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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사
14. 일본의 기습공격(1)
극동지역에서의 러,일 정세는 첨예하게 대립된 상태였다. 전쟁준비를 마친 일본은 개전하기에 적당한 시간만을 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뤼순에 정박중이던 태평양함대에 기습공격을 가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킨 후, 해상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고 육전대를 상륙시키는 방법으로 남만주에서의 군사작전에 돌입하려 했다.
전쟁이 근시일내에 발발할 가능성이 있음을 예측한 극동총독 알렉세예프는 극동에서 군사동원령을 포고할 수 있도록 짜르의 윤허를 간청했다. 1904년 1월 12일 니콜라이 2세는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전투태세 톨입을 윤허했으며, 남만주에 집결하게 될 러시아 부대를 엄호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부대를 압록강에 파병할 필요가 있는 만큼, 파견대를 조직하라는 권고도 내려졌다.
일본에서는 기습공격에 대한 준비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당시에 이미 일본의 예비역 군인 1만 6천명이 대기중이었다.)에서 가장 근접한 곳에 위치한 쓰시마에서는 징병검사 합격자가 소집되기 시작했으며, 일본 남부의 여러 항구로 수송행렬이 모여들었다. 제물포와 원산 등 한국에 위치한 항구에서는 군수물자의 수송이 진행되었고 석탄과 식량이 급송되었다. 후쿠오카 항으로부터 출항한 함대는 전투임무수행 및 포격 연습에 임했으며, 막대한 전쟁자금이 배정되었고 내채도 발행되었다.
1904년 1월 17일 일본이 병력수송을 위해 사세보(佐世保) 하에 60여 척의 수송선을 집결시켰다는 사실이 뤼순에 알려졌다. 러시아군 참모부의 계산에 따르면 위의 선박을 이용하면 이틀 안에 6개 사단의 병력을 한국에 수송, 상륙시킬 수 있었다. 재일(在日) 러시아 무관 해군중령 루신은 기존의 항로가 폐쇄되었으며, 개인 소유의 모든 기선(汽船)이 병력수송을 위해 용선(傭船)되었음을 본국에 보고했다. 일본의 이와 같은 단호한 조치는 정치적 양동작전이 아닌, 개전에 대한 확고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불안해진 극동총독 알렉세예프는 군사동원과 함대의 출항을 허락해 줄 것을 황제에게 재차 주장했다. 짜르는 전문(電文)에서 이렇게 답했다.
우리보다 일본이 먼저 군사행동에 착수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귀관은 만약 일본군이 아군을 상대로 한 적대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한국의 남부지역이나, 동부지역의 원산에 상륙하더라도 그들을 제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서부지역에서 일본 함대와 상륙군 또는 그 둘 중의 하나가 38도선을 넘어서 북쪽으로 진격할 경우 총독에게 공격을 윤허하나니 그들의 사격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일본의 개전 의지와 관련하여 명백한 증거를 포착한 러시아 극동군 참모부는 육군과 해군의 전투대비태세를 높이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해야 했다. 기습공격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일몰 직전 해안과의 연락이 금지되었다. 저녁에는 함포와 어뢰발사관을 장전했으며, 일부 선박 등을 점등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매일 1개 교대조가 함포와 어뢰발사관 주위에서 경계근무를 섰으며, 일본 전함의 접근을 함대에 보고하기 위하여 매일 수뢰정과 포함 각각 2척이 당직에 배정되었는데, 수뢰정의 임무는 일몰 후 뤼순 항 전방 20해리 지역을 탐조등으로 경계하는 것이었으며, 포함(砲艦)은 정박지 전방 10해리 지역을 경계했다. 당직 전함은 적을 발견하는 즉시 뤼순으로 회항하면서 함대사령관에게 적 출현에 관해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대기조는 적의 야간기습에 대비하여 탐조등으로 정박지와 입구를 감시하는 임무 또한 수행하고 있었다.
1월 19일 태평양함대의 지휘관은 순양함과 외항에 정박중인 선박 및 구축함의 당직근무에 관한 훈령을 실행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러시아 전함을 위한 안전조치가 취해졌는데, 뤼순 항으로부터 외해로 출항하는 순양함에 내려진 훈령을 보면 “특별한 명령 없이는 실전을 위한 전투무장을 하지 말 것, 그러나 아군임을 식별할 수 있는 선박등을 점등한 상태에서 순항할 것”을 규정하고 있어서 절반의 안전조치에 불과했다.
