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二重잣대 / Double standard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심화되는 주요 이유의 하나다. 주장에서 논리적 일관성의 결여상태이다. 스스로(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 넓게는 자신이 지지하는 대상)에 대해서 객관적 판단력을 상실한 점에서 선민사상, 또는 교만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쉽게 말해 "나(또는 우리 OO, A)는 해도, 너(혹은 B)는 안 된다." 같은 것이다. 나(혹은 우리 OO, A)는 어떤 짓을 했어도 문제가 없지만, 남(혹은 B)이 그런 행동을 하면 상종못할 인간, 신뢰할 수 없는 인간, 부도덕한 인간으로 매장하려는 말과 행동들이다.
내로남불 역시 이중잣대의 한 유형으로, '나(또는 우리)는 해도 너는 안 된다.'라는 오직 자신 또는 자신네로 한정되어 있지만, 이중잣대는 자신을 포함하지 않은 자신네나 제3자에게도 쓸 수 있다. 따라서 '내로남불⊂이중잣대'다. 다만 일상에선 내로남불이란 용어가 남발되듯이 사용되어 이젠 거의 동의어 취급받는다.
2. 특징
저지르기 아주 쉽고 악용하기도 쉬운 논리적 오류의 하나로, 동일한 사안에 정반대의 평가를 하는 행동 또는 태도를 말한다.
흔히 말하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라는 말이 이 이중잣대 상당수를 비꼬는 것이다. 1990년대에 한국 정치권에서 등장하여 인터넷 전체로 확산된 단어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람의 본능 중 하나로 본다. 사람은 본래 주관적인 존재이므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의적으로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단하여 생기는 모순점이 이중잣대가 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자아보다 이득과 손해를 판단하는 자아가 강할 경우도 발생하기 쉽다.[1] 그렇다 해서 이것을 반드시 이해해줘야 될 의무는 없다.
'융통성'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 단어 또한 사실상 이중잣대의 한 가지 예시에 속할 수도 있는 형편이다. '융통성'과 '제멋대로'의 경계는 사실 모호하다. 또한 이중잣대는 명확한 사실이 존재하거나 명확한 규칙이 있는 일에는 당연히 적용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나 현실, 사이버를 막론하고 성문법이나 명확한 사실이 있다고 해도 사람이 이를 관찰하는 이상 이중잣대가 없을 수는 없다. 보통 양쪽이 이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제3자가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이면 '융통성'이라고 한다.
개인 사이의 관계에서 이러한 이중잣대는 큰 상관이 없는 것이 보통이지만, 집단 대 집단으로 이러한 일이 생기면 인지부조화와 조합되면서 부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친목 때문에 형성된 커뮤니티는 명확한 성문법이 없는 경우가 잦고 그 기반적인 체제가 친교이기 때문에 이중잣대의 함정에 쉽사리 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명확한 규정이 없다 하더라도 커뮤니티의 규모가 작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규모가 꽤 커지면 각양각색의 사람이 들어오기에 소속원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이는 친목질이 무서운 이유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고, 모든 일정 규모 이상의 커뮤니티에서 항상 주의해야 하는 점이다. 특히 공정함이 요구되는 운영진은 더욱 그렇다.
나무위키의 문서에도 여러 입장을 가진 수정자가 충돌하는 만큼 얼핏 보면 이중잣대를 함유하는 듯한 서술이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성적인 내용이 한국 드라마와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때,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인다. 설령 규제가 들어와도 문화탄압이라면서 규제한 쪽을 비판한다.
위키위키의 특성상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똑같은 문단 등을 집중적으로 수정하다 충돌하는 경우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왜 서로 모순되는 입장을 적어놓았냐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다.[2]
다만 이 부분에는 대해서 기본적으로 사회적 시선 자체가 이중잣대에 가까운 점도 감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돌 팬과 오타쿠는 대상만 다를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같음에도 전자는 '젊은 날의 치기' 정도로 봐 주는 반면, 후자는 '사회 부적응자' 등의 부정적인 시선의 대상이 된다. 이런 짤도 있다.[3]
이중잣대의 예로는 진영논리, 국수주의-배타주의, 사대주의, 선민사상, 성차별처럼 엄청나게 많다. 사실 사람도 어쩔 수 없는 동물인지라 찾으려고 작정하면 셀 수도 없고, 모든 역사에, 모든 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간의 정보처리능력은 한계가 명확하고, 사람은 논리가 아니라, 진영과 감정에 따라 틀린 것을 맞다고 선동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점심에 짬뽕 먹을지, 짜장면을 먹을지조차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지 않는가.
