됩니다. 헤롯은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의 아기를 다 죽이는 악을 드러냅니다. 그동안 잠잠한 예루살렘이 동방 박사들의 등장과 그들이 전한 유대인의 왕의 탄생의 소식을 전파함으로 그동안 수면아래 가라앉았던, 인간의 더럽고 사악함의 정체의 그 실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온 삶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 욕심과 욕망이 충동질 하는 사단의 지배하에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여 헤롯과 유대나라 지도자들을 만나게 하셨을까요? 죄악으로 병든 종교 의식아래 숨겨놓은 그들의 죄를 폭로하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성전은 왕상9:3절 여호와의 이름이 있고 여호와의 마음과 눈이 머무는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도 단6:10절 이곳을 향해 기도하며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희망이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예루살렘은 인간의 욕심과 야망으로 가득한 강도의 소굴로 변한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입니다. 이렇게 자기 사명을 망각하고 사단에게 사로잡혀 죄악이 판치는 캄캄한 예루살렘에 의의 태양의 밝은 빛이 비취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 오셨음이 선포하게 됩니다. 이제라도 깨달아 이분을 자신의 왕으로 맞아드리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참교회가 되며 그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 죄악으로 뭉쳐진 내가 왕
그런데 지금 동방 박사들의 메시지에 의하면 이러한 야심에 사로잡혀 사는 내가 왕이 아니라 나의 왕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즉 헤롯은 유대나라 왕이 아니라 유대나라 왕은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 된 분이고 그 약속의 성취자로서 지금 탄생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유대인의 왕이 어디 계시느냐고 지금 묻고 계십니다. 즉 ‘너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느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헤롯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처럼 우리 자신들도 왕이 아닌 자를 왕으로 여기고 잘못된 허상의 꿈을 꾸며 자신만의 이상적인 왕국을 상상하고 그리며 살아왔습니다. 나만을 위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해서 힘을 가진 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환상을 그리며 자기가 중심이 된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이 되었다고 해도 순식간에 생을 마치고 죽음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 세상은 거짓으로 왜곡과 갈등과 다툼밖에 없습니다. 있다면 온갖 질병과 고통으로 인한 눈물과 한숨 뿐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충동으로 자기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 세상의 비극이고 헛된 허상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세상은 사망의 권세에 장악되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조건도, 헤롯과 같은 대단한 권력도, 찬란한 영광도 죄악이 만들어 낸 사망의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아침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과 같은 순간의 영광이고 기쁨인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의 영광도 그 내용은 고통과 가시가 동반된 무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헛된 꿈에 부풀려 자신의 야욕에 사로잡혀 있는 예루살렘에 진정한 영광의 나라를 세우실 왕이 오신 것입니다.
* 의와 생명을 선물하실 왕
예수님은 헤롯처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다른 자를 해하고 죽이는 그러한 왕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의 희생으로 피 뿌림을 통해서 의를 생산하고 생명을 창조하는 왕이십니다. 이러한 왕만이 죄를 끝내고 고통과 죽음을 몰아 낼 수가 있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도 왕이 아니고, 나 역시 왕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자기 영광을 꿈꾸는 사단의 유혹에 의한 죄악으로 헛된 꿈이고 망상입니다. 진정한 왕은 십자가에 피 흘려 의의 나라를 세우시고 영원한 생명을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지배와 통치를 받을 때만 참된 평안이 있고 생명이며 영원한 영광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별을 잃어버린 예루살렘
동방의 박사들과 예루살렘에 존재하는 유대나라 지도자들과의 차이점이 뭘까요?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유대나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유가 뭡니까? 동방박사들에게는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별이 있었고, 유대인들에게는 인도할 별이 없었던 것입니다. 분명이 예루살렘이란 곳은 하나님의 약속의 중심지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즉 율법의 중심은 성전이고, 그 성전의 중심은 죄인을 대신해서 죽는 희생양의 피가 있고, 이 희생의 피가 제시하고 가르쳐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 입니다. 이것을 말씀이라 하고 또는 율법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께로 인도할 말씀이 없었던 것입니다.
죄악으로 캄캄해진 이 세상에서 말씀은 그 빛을 잃지 않고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빛나는 별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은 나를 의, 이시고 생명이시는 왕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캄캄한 세상을 비추는 별인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찾아온 동방박사들은 유대나라 지도자들에게 2절에서 이러한 말을 합니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합니다. 그리고 9,10절에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합니다. 즉 이들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은 그리스도를 담아 놓은 하나님 자기 계시입니다. 그리스도를 별로서 그려 그리스도를 왕으로 설명한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이 가르치는 그리스도가 죄인들의 용서이고, 죄인이 의롭게 되는 조건이고, 영원한 생명이고, 해보다 더 빛나는 영광이 왕이신 그리스도라고 말씀이 가르쳐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 말씀이 즉 빛을 발하는 별인 것입니다.
* 형식에 불과했던 말씀
4절의 말씀에서 헤롯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렇게 유대나라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가 나실 곳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이 말씀은 마음과 정신을 붙드는 능력의 말씀이 아니라, 머리로 아는 이론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자기들의 배를 위해서 종교의 제도를 만드는 도구였고, 자원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 귀한 말씀을 오로지 자기 육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거룩하고 엄숙하게 보이기 위해서 계명을 옷깃에 달고 다니고, 또 백성들의 피와 같은 재물을 빼앗기 위해서 감언이설로 엄숙한 말씀이라 하면서 십일조와 헌물을 탐해서 자칭 말씀의 선생노릇을 한 것입니다.
율법이란 그릇 속에 담아 둔 내용은 버리고 형식만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22:34~40절의 말씀에서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으니 예수님은 37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시고 또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시면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십니다.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버려 죄인의 죄를 용서하여 끝내시고 의를 입혀 하나님의 세계에 동참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죽을 이유가 없는 거룩한 분이 죽어 죄인을 살리겠다는 정신입니다. 즉 나는 죽고 너는 살리겠다는 십자가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사랑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라면 그 사랑이 보여지고 증언되는 하나님의 희생을 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한 분의 희생으로 내가 살았다는 의미가 십일조이고 안식의 제도이고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 은혜가 감사해서 마음과 뜻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대우하는 별이 보여준 의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