1904년 1월 25일 극동총독 알렉세예프는 러․일간의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는 전문을 받았다. 《노비 끄라이》지(뤼순에서 주 3회 발행되던 신문)의 주간은 그 사실을 신문지상에 발표할 것을 극동총독에게 요청했으나, “사회를 동요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1904년 1월 26일 일본 수뢰정이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기 수시간 전에 태평양함대의 참모부장인 해군소장 비트게프트는 “어뢰 발사관과 어뢰운용의 준비에 관하여”라는 명령서에 서명해 송부하였다. 항만용 방어재와 방어철망을 부설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분함대장 스타르크 해군중장은 극동총독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6척의 전함과 4척의 순양함이 보유하고 있는 방어철망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것은 분함대의 긴급 출항에 장애를 줄 수 있으며, 또한 …… 스크류에 감기는 위험한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적의 어뢰공격으로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외면한 채, 출항시 방어철망이 스크류에 감김으로서 발생할 수 있는 시간의 손실만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1월 22일 저녁 러시아 함대가 외항에 정박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도쿄의 일본군 총참모부는 기습에 최적인 상황을 간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궁정회의에서는 군사행동의 시작에 관한 결정이 내려진 후, 러시아 전함을 공격하고 한반도에 부대를 상륙시키라는 명령이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해군 중장에게 하달되었으며, 일본 국내에서는 동원령이 발효되었다.
1월 24일 아침 사세보 항에 정박중이던 각 전함의 함장은 도고 해군중장의 장갑기함(裝甲旗艦)에 소집됐다. 수뢰정 아까쓰키(曉) 호의 함장은 당시의 상황을 자신의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도고 해군중장의 앞에 황해와 뤼순 전도가 펼쳐져 있었다. 우리가 책상 주위에 둘러앉자 참모부 소속의 장교가 모든 참석자에게 정박해역과 뤼순항의 평면도를 나누어 주었는데, 러시아 함대의 모든 상황과 각 전함의 위치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본 회의에서 도고는 각 함장을 향해 이렇게 명령했다.
모든 함대는 본관과 함께 황해로 향하여, 뤼순과 제물포에 정박중인 적의 군함을 공격한다. 본관의 편대(순양함 아시마 호 포함)를 위시하여 제4전투편대장 우류(瓜生外吉) 해군소장과 제9, 제14수뢰정 편대는 제물포로 향하여 적의 전함을 공격하고 아군의 상륙을 엄호한다. 제1, 제2, 제3전투편대는 구축함편대와 함께 뤼순으로 직항하며, 구축함편대는 정박중인 적의 함대를 심야에 공격한다. 익일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전함 6척, 순양함 14척 그리고 35척 이상의 수뢰정으로 구성된 일본 전투함대는 연합함대 지휘관의 명령이 접수된 즉시 출항했다. 고속순양함과 수뢰정으로 구성된 편대가 연합함대의 선봉이 되었으며, 장갑순양함과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주력함대가 그 뒤를 따랐다. 1월 25일 순양함 5척, 수뢰정 8척 및 3척의 상륙군 수송선으로 편성된 우류 해군소장의 제4전투편대가 주력함대로부터 떨어져 나와 제물포로 향했다.
1월 26일 오후 러시아 함대기지로부터 44해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일본의 주력함대는 도고 장군의 지휘하에 뤼순으로 접근했다. 18시에 함대기함(艦隊旗艦) 선상에 작전개시 신호가 올랐다. 연합함대의 지휘관은 수뢰정을 두 부대로 양분했다. 그 중 10척의 수뢰정으로 구성된 제1대는 뤼순으로, 8척의 수뢰정으로 구성된 제2대는 다롄(大連)으로 각각 향했다. 주력함대는 엘리오트 군도로 향했다.
15. 일본의 기습공격(2)
일반적으로 러일전쟁은 뤼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함대를 일본 함대가 공격한 시간인 1904년 1월 27일 밤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양국 군함간의 교전은 그보다 몇 시간 전인 1월 26일 약 16:00시 경에 있었다.
