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9 다해 연중5주일
이사 6:1-13 / 1고린 15:1-11 / 루가 5:1-11
계시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종교는 계시종교와 비계시종교, 달리 말하자면 계시종교와 자연종교로 분류합니다. 계시종교란 신이 인간에게 직접 자신을 드러내거나 진리를 전달하는 종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계시종교에 속합니다. 반면에 자연종교란 신의 직접적인 계시가 아닌 자연적 원리나 인간의 경험, 이성(理性), 윤리 등을 중심으로 교리를 형성하는 종교를 뜻합니다. 불교, 도교, 유교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물론, 계시종교라고 해서 이성, 윤리 등과 같은 인간의 경험과 자연의 영역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종교의 핵심을 인간과 자연의 존재근거인 신(神)에 기반을 둔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한하고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 유한하고 이 세상 속에 사는 자연과 인간에게 계시라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섭리한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자연 및 인간과 연결하고 있다는 계시(啓示)란 무엇인가요?
계시를 영어로 revelatio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 revelare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 뜻은 ‘덮개를 제거하다’, ‘장막을 거둬서 뒷면에 있는 것을 드러내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무대에 쳐진 장막을 거둬서 연극이 시작되는 것과 같은 분위기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에서는 신적 진리를 자연과 인간에게 알리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러한 계시가 일어난 사건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 6장 1절부터 13절에 나타난 계시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계시가 어느 때 일어났는지 알려줍니다. 시간적으로는 우찌야왕이 죽던 때였고, 공간적으로는 성전 지성소에서 일어났습니다. 역대기 하권 26장의 기록을 보면, 우찌야 왕은 유다왕국을 강성하게 이끈 임금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나병이 걸려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역대기 저자는 그가 “제 힘만 믿고 교만해졌다가 자멸하고 말았다 (역대하 26:16)”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계기는 그가 성전에 들어가 사제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자신이 직접 하려다 나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 아무리 왕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초법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국가의 법적이고 영적인 질서를 혼란케 하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교훈을 후대에게 전한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이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가 이사야에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계시가 일어난 장소는 유한한 왕권의 상징인 왕의 옥좌가 아니라, 무한하고 전능한 신권을 상징하는 성전입니다. 거기서 하느님은 드높은 보좌와 천사와 거룩한 연기를 보여주심으로써 당신의 절대적 거룩함을 드러내시고, 이러한 임재를 통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알리십니다. 이러한 신적 절대성이 드러날 때 유한한 인간의 반응은 어떠한가요?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당혹스러움을 토로합니다: “큰일났구나. 이제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뵙다니... (이사 6:5)” 이사야의 이 말은 하느님의 초월성과 절대성을 접할 때 보이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전혀 겪어보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와 만날 때, 유한성은 무한성에 빨려 들어가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엄청난 경외감과 더불어 끝을 알 수 없는 무서움이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계시가 여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공포감만 주고 결과적으로 신과 인간 간의 영원한 장벽만 확인하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초월자이며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은 이제 당신의 거룩함을 인간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유한성,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의 죄성(罪性)을 정화(淨化)시켜 주셔야 합니다. 이사야서는 이 정화를 천사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 가지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에 넣는 것으로 상징화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과 인간은 연결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은 인간 이사야를 당신의 메시지를 전할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이제 하느님의 일꾼 이사야는 그저 두려워서 말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Opus Dei)’에 대하여 하느님과 함께 대화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사역의 동반자로 삼으십니다.
둘째, 오늘 제2독서인 고린도 전서 15장 1절부터 11절에 나타난 계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계시를 회고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 특별히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대한 계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통해 우리의 죄가 극복되었기에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즉 은총이며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계시는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살았던 사도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비롯하여 마침내 신자들을 박해했던 자신에게까지 계시된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180도 전환한 놀라운 계시를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전함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일꾼으로 일하였습니다.
셋째, 루가 복음 5장 1절부터 11절에 나타난 계시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사야서와 고린도 전서가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저 위에 있는 초월의 영역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면, 복음에서 일어난 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히려 복음은 이 세상 속에서도 가장 아래를 상징하는 ‘깊은 데’에서 계시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마치 현미경을 보듯이 넓은 곳에서 한 지점으로 관점이 좁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호숫가에서 많은 군중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거기에는 시몬이라는 어부도 그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그 때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귀로 들려오는 예수님이 설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물을 손질하였을 것입니다. 그 들음은 자신의 시선과 정신을 집중해서 듣는 것이 아닌 그저 들려오는 소리였을 것이고, 그러기에 간간이 “맞는 말이네”하고 동조하면서도 그의 주된 관심은 그물 손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마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루가 5:4)”하고 말을 건네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잡았다고 대답합니다. 어쩌면 그는 내심 ‘당신이 훌륭한 랍비이지만, 이 일은 내가 전문가인데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요?’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순박한 베드로는 속는 셈치고 예수의 청을 들어줍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일찍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물고기를 낚은 것입니다. 그 정도가 자신의 배 만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서 동료들의 배를 불러 올 정도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 역시 겁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봤을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아니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루가 5:10)”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그를 변화시켜 주시고 당신의 사명을 함께 할 동역자로 삼으십니다. 그러자 사도바울이 증언했던 것처럼 베드로도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자신의 인생이 180도 바꿔집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가 일어나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계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와 만나는 접점이자 방식입니다. 만일 계시가 없다면 비록 하느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과 인간은 별개의 영역에서 별개의 삶을 살아가는 영원한 타자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저 우리와 세상을 낳고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라 계시를 통하여 우리와 이 세상과 연결 맺고 소통하십니다.
다음으로 계시는 다양한 모습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사야서처럼 하느님의 초월성과 거룩함을 보여주시는 방식, 달리 말하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으로 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처럼 철저히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일어나면서도 세상적인 경험과 예상을 벗어나는 모습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철학용어로 표현해 본다면, 계시는 초월과 내재 모두에게서 일어나는 비범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계시는 역사적 사건이면서도 아주 개인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사야서는 유다왕조가 직면한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복음과 제2독서는 로마지배 하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열망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 계시는 이사야, 바울, 베드로라는 구체적 인물을 통해 일어납니다. 특별히 그들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음으로써 말입니다. 복음에서 언급한 ‘깊은 데’라는 상징은 어쩌면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 역시 깊은 데로 가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내가 잊어버리고 싶은 곳이고, 그러기에 묻어두고 싶은 곳이며, 그러므로 거기를 건드렸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고 통제가 안 되는 영역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는 태초에 깊은 어둠을 휘저어서 빛을 만드신 것처럼 우리사회 그리고 ‘나’라는 개인이 다가가기 불편한 깊은 데를 휘저어서 거기서 빛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와 우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계시가 가져오는 선물입니다. 우리를 그것을 은총이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은 그 은총으로 자신의 인생이 온전히 변했습니다.
이제 이 예배를 통해 우리 역시 그 은총을 간구합시다. 주님께서 내 인생 그리고 우리의 역사 한 가운데에서 당신을 계시하시어 하느님이 더 이상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우리를 섭리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은혜의 선물을 받길 소망합시다.
우리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