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 권사 /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구원파는 최근에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유병언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과 그 분파인 이요한 계열(생명의말씀선교회, 예수교복음침례회), 그리고 박옥수 계열(기쁜소식선교회, IYF) 등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요한 계열과 박옥수 계열이 자신들은 구원파가 아니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반론보도를 올리고 있으며, 인터넷 홈페이지에 전화를 걸어서 글을 내리지 않으면 법적인 고발을 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다. 물론 필자도 그와 같은 전화를 받았다. 이요한 계열과 박옥수 계열은 세월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두 계열은 유병언 계열과 함께 구원파의 3대 훼밀리이다. 그들은 서로 뿌리와 유래가 같고 유사한 교리를 갖고 있는 구원파이다. 기독교 정통교단의 이단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이 세 개의 계열이 모두 구원파라고 공식규정하고 있다.
먼저 이요한 계열의 구원파의 교리에 대해서 권신찬(유병언) 계열의 주장과 비교하여 보자.
1. 이요한 구원파의 구원관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6-29) .
이요한 계열 구원파는 마가복음 본문을 인용하여 구원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즉 영혼의 구원, 생활의 구원, 몸의 구원이라고 하는데, 싹은 영혼구원을 상징하며, 이삭은 성품구원 혹은 생활의 구원을, 곡식은 육신의 구원 혹은 몸의 구속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씨를 심어놓고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즉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생명이 움터서 자라고 결심한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는 말씀은 세 단계의 신앙생활의 과정을 이르는 것이다. 이 단계를 달리 표현하면 싹은 십자가에 죽어서 주님이 이루신 은혜로 말미암아 받는 영혼구원을, 이삭은 구원받은 그날부터 주님 앞에 가는 동안 우리의 마음과 생활이 변화되는 성품구원 혹은 생활구원을, 이삭에 충실한 곡식은 주님 오실 때 우리의 육신이 주님처럼 당장 변화되는 육신의 구원 혹은 몸의 구속을 의미하는 것이다.”(<구원의 삼단계>, 이요한, 생명의말씀선교회, 2002년, 6쪽)
이요한씨가 가르치는 소위 삼단계 구원관은 권신찬씨에게로부터 배운 것이며 모방한 것이다. 극동방송에서 팀선교회를 할 때에 권신찬씨로부터 첫 번째 안수를 받은 사람이 유병언씨이며, 두 번째 안수를 받은 사람이 이요한씨이었다. 다만 권신찬씨는 지방교회와 같이 영의 구원, 혼의 구원, 육의 구원으로 분류했지만, 이요한씨는 영혼의 구원, 생활의 구원, 몸의 구원으로 용어만을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혼, 즉 마음은 세상을 좋아합니다. 구원을 받았더라도 세상의 쾌락, 돈 같은 것들을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혼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해가는 중에 차츰 육적인 생각이 약화되어 가서 나중에는 순전히 육신의 생각을 가지던 마음이 영으로 기울어져 하나님께 대한 주님께 대한 생각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영의 구원을 받고 난 뒤 세상을 향하던 그는 마음이 차츰차츰 힘을 잃어가면서 마음이 주님께 가게 되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해 갑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육신이 들림 받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아직도 세상을 좋아하는 육신의 마음과 욕망이 있다면 아직 자기 혼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개 혼이 구원받는 과정은 상당히 오래 걸립니다. 굉장히 시달림을 받고나서 나중에 어떤 말씀을 깨닫게 될 때에 다시 한번 벗어지는 것이 있고서야 영의 생각을 가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일정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말합니다.”(<믿음으로 믿음에>, 권신찬, 기독교복음침례회, 23쪽)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본문과 전혀 다른 이상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마가복음 본문은 인간의 세 가지 단계의 구원의 과정을 분류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이기 때문이다. 성경본문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저절로 자라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로서,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하며,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라고 말하고 있다. 즉 씨를 뿌린 농부는 오직 씨를 뿌렸을 뿐이며,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그 나라를 지상에서 확장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정리하여 말하자면 성경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마가복음 4장 26-29절은 영혼육의 세 단계의 구원과정을 각각 구별하는 내용이 아니며,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로서 아무도 모르게 저절로 자라나는 과정, 즉 단계적인 구별이 없는 과정을 의미한다.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성경구절이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2) 본문은 인간의 구원의 단계를 구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이다. 