서울 주재 외국 공사관의 수비를 위해 한국의 제물포항에는 각국의 전함이 경비선의 자격으로 정박하고 있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의 경비선 또한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발발의 위험이 나날이 증가하던 1904년 1월 각국의 군부대는 공사관원과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속속 상륙하여 한국의 수도로 향했다.
당시 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던 3척의 러시아 군함 중에서 순양함 보야린 호와 포함 길랴크 호는 뤼순으로 소환되었다. 1월 5일 포함 까레예츠(러시아어로 한국을 의미함) 호는 뤼순 주재 공사관과 서울 주재 공사관간의 단절된 통신망을 복구하기 위해 제물포에서 순양함 바랴크 호와 합류했는데, 그곳에는 순가리 호 역시 정박중이었다.
제물포에 정박중이던 일본의 순양함 지요다(千代田) 호는 1월 23일 러시아와의 국교가 단절되었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정박지 출구 쪽으로 위치를 옮겼으며, 1월 26일에는 비밀리에 외해로 출항하여 우류 해군소장에게 제물포의 모든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제물포에 정박중인 2척의 러시아 군함이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 없을 것으로 확신한 우류 해군소장은 부대의 상륙을 명했다.
뤼순과의 연락이 두절된 후,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로부터 밀봉된 비밀서신을 받은 순양함 바랴크 호의 지휘관 루드네프 해군대령은 까레예츠 호를 이용하여 뤼순으로 우편물을 수송하려 했다. 1월 26일 15시 40분 까레예츠 호는 닻을 올리고 암초를 지나 외해로 향했다. 15분 후 러시아 군함의 탑승자들은 수척의 일본 전함이 접근해 오고 있음을 눈치챘다. 일본 군함 중 한 척이 까레예츠 호의 항로를 차단하자 지휘관 벨라예프 해군중령은 회항하려 했다. 일본 수뢰정이 어뢰공격을 가했지만 모두 러시아 전함의 선미 뒤쪽으로 빗나갔다. 선제공격을 받은 까레예츠 호 역시 일본 전함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정박지로 돌아온 벨라예프 중령은 루드네프 대령에게 전투가 시작됐음을 보고했다. 약 17:00 시경 4척의 일본 수뢰정이 정박지로 입항했으며, 러시아 군함 근처에 정선했다. 바랴크 호와 까레예츠 호의 승조원은 일본의 공격에 대비하여 비상근무에 임했으나 러시아 군함을 완전히 봉쇄한 일본은 성공적으로 부대를 상륙시켰다.
1월 27일 아침 우류 해군소장은 러시아 측에 정오 이전에 외해로 출항할 것을 요구하면서, 만약 이에 불응할 경우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순양함과 미국의 포함, 한국의 군용기선 등이 정박중임에도 불구하고 16시를 기해 무력행사에 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일본은 화력에서 월등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순양함 아시마 호 1척의 화력은 바랴크 호와 까레예츠 호의 화력을 합한 것보다 월등했다.
루드네프 해군대령은 위의 문제에 관해 의논하고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함정에 장교단을 소집했다. 본 회의에서 적을 정면으로 돌파한다는 결론이 만장일치로 내려졌다. 만일 작전에 실패할 경우 부대는 연안에 상륙시키고 군함은 폭파하기로 되었다.
전투를 앞두고 순양함의 지휘관(루드네프 대령)은 사병이 정렬한 자리에서 개전을 포고하면서 “우리는 적진을 돌파할 것이며, 적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일전을 불사할 것이다.…… 가능한 최후까지, 마지막 한 방울의 피를 다해서 적과 투쟁할 것”을 명했다. 병사들은 명령을 완수하겠다는 굳은 결의로 출항준비에 임했다.
러시아 군함은 11시 30분에 출항했다. 순양함 6척과 수뢰정 8척으로 구성된 일본 분함대가 이오돌미 섬(월미도) 뒤편에 포진해 있었는데, 항로가 협소해서 적을 우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면돌파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일본이 러시아군에게 군함을 이끌고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11시 45분 순양함 아시마 호가 먼저 포문을 열었으며, 바랴크 호와 까레예츠 호가 이에 응사했다.