사실 원래 이중잣대는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고 이에 대한 비판은 '당위'이니만큼 현실을 근거로 당위를 부정할 수는 없다. 뇌물관행이 현실(의 일부)이라고 뇌물관행을 옹호할 순 없고, 사회범죄가 현실(의 일부)이라고 해서 범죄를 옹호할 순 없듯이...
또한 개인이나 단체의 가치판단을 전부 이중잣대로 매도하는 것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살인자를 상대로 욕하는 사람 더러 "사형 집행자도 결국 살인인데 왜 욕을 안 하냐, 이중잣대냐."라고 하는 건 옳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4] 결국 이런 경우는 그 사람의 가치판단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전부 '이중잣대'로 부를 수는 없다. 이중잣대는 '주장에서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상태'인데, '어떤 주장이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것' 자체도 논쟁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헷갈리기 쉬운데, 비슷한 상황을 다르게 판단했다고 무조건 이중잣대라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살인에 대하면 언뜻보면 살인은 무조건 나쁘다고 해야지, 어떤 살인은 비난하고 어떤 살인은 옹호해주면 이중잣대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으로 인식하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살인'과 문자 뜻 그대로의 '살인'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오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후자의 의미에서 본다면, 사형 제도나 상대를 정당방위로 죽인 것 등도 따지고 보면 살인인데, 이것들도 모두 부정해야지만 이중잣대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군인들도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니 모두 살인자라며 비난해야 옳을까? 물론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식으로 위의 사항들도 나름대로 논란이 되긴 하지만, 결국 이런 가치판단에 관한 것들을 모두 이중잣대라 할 수는 없다.
개그콘서트의 前 코너 고집불통에서는 임우일이 친한 사람에게만 규칙을 눈 감아주는 등의 이런 이중잣대를 풍자한다.
한편, 이렇게 이중잣대의 논리가 외적으로 발휘될 때에도 문제지만, 내적으로 발휘될 때에도 상당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해.", "하지만 내가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미친 듯이 노력하는 걸 누구도 알게 해서는 안 돼."라든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해.", "그런데 살이 좀 쪘고, 피부가 좋지 않으니 헬스장에 다니고 피부관리 좀 받아야겠어."라는 식의 이중잣대가 우리 마음 속에 내재되고 있다.
이러한 내면의 이중잣대는 외부의 시선을 우리 마음 속에 내면화하면서 형성되며, 이중잣대에 갇히면(double binded) 행동에 큰 제약이 따르며, 어떠한 행동을 해도 자괴감에 빠진다. 이러한 자괴감은 결국 어떠한 행동도 포기하는 무기력증과 우울감으로 이어지기에 경계해야 할 것이다
.
가끔씩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비판 또는 문제점을 상대방의 이중잣대로 들어 합리화하려는 경향 또한 존재한다. '남들도 하는데 나는 왜 욕을 먹냐' 식이다. 이쪽은 피장파장의 오류로도 볼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군중에 호소하는 오류나 은밀하게 감춰진 한정어의 오류가 될 수도 있다. 이중잣대의 문제점을 들이대지만 자신의 잘못 또한 별것 아닐 수도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 점에서 결국 이것도 논리적 오류이다.
이중잣대와 피장파장의 오류는 비슷한 양상을 보여 헷갈리기 쉽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구분하면 헷갈릴 일이 적어질 것이다.
이중잣대는 '분명히 같은 선상에서 다룰 문제를 다르게 가지고 다루는' 오류이다. 예를 들어, A의 잘못을 비난하면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B는 옹호한다면, 또는 A의 잘못은 대중들이 비난하면서 B의 똑같은 잘못은 딱히 대중들이 비난하지 않으면 이중잣대가 된다.
피장파장의 오류는 '별개로 가지고 다룰 문제를 같은 선상에서 다뤄야 하는 것처럼 왜곡하는' 오류이다. 예를 들어 B를 옹호하기 위하는 명백한 의도가 보이면서 'A도 잘못을 저질렀는데 왜 B만 가지고 그러냐'라고 하면 피장파장의 오류가 된다.
다만 여기서 고려할 중요한 점은 "B의 잘못만 가지고 무어라 하느냐? A도 비슷한 급이나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는데.”라고 하면서 “B도 잘못한 건 인정한다. 하지만 양쪽 다 비판되어야지, 한 쪽만 이중잣대로 옹호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식의 주장을 한다고 치면 이것은 B의 잘못을 비판하는 이들이 특정 인물을 차별하는 옳지 못한 행동이므로 논리적으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먼저 말하기를 B의 잘못은 인정하므로 B의 잘못을 희석하려고 하는 물타기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기도 어려우니까.
어떻든 두 오류는 결국 '자기가 선호하는 것을 옹호하기 위 또는 '자기가 선호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기 위하러' 쓰이는 점에서 거의 같은 양상을 보이지만, 그 방식에 차이가 있다.