마가복음 4장과 병행되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도 모두 하나님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의 비유로써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이다. 마가복음 본문 바로 뒤에 기록된 구절도 겨자씨와 같은 작은 씨로부터 크게 성장하는 나무에 대한 내용으로서 진행적이며 확장적인 하나님나라를 비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요한 계열 구원파는 본문으로 세 단계의 구원으로 분류를 하여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죄가 없다”고 주장하며, “육체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며 죄가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전인적인 인간의 영과 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사상을 성경적으로 짜맞추기 위하여 전혀 관계가 없는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 자신이 스스로 깨달음으로서 그 시간에 이미 거듭났으며,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요한 측은 싹의 과정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죄 용서함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이 시작된다”(<구원의 삼단계>, 이요한, 생명의말씀선교회, 7쪽)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마가복음 본문은 깨달음의 어느 시간이나 각각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뿌려진 씨가 저절로 자라나서 곡식이 되는 것과 같은 하나님나라의 과정을 말한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도래하였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비유를 한 것이 마태복음 13장과 마가복음 4장에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 4:26-29에 있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는 마태복음에 없는 내용이지만 마태복음 13장24절 이하에서 밭에 뿌려진 씨로부터 저절로 자라나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같은 유사한 내용은 있다.
심지어 이요한 구원파는 마태복음 13장의 여자가 가루 서말에 누룩을 넣은 비유에 대해서 가루 서말을 삼위일체로 비유풀이를 하는 황당한 해석을 하며, 누룩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다른 교훈을 넣은 것이라고 비유를 하고 있다. 실제로 이요한씨의 삼위일체관은 정통삼위일체가 아닌 이단적 양태론을 추종하고 있다. 이요한씨는 교회에서는 목사, 집에서는 여보, 자녀들에게는 아버지가 된다는 전형적인 양태론을 삼위일체라고 가르쳤으며, 삼위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렵다고 가르쳤다.
마태복음 13장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가루 서말에 넣은 누룩에 대한 비유와 함께, 아주 작은 겨자씨가 새가 깃드는 큰 나무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비유는 하나님나라가 성장하고 확장하게 된다는 비유를 뜻한다. 마 13:33은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이라고 말한다. ‘가루 서말’이라는 분량은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가정의 하루 식량이었으며, 누룩을 넣어 전부 부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확장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마가복음 4장26-29절도 씨를 뿌린 것이 저절로 자라나서 곡식을 맺게 되어 추수를 하게 된다는 예수와 함께 지상에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확장에 대한 비유이며, 그것을 구원의 삼단계로 변질시켜 해석하는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렇게 성경을 자신들 교리에 짜 맞추는 해석은 이단들의 상용수법이다. 특히 이요한 계열의 성경해석은 아무도 공감할 수 없는 황당한 해석이 많다. 그 한 예를 들어보자.
“주님이 명하신 대로 제자들이 남은 음식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이와 비슷한 사례로 4,000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떡을 만들어 먹이신 이적은 두 번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다섯이라는 숫자는 죄인을 가르키는 숫자로 여러 번을 사용되고 있으므로 아마도 5,000여 명은 주님 앞에 있는 죄인의 모습을 가르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넷이란 숫자는 고난 혹은 세상을 가리키는 숫자이므로 4,000여 명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5,000명을 먹이시고 남은 열두 광주리와 4,000명을 먹이시고 남은 일곱 광주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 사건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남은 열두 광주리와 일곱 광주리는 먼저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후에 이방인도 구원의 은혜에 참여해 일곱 교회시대가 형성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 이요한, 생명의말씀선교회, 269-270쪽)
과연 4000명의 4가 고난과 세상을 뜻하며, 5000명의 5가 죄인의 모습을 뜻한다고 생각이 되는가? 또한 열두 광주리의 12이 이스라엘의 구원이고, 일곱 광주리의 이방인의 일곱 교회를 비유한다고 생각이 드는가? 또한 열두 광주리와 일곱 광주리가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방인의 교회의 순서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