바랴크 호 포술장(砲術長)의 지휘로 이루어진 일제사격으로 일본측 기함의 돛대가 부러지고 선교(船橋)가 파괴되었으며, 마스트가 파손되었다. 순양함 지요다 호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전투중 일본의 수뢰정이 완파되어 침몰했다. 한 시간의 교전에서 바랴크 호는 1,105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러시아 군함은 적의 공격을 피하며 이동하려 했으나, 여러 발의 포탄이 순양함에 명중되었는데, 유산탄(榴散彈)이 상갑판에서 작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루드네프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선상에서 번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는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는 각 병사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피투성이가 된 제복에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선교에 올라가 병사들을 향하여 “제군들! 나는 살아 있노라! 정확한 포격을 가하라!”고 외쳤다.
순양함에 화재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병사들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착오가 없었다. 잠시 후 갑판실과 조타장치가 파괴되었으며, 대부분의 함포가 작동되지 않았다. 군함의 좌․우현에 생긴 포탄구멍을 통해 바닷물이 군함 안으로 흘러들었다. 루드네프는 파손된 부분을 정비한 후, 다시 전투에 임한다는 계획하에 제물포로 회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순양함이 회항하는 순간 일본 군함이 발사한 대구경 포탄이 좌현에 명중했고 순양함이 좌측으로 심하게 기울면서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거의 파손되지 않은 포함 까레예츠 호는 바랴크 호의 항적을 따르며 일본 군함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흘수선 밑에 생긴 포탄구멍을 통해 유입되는 바닷물을 차단하기 위한 차수막이 설치된 후, 16시를 기하여 일본군의 재공격에 대비하여 작동 가능한 함포 주위에서 당직근무에 임하라는 함장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군함의 파손된 부분을 검사한 결과 모든 47㎜ 포가 고장났으며, 6인치(152㎜) 포 5문과 75㎜포 7문이 심각하게 파손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투시 순양함 바랴크 호의 승조원 중 31명이 전사했으며, 루드네프 해군대령을 포함하여 19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부상자 중 약 100여명이 전투중 자신의 위치를 고수했으며, 전투가 끝난 뒤에야 부상당한 사실을 알렸다.
이렇게 파손된 상태로는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없으며, 자체 수리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장교단은 병사들을 연안에 상륙시킨 후, 바랴크 호를 폭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박지에서 폭파를 감행할 경우 타국적의 선박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영국 순양함장의 충고에 따라, 루드네프는 침몰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지휘관과 병조장은 마지막으로 순양함을 둘러본 후, 배수용 판을 열었다. 18시 10분 일방적인 전투에서 뛰어난 역할을 수행했던 군함이 수장되었다. 까레예츠 호에서도 거의 동시에 두 번의 폭발음이 들린 후, 군함이 두 부분으로 분리되면서 파도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순가리 호 역시 적의 전리품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승조원들에 의해 침몰되었다.
16. 일본의 기습공격(3)
1월 27일 밤은 칠흑같이 어둡고 조용했다. 뤼순 외항에는 평시작전명령에 다라 태평양분함대 소속의 군함 16척이 정박중이었다. 그 구성을 보면 전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폴타바, 세바스토폴, 레트비잔, 포페다, 페레스베트, 체사레비츠와 1등급 순양함 바얀, 팔라다, 디아나, 아스콜드, 2등급 순양함 노비크, 보야린, 지기트 및 포함 자비야카 그 외에 운송선 아가라 호 등이었다. 수뢰정 베스스트라쉬니 호와 라스토로프니 호는 외해에 있었으며, 포함 길랴크 호는 보브르 호와 교대하기 위해 정박중이었다. 군함 중 즉시 출동이 가능했던 것은 당직근무중이던 순양함 아스콜드 호와 디아나 호 등 2척에 불과했으며, 전함 레트비잔 호와 순양함 팔라다 호는 탐조등으로 정박해역을 밝히고 있었다.
