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렸을 때는
우리가 어렸을 때
겨울에는 너무나 추웠다.
아무리 추워도 학교 갔다 돌아오면
구슬치기, 딱지치기로 과외(課外) 공부하였고
우리의 과외 학원은 동네 골목 아니면
동네 마당이었다.
장갑이 없어 손등이 터지고 갈라져도
우리는 과외 공부에 너무나 충실했다.
우리의 과외는 너무나 재미있어
웃고 떠들고 ...딱지를 잃으면 속이 상했고
따면 신바람이 나서 휘파람을 불었다.
어두워지면 아쉬워하며 끝나는 과외공부.
여름에는 마포나루 아니면 난지도로 원정 가서
수영하고 고기 잡는 학클베리핀이 되곤 하였다.
너무나 재미있는 특수 과외시간이었다.
겨울이면 꽁꽁 언 한강에서 썰매로 달리고
그리고 나서 마시는 오뎅 국물에 나는
행복하였다.
국민 학교 5학년 때 친척 형이 사준 만두!
세상에 이런 맛도 있었는가! 먹으면서 탄성을 연발했다.
그것은 설에 엄마가 해준 만두와 또 다른 맛이었다.
국민 학교 6학년 때 충무로 수도극장에서
“아라공”이라는 총천연색 영화를 단체 관람하였다
화려한 군복을 입고 대오도 정연한
나쁜 편인 나폴레옹 군대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선생님들이 ‘박수 치지 말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래도 우리는 화려한 군복에 멎진 총검을 가진
나폴레옹 군대만 나오면 박수를 쳤다.
이것이 또 다른 우리의 필수적인 과외공부였었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전차를 타고 신설동에 가면
경마장 하던 자리에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
우리는 철망 밖에서 그걸 보고 참으로 신기해하였다.
잘 먹지 못하여 얼굴에 도장 부스럼이 나고
머리에는 기계충이 먹었어도
우리는 늘 웃었고 늘 뛰었다.
이 때 우리의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일등이었다고 지금도 나는 확신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입어 본 교복
광목으로 된 그 교복의 향기에 나는 취했다.
교복 목 한 쪽에는 마름모 꼴의 배지,
반대쪽에는 하얀 학년표시 금속 핀.
군모를 닮은 흰줄 친 교모(校帽)
이것들은 우리에게 일체감을 심어주고
남에게는 찬탄의 대상되는 멋진 상징이었다.
하교하면 친구 집에 놀러 갔고
하교하면 성남극장 아현 극장에 “학생불가“
영화만 골라서 보았다. 예고편은 왜 그렇게 재미있던지...
그놈의 예고 편 때문에 가고 또 가고 ....
주말(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까지)이면 반 대항
야구를 광화문 공터(지금의 미국 대사관 뒤편)에서 하였다.
같이 하던 면면 중에서 몇몇은 지금도 기억 난다.
또 동네에서도 친구들하고 야구하고 축구하고....
학교만 끝나면 가지가지 레퍼터리 과외가 우리를 기다렸다.
이 때도 우리의 행복지수는 세계에서 일등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고 2 때 까지 주말이면 등산 다녔다.
도봉산, 백운대, 불암산, 수락산, 관악산, 속리산등
천막은 미군의 일인용 A 텐트, 그릇도 모두 미군이 쓰든 것들.
산에서 해 먹던 된장찌개 지금 생각해도 침이 저절로 넘어간다.
친구 집에서 듣던 팝송들 – 낫킹콜의 Too Young 닐 세다카의 One way ticket, 폴 앵커의 Diana, 에디 피셔의 Oh, My Papa 등 주옥같은 노래들을 듣고 따라 불렀다.
여름 방학에는 대천 해수욕장 가는 초만원 기차에 올랐다.
해수욕한다는 설레임으로 콩나물시루 기차가 불편한 줄 몰랐었다.
끼가 있는 아이들은 여학생들과도 어울려 잘도 놀았다.
극장가서 들키면 - 우리 학교 선생님은 물론 타교선생님에게 들켜도 -
정학을 맞고 아주 고약한 짓을 하면 정학도 맞고
퇴학도 당하고 공부를 아주 못하면 낙제도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벌칙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당해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선생님들 권위가 작두 날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3 되어서야 노는 것을 미루고 공부에 매달렸다.
대체로 열심히 하였지만은 농땡이들은 하지 않았다.
빡빡 대가리를 면하게 된 대학생활. 그것 하나로도 우리는 자랑스러웠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을 마시고 고교동창 모임에서 술을 또 먹고 친한 친구들끼리 술을 또 마시고.... 대학 생활은 술로 시작되었다.
당구도 치고 극장도 당당히 갔다.
어떤 때는 무서운 교수에게 따귀도 맞았었다.
교수라면 워낙 까마득한 존재여서 아무리 부당한
취급을 받아도 항의 한 마디 못하고 보낸 대학생활이었다.
우리 때는 토익도 없었고 토플도 없었다.
우리 때는 어학연수라는 단어도 없었다.
우리 때는 아르바이트 할 일거리도 없었다.
우리 때는 “가정교사”가 유일한 아르바이트.
많은 학생들이 이 직업에 아그그 매달렸다.
졸업하면 취직할 곳이 없어 심한 경우 독일 광부로 팔려갔다.
우리 세대는 이때가 가장 암울하였다.