'이중잣대'는 정제된 전문 용어가 아닌 점에서 '귀인 오류'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탓이 '이중잣대'를 '귀인 오류'로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나, '귀인 오류'는 이중잣대보다 더 좁은 개념이다. 즉, 조건이 몇 개 더 들어가 있다. 또, '귀인 오류'는 말 그대로 귀인을 범해서 오류가 되었다는 뜻이지, 귀인 자체는 오류가 될 수 없다.
5. 예시
아일랜드의 어느 항구 도시의 사창가에 두 명의 수병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신교 목사 한 명이 주위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사창가로 들어갔다. 그러자 수병들은 위선자라고 목사를 비웃었다. 잠시 후에 랍비 한 사람이 나타나서 역시 주위를 살피더니 사창가로 들어가자 수병들은 역시 유대인들은 어쩔 수 없다고 비웃었다. 잠시 후에 가톨릭 신부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사창가로 들어가자 수병들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세상에. 어떤 가엾은 매춘부가 죽어가나봐."[5][6]
- 엉뚱한 철학자의 이야기에서 발췌[7]
한 남자가 뉴욕에 있는 센트럴 파크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한참 걷고 있던 중에 불현듯 한 소녀가 무서운 맹견에게 쫓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마침내 남자는 어렵사리 맹견을 죽이고 소녀를 위험에서 구해냈다.
마침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이 용감한 시민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진정한 영웅입니다! 저는 신문사의 기자입니다. 내일 아침 신문에는 '용감한 뉴욕 시민이 위기에 처한 소녀를 구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게 될 것입니다. 꼭 봐주십시오."
그러자 소녀를 구한 남자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뉴욕 시민이 아닙니다."
당황한 기자가 다시 물어보았다.
"그럼 당신은 도대체 어디 사람입니까?"
"저는 파키스탄 사람입니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이슬람 과격단체의 일원으로 보이는 신원 미상의 남자가 무고한 미국의 개를 잔인하게 죽이다. 테러집단과의 연관성도 배제할 수 없어'[8]
- 이동준, <<위트상식사전 A class>> 중 「용감한 시민상」, 보누스(2015), 15p.
일반인: 하! 역겨워! 저 찌질이들 좀 봐!
코스프레 오타쿠 A: 역겨운 건 당신들이에요! 요즘 시대에도 당신들처럼 남의 방식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믿을 수 없네요. 그건 굉장히 무례하고 또...
일반인: 아니, 니들 말고 저 퍼리 팬덤 말이야
코스프레 오타쿠 A: 진짜네! 하! 역겨워! 저 찌질이들 좀 보라지!
(A의 일행인 코스프레 오타쿠 B가 A를 차별주의자라고 여기는 눈빛으로 째려봄)콜롬비아 출신 JagoDibuja의 만화 Living With HIpstergirl And Gamergirl 스페인어판 178화 / 영문판 179화[9]
일반인들에게 자주 보이는 경우는 유명 스포츠인들의 종교적 세리모니에 관한 반응이 대표적인데, 김연아나 장미란 같은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여론이 많을 경우나 해외 선수들 같은 경우는 성호를 긋거나 기도를 하거나 무릎 꿇고 알라를 외쳐도 별 반응이 없는 반면, 비판적인 여론이 다수인 선수같은 경우에는 해당 행위에 모진 린치를 가하는 경우가 있다. 박주영이 대표적.
거기에 흔히 말하는 식빵을 자주굽는 운동선수들에게도 잣대가 다르다. 예전 김현수, 오재원은 식빵을 자주 구워서 어린애들이 보고있다며 인성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지만 김연경은 식빵을 해도 걸크러쉬니 해서 호감 잣대를 들이댄다. 워낙 김연경은 실력이 좋고 해서....만약 이미지가 나쁜 운동선수가 식빵을 자주 구웠으면 비난을 배로 먹었을 것이다.
6. 개념의 오남용
워낙 인터넷상에서 남용되는 이중잣대이다 보니, '이중잣대'라는 표현조차도 오남용되는 일이 많다. 이는 간단히 말해 '너 왜 A만 욕하고 B는 욕하지 않냐? 이중잣대 쩌네.'라는 문장에서 보이는 논리 오류다. 다시 말해 A를 욕한 사람이 실제로는 B를 옹호할 생각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B에게 대한 적 없어 관심이 없거나, 또는 그다지 몰라서 욕하지 않았을 뿐인데, 'A만 욕하고 B를 욕하지 않았으니 넌 이중잣대'라는 딱지를 붙인다. 다만, 그 사람의 평소 행적으로 미루어보아 굳이 말을 안 했을 뿐 B를 옹호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경우에는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11]
이런 논조의 문장은 진영논리에서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중국 욕을 하면서 일본 욕은 안 하네? 너 이중잣대 쪽바리.'라는 식이다. 종교 문제에서도 자주 보인다. '우리 종교 욕은 하면서 쟤네 종교 욕은 안 하네? 너 이중잣대.'라는 식이다. 서브 컬쳐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A는 우익 아니라고 욕하면서 마찬가지인 B는 욕 안 하네? 너 이중잣대.'라는 식이다.