약 23시경 함대장 스타르크 해군중장의 기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호에서는 적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는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함장회의가 개최되었다. 본 석상에서 비트게프트 해군소장은 함대장교들과의 고별 인사말에서, 일본은 러시아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은 없을 것임을 확인했다. 부브노프 해군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일면 경계대책을 수립하는 듯했으나, 완전하지 못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모든 전함으로부터 목재를 하역하면서도 어뢰공격에 대비한 철망은 설치하지 않았다. 스타르크 장군은 폴타바 호에서 ‘걱정하지 말라’며 철망제거를 명령했다.”고 한다.
이 명령은 극동총독의 일방적 결정에 따른 것으로 그는 전함 주변에 철망을 설치하자는 회의의 결정을 “시기적절치 못하고 현명치 못한 것”으로 평가했다. 스타르크 장군은 함대가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어뢰공격에 대한 대비책으로 제시한 것이 “외해를 순항중인 수뢰정과 포함이 식별등을 달고 선미등을 노출되게 점등하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볼 때 러시아군 지도부는 일본의 공격에 의한 피해보다 야간에 아군함정 간의 충돌을 더 우려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석탄을 실은 채 강렬한 샹들리에 전등으로 불을 밝히고 있었던 디아나, 폴타바 그리고 포페다 호는 물론이거니와 선박등조차 공격자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경계상황이었던 만큼 함대의 모든 병사들은 소속된 함상에서 대기하고 있었다.(통설에 따르면 일본의 공격이 있기 전에 대부분의 러시아 병사가 연안에 있었다고 하지만 잘못된 주장이다.) 예상되는 어뢰공격에 대비하여 포탑포를 제외한 모든 함포는 장전된 상태였으며, 포병과 어뢰병은 각자 자신의 전투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외항에 정박중인 전함을 보호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는 적절치 못했다. 스타르크와 비트게프트 장군을 위시한 군통수부의 안일한 행동은 사병들로 하여금 전투준비 태세를 강화할 필요가 있는지 그리고 과연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극동총독은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는 소식을 점했음에도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았음은 물론, 그와 관련하여 함대에게 어떠한 주의도 통고하지 않았다. 정찰임무 역시 형식적이었다. 함대와 연안 방어요새 간의 통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적을 발견했을 경우에도 정찰선은 바다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뤼순까지 귀항해서 보고해야만 했는데, 이런 식으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22시경, 뤼순으로부터 동쪽 20해리 해상에 위치하고 있던 경계근무중이던 베스스트라쉬늬 호와 라스토르프늬 호는 탐조등으로 수평선을 비추고 있었는테, 이것이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것이어서, 일본 수뢰정은 러시아 군함을 우회할 수 있었다. 일본 함대는 경계근무중이던 러시아 수뢰정의 순항속도 및 항로를 계산하여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그들보다 먼저 외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등대의 불빛과 전함의 등불에 의거해 방향을 잡으면서 러시아 군함에 접근한 일본 함대는 멀지 않은 거리에서 16발의 어뢰를 발사했는데, 그 중 3발이 러시아 군함에 명중했다.
23시 35분 장갑함 레트비잔 호에서 첫 번째 폭발음이 들렸다. 러시아 전함의 좌현에 배치된 모든 함포가 일본 수뢰정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일본 수뢰정의 공격을 직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인사격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자기 군함을 향해 어뢰가 발사되거나 폭발음을 듣기까지는 응사를 자제하라는 명령이 병사들에게 하달되었다. 후에 스타르크 장군이 극동총독에게 보고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자신이 승선하고 있었던 기함에서조차 “(첫 번째) 폭발음은 우발적인 것이라는 확신이 지배적이었으며, 발사 준비를 갖추었던 아군의 수뢰정으로부터 발사된 어뢰가 폭발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체사레비치 호가 보낸 신호가 모든 의혹을 풀어 주었다.”
러시아 함대는 포격으로 일본 수뢰정의 공격에 대응했다. 외해에 나가있었던 순양함과 수뢰정은 일본의 수뢰정을 추격하려 했으나, 심야에 적을 발견해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본 수뢰정의 공격으로 레트비잔 호의 좌현의 어뢰저장고가 관통되면서 3개의 격납실이 침수되었다. 장갑함 체사레비치 호의 파손은 더욱 심각했다. 선미가 관통됨에 따라 침실용 갑판과 진료실, 어뢰발사관 저장 창고, 어뢰고 등이 침수되면서 경사가 16도에 달했다. 순양함 팔라다 호의 좌현 68~75번 늑재(肋材)가 수뢰에 명중되면서 75㎜ 포가 고장 났고 포갑판과 장교분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체사레비츠와 팔라다 호는 내항으로 견인되었으며, 레트비잔 호는 선수를 육지로 향한 상태에서 외항 연안으로 예인되었다. 이 3척의 전함은 이후 장기간에 걸쳐 참전하지 못했다.