1960년 대 중반 수출 붐이 일어나며 우리는 취직했고 월급을 타고
결혼도 하였다. 3년 내지 5년 고생하면 집도 한 채 생겼고 처 자식
먹여 살리는데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요즈음 젊은이들이어
그대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공고육 과 사교육(학교 갔다 오면 학원에 가는 비극)을 받으면서 우리처럼 자유 분망한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우리는 참으로 신나게 놀면서 학교생활 하였는데 그대들은 그야말로 “All work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일만하고 놀지 않으면 사람은 바보가 된다.” 일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처럼 사(私)교육이 없는 때가 언제나 올까?
선행학습, 입시위주 교육이라는 적폐가 언제나 사라질까?
선생님이 학생에게 체벌을 주면 학부모가 달려와 선생님을 두들기고
무릎을 꿇게 하고 선생님이 체벌을 주면 오히려 달려들어 선생님을 두들기고 선생님이 체벌주면 119 범죄 신고하는 초등학교 학생.
교복자율화 두발 자유화 연애해도 오케이 안 해도 오케이.
퇴학도 없고 정학도 없고 낙제도 없고
이게 유흥가지 어디 학교란 말인가?
그래서 자기들 직업이 안정적인데 만족도는 낮다고 하는 선생님들 한탄.
좌파 교육감이라는 자들이 들어와서 학교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학부모들 사고가 바뀌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대학교에서도 학생에게 야단치면 총장에게 이 메일 넣어 야단친
교수를 씹으면 총장은 교수를 불러 “왜 시끄럽게 합니까?”라고
오히려 교수가 야단을 맞아 학생들에게 벌벌 긴다는 얘기.
성적이 나쁘게 나오면 교수에게 따지는 거지 같은 학생.
기저귀 찬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수백만 원하는 교재를 산다니
막 무가내로 산다니 이거 정말 큰일이 나고 말일 아닌가. 네가 사면 나도 사고...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에게 한 달에 수백만 원씩 내고 영어를 배우게 하는 젊은 엄마들.
월 300 만원 주고 들어가는 재수생들의 기숙학원은 재수생 수용소.
미국에서 년간 1억 씩 쓰고 영어는 배웠는데 취직을 못하여 귀국하고
있다는 얘기. 한국에서도 기러기 아빠네 아이들은 채용하지 않는다니
이 무슨 낭패? 기러기 아빠가 실망하여 자살하면 어쩌나?
젊은이들이어, 현실을 직시하자. 우리가 야생에서 큰 들풀이라면
그대들은 실내에서 자란 화초라는 것. 그대들의 허영이 나라를 좀 먹는다는 것. 유모차도 150 내지 250 하는 것만 고집한다니 이 무슨 허영?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사람들이 영어를 아주 잘 하는 것은 기러기 아빠가 아니라 중2부터 영어를 배우는데 영어를 잘하는 선생님들이 영어로만 수업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 나라 영어 선생님 중 몇 명이나 영어로 수업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이어 비싼 영어 유치원 보내지 말고 기러기 아빠 만들지
말고 시위를 해서라도 실력 있는 영어 선생님을 모시는데 사력을 다하라.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대들 자녀들에게 숨을 쉴 틈을 만들어 주라.
첫댓글 우리네가 살아온 지난 세월과 오늘의 현실을
조목 조목 구석 구석을 재밋게 그리셨네요.
어쩌면 내 과거를 몰래 훔쳐본 영상 같네요.
강가에서님 글을 읽으며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지네요.

우리 그사람 한데 들었던 얘기가 구절마다 서려 있으니


동네에서 구슬치기 하다 늦게 들어와 큰형한데 야단 맞은일
여름이면 마포나루에서 수영 하던 일 , 팝송은 자기가 제일 잘 불렀다고
자랑하던 일 ,변우섭씨랑 정남인 둘이 극장가서 선생님한데 들켜서
정학 맞은일. 이야기 하며 낄낄대고 호탕하게 웃던 모습이 선하네요
옛날 일을 또 하고 또 해도 질력이 안나게 재미 있는지 ... 지금 그 음성 들을 수 없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요. 그 친군들 채송화씨 생각 않나겠읍니까!!!
고이민현님....참 오래전 얘기지요? 님도 나처럼 농땡이었나요?
채송화님....남인이와는 국민학교 3학년 까지 다녔지요. 625지나고 갈라셨지요.
사람 좋은 남인 눈에 선 합니다. 친구 경조사에 빠지지 않았지요
요즘엔 전혀 찾아 볼수 없는 게 자치기, 구슬치기, 잠자리 잡기 등이였는데 숫잠자리 등에다 암놈처럼 호박가루로 노랗게 물들여 줄에매어 날리면 다른 숫놈이 암놈인줄 알고 달려들다가 잡히곤 했지요.
궁핍한 시대를 산 우리 세대가 풍요를 만끽하는 요즘 아이들보다도,
사실상 더 아름답고 더 소중한 것들을 더 많이 가졌었던 건 아닌지.^^
우양님...아이들이 학원에 가느라고 집 밖에 나와 놀지 못하는 나라가 여기입니다.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uncleavan님...그렇지요 자치기 구슬치기는 우리의 권리였고 우리의 과외였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탄광같은 학원에 가느라 진짜 과외는 구경도 못합니다.
됫메님...그렇습니다. 우리가 더 행복했고 우리가 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강인하고
우리가 더 똑똑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초석이 되었으나 지금 돌아가는 꼴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입니다.
. . . ㅎ ㅎ, 그때 우리(나)는 과외 공부라는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 참, 옛날 얘기들입니다.
그 옛날 (Good Old Days) 를 생각하면 요즘 아이들이 불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