이중잣대는 '하나를 비판하면서, 동일선상에 놓인 다른 하나는 옹호하는 경우'에 쓰이는 것이다. 또한 그 옹호와 비판을 행한 주체(발언자)가 동일 인물이어야 성립한다.[12] 갑이 A를 욕했고, 을이 A를 옹호했다. 그런데 이 둘을 묶어서 '너희 둘은 이중잣대.'라고 하는 논리는 갑과 을 모두가 황당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갑은 A를 욕했을 뿐이고, 을은 A를 옹호했을 뿐이므로,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입장에선 어디까지나 일관성 있는 주장을 했을 뿐이다. 국가나 기업 단위로는 따지면 안 된다. 이는 전체주의적 내지 집단주의적 비판이기도 하며, 일반화하려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될 수 있다.
시기적인 변화나, 조건의 변화에 따라 불가피하게 주장이 바뀌는 일도 있다. 이는 기존 잣대는 거두고 새 잣대를 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정당 '가'가 여당인 정부에서 정책 A를 시행하는데 '갑'은 처음에는 이 정책 자체의 단점을 지적하며 정책 시행을 반대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정권이 '나'로 바뀌고 다시 정책 A를 시행하려 하는데 과거와 달리 정책의 배경이 바뀌어서 갑이 지적한 단점이 해결되었다고 가정하자. 이 상황에서 갑이 굳이 똑같은 논조로 A 정책에 반대할 의무는 없다. A 정책의 시행을 찬성하거나, 아니면 계속 반대하되 다른 단점을 지적해서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게 옳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침묵하거나.
이렇게만 놓고 보면 대체 누가 이런 걸 이중잣대로 보나 싶지만 그 이유는 '이중잣대'라는 표현 자체가 진영논리에서 자주 쓰이다 보니, 갑과 을이 같은 진영이나 집단에 소속된 인물이면 이런 식의 논리 검증은 안 하고 도매금 묶어서 판단하기 마련이다. 그나마 그 집단이 A에 대할 '공식적 입장', '통일된 의견'이 있으면 또 모르되, 그런 것이 없는 불특정 다수인데도 '이중잣대'라는 표현을 들이대는 것은 무리수일 가능성이 크다. 나무위키에도 특정 집단을 이런 식의 이중잣대로 표현한 문서들이 자주 보이는 편이다. 위에도 적힌 '정책 A'와 '갑'의 관계도, 갑이 원래 정당 '나' 지지자이기에 A 정책에 대한 입장이 바뀐 거라며 이중잣대라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말 그대로 일본 정부의 대표 의견이므로 여기에 이중잣대가 있으면 비판할 만하지만, 일본인 A가 한국을 좋아하고 일본인 B는 한국을 싫어한다고 할 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합의된 입장 또는 합의된 의견이 있는 게 아니므로 '일본이라는 집단으로 묶어서 이들을 이중잣대라며 비판하는 것'은 무리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굳이 '가능성'이라는 말을 덧붙여둔 것은 이 또한 절대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인 A와 B가 실제로 동일한 선상에서 논리를 전개해 이중잣대를 저지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고, 또는 A와 B가 실은 해당 문제에 대하며 같은 공식 의견을 보이는 소집단(일본 정부가 아닌, 예를 들어 재특회라든가)에 소속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집단에 소속됐다고 해도 의견까지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민주주의 사회에선 기본적으로 의견의 다름을 모두 인정하므로), 일부 책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정도의 문제이자 가능성의 문제다. 모든 것을 적과 아군, 그저 흑백으로 나눌 뿐인 진영논리에선 흔히 무시되지만.
7. 대처
상대방이 이중잣대를 보이면 웬만하면 피하는 게 정답. 최대한으로 피하거나, 멀리하거나, 상대하지 않는 것, 부딪치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인간은 생각과 달리 쉽게 바뀌거나 달라지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엄청난 돈을 벌거나 신분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바뀔 가능성도 없다.[13][14] 피해의식, 열등감에 대한 믿음이나 확신이 있으면 바뀔 가능성이 0.1%도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최대한으로 덜 만나거나, 불필요한 접촉, 사무적인 관계 외의 만남을 최대한 피한다. 직장이나 학교가 아니면 그 사람이 사는 곳, 그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다니는 것도 방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