첫 교전에서 얻은 일본 측 손실도 적지 않았다. 수뢰정 아까쓰끼 호 함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수뢰정이 심각하게 파손되었으며, 다른 수뢰정은 “빠른 속도로 침몰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수뢰정의 상갑판, 파괴된 선교, 연돌(煙突)의 구멍을 통해 증기가 새고 있는 것(기관이 파손된 것이 분명했다.)을 선명하게 목격했다. 시라구모(白雲) 호는 침몰하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다.” 러시아 함대에 의해 파손된 일본의 수뢰정은 8노트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없었으며, 따라서 기지로 회항하기조차 힘든 것으로 판명되었다.
17. 일본의 기습공격(4)
1월 27일 구축함과 순양함 각 5척으로 편성된 러시아 분함대는 뤼순 외항에서 일본 함대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러시아군 통수부는 일본 측이 지난밤의 공격으로 러시아 함대를 약화시켰다고 여기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주력을 이끌고 재차 공격에 나설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8시경 랴오둥 반도 방면으로부터 데바(出羽) 장군 휘하의 제3전투편대인 순양함 치토세(千歲), 다까사고, 가사기(笠置) 및 요시노(吉野) 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데바 장군은 러시아 전함이 정박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짐작컨대 간밤의 공격으로 인해 전함 3척만이 파손된 것 같다는 사실을 무전으로 주력부대에 보고했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가 해안포대의 엄호로부터 벗어나서 일본의 주력함대가 대기중인 외해로 출항하도록 유인하려는 목적에서 왜소하게 편성된 함대를 파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타르크 장군은 순양함 보야린 호만을 외해로 출항시켜 적을 감시하도록 했다. 10시 35분 보야린 호는 일본의 주력함대가 근접해 있음을 의미하는 신호기를 돛대에 달은 상태에서 본대로 귀환했다.
약 11시경 수평선에 12척의 일본 군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갑기함 미카사(三笠) 호를 필두로 하여 뤼순 방면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데바 장군의 순양함 편대는 장갑함과 장갑순양함에 합류했다. 러시아 함대는 양 측면에 각 2척의 순양함을 거느린 채, 일본 함대와 교전하기 위해 전진했다.
11시 20분 약 3.5해리 정도 접근했을 때 일본의 연합함대가 12인치 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역시 응사했으며, 3개의 해안포중대가 지원포격을 가했다. 러시아군은 역광(逆光)을 받으며 포사격에 임했으며, 포연이 수평선을 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격은 정확했다.
약 10분 후 러시아 함대는 정박지가 협소했기 때문에 전투를 계속하면서 단종진의 형태로 8포인트 정도 좌측으로 이동했다. 11시 45분 일본 함대가 갑자기 바람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정선(停船)했는데, 일본의 전함 중 한 척이 심하게 경사졌으며, 최후미에 위치한 순양함에서 폭발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거리가 멀어지자 러시아는 포격을 중지하고 약 14시경에 뤼순으로 귀항했다.
도고 헤이하찌로 장군은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거의 완편 기준으로 구성된 이 날의 전투 이후 자신의 계산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비록 일본의 전함이 수적으로 우월하다 할지라도 러시아는 해안포대 및 3척의 파손된 전함으로부터 포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그것이 러시아의 전력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일본 함대는 이 날의 해전에서 러시아 측의 중포탄(重砲彈)에 의해 입은 손실이 컸다. 기함 미카사 호의 사령선교의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돛대가 파손되었고 함기가 떨어졌다. 장갑함 후지 호의 경우에는 1발의 중포탄에 의해 선수의 선교가 파괴되었으며 연돌이 관통되었고 또 1발의 포탄에 의해 무선장비가 고장났다. 장갑함 하쯔세(初瀨) 호에는 2발의 중포탄이 명중되었으며, 시키시마 호의 연돌이 떨어져 나갔다. 순양함 가사기 호는 상부갑판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또한 다른 군함들 역시 적지 않은 손실을 보았다.
해전은 2.5~4.7해리 사이에서 벌여졌으나, 1.7~1.9해리까지 접근한 러시아 군함도 일부 있었다. 순양함 노비크 호(함장 에센 대령)의 경우 유리한 상황을 이요하여 독자적으로 적함을 공격했으나, 지원사격이 없었고 적의 집중포화를 받자 퇴각했다. 스타르크가 극동총독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위 전투에서 뒤어난 역할을 한 것은 전함 페트로파블로스크 호와 순양함 바얀 호 및 노비크 호의 지휘관과 병사들이었다.
본 전투에서 발생한 러시아 측의 인명손실은 사망 14명, 부상 71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은 사망 3명, 부상 69명의 손실을 입었다. 비록 29발에 달하는 일본군의 포탄이 러시아 군함에 명중되었으나 실질적 손실은 일본에 비해 적었다. 도고 장군은 “러시아 수뢰정의 공격을 우려하여, 제1, 제2공격편대에게 남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으며 …… 제3전투편대에게는 제물포로 향할 것을 명령했다.”
18. 일본의 기습공격(5)
러시아의 극동군통수부가 심각한 실수와 착오에 빠져 있었음이 전쟁 첫날에 밝혀졌다. 불완전한 전쟁 준비, 준엄한 지휘력의 부재, 함대 지휘부의 부주의, 스타르크 장군의 우유부단한 행동 등으로 인해 러시아 함대의 전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으며, 일본군은 아무런 장애 없이 한국에 상륙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일본군 통수부는 기습의 의미를 재평가했다. 그렇게 유리한 상황(러시아의 전함은 노출되고 방어가 허술한 상태로 정박중이었다)에도 불구하고 일본 함대는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의 대중매체에는 매우 고무적인 기사가 게재되었다. 요코하마에서 출간되는 일간신문에는 전쟁 첫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되었다.
일본의 함대는 …… 러시아 군함 3척을 파괴했다. 2월 9일 오후 일본 함대는 연안 포대의 엄호를 받고 있었던 러시아 함대를 재차 공격했다. 재차 3척의 러시아 군함이 파손되었다. 한편 같은 날 오후에는 아군의 순양함편대가 제물포 근처에서 2척의 러시아 군함을 파괴햇다. 단 15시간 만에 3회의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가 전투력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전투력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주어진 상황에서 임무를 완수해야 했으며, 따라서 극동총독과 함대 지휘부는 함대 운용에 대한 전반적 견해에 입각하여 대책을 신속하게 마련해야 했다.
1월 30일 알렉세예프 장군의 주재하에 진행된 회의에서는 다롄 방어의 필요성, 뤼순 항만 출입구의 방어, 함대의 지속적인 전투, 파손된 군함의 신속한 정비 등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본 회의에서 내려진 결론은 우선 다롄 항의 수비는 방어용 기뢰를 부설하는 데 그칠 것, 전함은 보존하고 순양함과 수뢰정만 출항시킨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러시아군 지휘부는 다른 군함이 추가로 손실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러시아는 일본 군함이 뤼순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뢰를 부설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신무기를 취급한 경험이 부족했다. 1월 29일 수뢰정 예니세이 호는 기뢰부설중, 수면으로 떠오른 기뢰를 목격하고 그것을 제거하려 했으나, 오히려 기뢰부설지역에 빠져들어서 대부분의 승조원과 함께 침몰되었다.
예니세이 호가 어디에 기뢰를 부설했는지 그 상황을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순양함 보야린 호 역시 기뢰에 의해 선체가 파손되었다. 1월 31일 밤 두 번째 기뢰가 폭발한 후, 보야린 호 역시 침몰했다.
일본 함대 역시 적과의 효과적인 전투방법을 찾고 있었다. 러시아 함대는 일본 육군의 상륙에 심각한 위험요소였다. 따라서 일본 함대 지휘부는 다수의 해군력을 뤼순 봉쇄에 할당했는데, 스타르크 장군의 보고에 의하면 17척에 달하는 전투함이 봉쇄에 배정되었다. 이화 함께 다수의 러시아 군함이 내해에 위치해 있으며, 이 중 전함과 순양함은 1일 2회의 만조(滿潮) 시에만 출항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사실이 도고 장군에게 보고되었다.
일본의 수뢰정 편대는 심야에 러시아 순찰선과 해안방어부대의 주력을 다른 데로 돌리면서 뤼순을 향해 은밀히 접근했다. 본 편대의 역할은 외항에 정박하고 있는 적의 군함을 공격하여, 그들을 바다로 유인해 내는 것이었다. 동시에 배수량 1,200~4,300톤 사이의 화선(火船) 5척으로 구성되어 제2의 수뢰정 편대의 호위를 받고 있던 특별예비편대는 내항 입구에 침투하여 항로상에 위치하고 있던 모든 적선에 화공(火攻)을 가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제2수뢰정 편대의 임무는 내항 입구에 파손된 채 정박중인 레트비잔 호를 완전히 파괴하고 퇴각 시에는 화선에 탑승했던 승조원을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본 작전이 성공할 경우, 내항에 정박해 있는 대부분의 러시아 전함을 봉쇄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일본 함대가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게 되고 해상교통에서 러시아의 위협을 일정 기간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본 작전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화선(火船)에 탑승할 인원은 지원자 중에서 선발되었다.
2월 11일 밤 일본이 내항 입구를 봉쇄하기 위해 나섰다. 보다 용이한 목표설정을 위해 화선(火船)에 앞서 랴오테산 반도(랴오둥 반도의 끝부분) 남쪽의 일정 지점에 도착한 일본의 수뢰정은 레트비잔 호를 공격했으나, 곧 격퇴되었다. 러시아의 탐조등이 내항으로 향하는 화선(火船)을 비추자 연안포대와 레트비잔 호를 비롯한 다른 군함들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레트비잔 호의 지휘관 센스노비츠 해군대령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약 1시 30분경 요새에 설치된 탐조등 불빛에 두 줄기의 연기가 발견되었다. 2시 45분 레트비잔 호의 병사들은 파손된 본함(本艦)을 향해 접근하고 있는 여러 척의 적 수뢰정을 목격했으며, 즉각 포격을 가했다. 곧이어 장갑함의 병사들 또한 2척의 수뢰정을 발견했다. 아군의 포격이 있자 적 수뢰정이 정지했으며, 선체 하부에서 증기가 일어나는 것이 목격되었다. 수뢰정의 뒤쪽에서 2척의 선박이 나타났으며, 함포는 그들을 향해 집중되었다. 우측에서 이동하고 있던 선박은 지원포격을 가하지 않고 자신의 항로를 유지했다. 그 선박에서도 화재가 발생했으며, 등대탑 근처의 암초에 좌초했다. 그러나 그 선박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은 아군의 포격이었으며, 결국 침몰되었다. 포격은 이 선박으로부터 탈출중이던 구명정에 집중되었다.
러시아 함대와 연안포대의 포격, 강렬한 탐조등 불빛에 의한 시각장애 등으로 인해 뤼순 내항을 봉쇄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스타르크 장군은 이 작전을 일본군 보병부대의 직접적인 뤼순상륙작전으로 오인했다.
일본이 작전에서 실패한 후, 러시아군 지휘부는 2척의 수뢰정을 첩보활동에 배정했다 - 해군중령 리벤의 베스스트라쉬늬 호, 해군중위 포두쉬킨의 브누쉬첼늬 호였다. 2월 12일 아침 두 척의 수뢰정은 뤼순으로 귀환하던 중 치토세, 다까사고, 가사기, 요시노 호 등으로 편성된 일본의 순양함편대와 조우했다. 러시아 수뢰정의 항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일본의 함포사격이 시작되었다. 베스스트라쉬늬 호는 적진을 돌파하여 기지로 귀환했고, 브누쉬첼늬 호는 외해로 후퇴했다. 그러나 적의 포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선체가 심각하게 파손되자 적의 전리품이 되는 것을 원치 않은 함장은 승조원을 연안에 상륙시킨 후 함정을 침몰시키기로 결정했다. 러시아 함대의 불행했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