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 여행9 - 간몬해협의 청일전쟁 기념관에서 옛 전란을 떠올리다!
8월 12일 시모노세키(下關) 교외에 옛마을 죠후(長部) 에서 이미노미야진자 와 노기진자에 고잔지
절 과 나가야 라고 불리는 옛 무사들의 주택 을 보고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시모노세키와
북규슈 모지(門司) 를 잇는 간몬대교( 關門大橋) 를 지나서 아카마진구 단노우라 정류소에 내립니다.
해안으로 내려가서는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간몬해협 (関門海峡) 을 구경하고는 다시
도로변으로 올라와 언덕 위에 있는 일청강화 기념관 으로 찾아가는데.....
아니? 우리는 “청일전쟁” 이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은 “일청전쟁” 이라고 부르네요?
청일전쟁 과 일청전쟁 으로 서로 명칭을 다르게 부르는 것을 보니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으니, 2002년 월드컵 개최 를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본 에 비해...... 느지막에
한국이 갑자기 뛰어들어 일본을 당황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공동개최 에 이르게 됩니다!
대륙 순환 개최 방침에 따라 아시아 지역 개최 는 이미 정해진 일이라 FIFA 의 중재 로
일본과 한국이 서로 다투는 대신에 공동 개최 를 하게되었지만 이번에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이름 을 갖고 다투다가 “한일 월드컵” 이라고 부르는 대신에.....
한국은 개막 경기를 서울 에서, 그리고 일본 은 최대 관심 경기인 결승전을 도쿄 에서
치르는 것으로 합의를 봅니다. 그러니까 명칭 이 "한일월드컵" 이니.....
"명분은 한국 이 차지했고, 실리는 결승전을 개최한 일본" 이 취했던 기억이 나네요?
언덕을 올라가서 “일청강화기념관” 으로 들어가니 “어서 오세요” 하는 한국어 인사말 과
안내문 그리고 옛 사진들 이 보이는지라 서툰 일본어 솜씨로 뛰엄뛰엄 읽어 보니.....
바로 이곳이 1895년 에 일본 전권변리대신 이등박문 (이토 히로부미) 과 청나라
전권대신 이홍장 이 일청전쟁(청일전쟁) 강화조약 을 체결한 장소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1875년 일본은 미국등 서양에 당한 그대로 군함 운양호 를 강화도 에 보내.....
조선군의 포격을 유도 하여 반격한 후에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 체결을 강요합니다.
강화도 는 1866년 프랑스가 침범한 병인양요, 1871년 미국이 침공한 신미양요 에 이어
1875년 일본군함 운양호의 침범 을 받는데.... 초지진이 포격하자 대포 2문 을 장착한
운양호 는 대응 사격으로 초지진을 초토화 하고 영종진에 22명의 육전대 를 상륙시킵니다.
첨사 이민덕의 450명 조선군은 대포와 총 을 쏘았으나 22명 일본군 육전대 는 대포 2문의 지원
사격으로 뻘밭에 상륙해 험준한 성벽 을 기어오르니.... 조선군은 전사 35명에 포로 16명 을
남기고 도주하는데 일본군은 대포 36문에 소총 130자루 를 노획하니 전사자는 없고 경상자 2명
이라... 강화도 민가에서 살륙과 약탈, 부녀자 겁탐에 방화 를 저질렀으니 전력차 를 알만 합니다!
1866년 병인양요 인 프랑스의 강화도 점령과 또 1871년 신미양요 인 미국의 강화도 침략
으로도 조선의 개항 을 달성하지 못했는데, 일본의 도발에는 대원군이 실각 한 뒤이기도
하고.... 또 대참패로 전력 차를 확인 한지라 민왕비의 조선 조정이 저렇게 굴복한 것이지요?
그러자 서양 각국이 조선에 수교 를 요구하니..... 청나라 는 조선에 직접 교섭하지 말고
종주국인 청국을 통해서 수교 교섭 을 해야 한다고 서양 각국에 강력히 요청 합니다.
그러니까 조선과 수교하려는 미국 측에 서울 이 아닌 북경에 와서 청나라와 교섭 하자는?
하지만 일본 은 이를 사전에 예측해 강화도 조약 제 1조에 “조선은 독립국이다” 라는 문귀
를 넣었던 것이라? 저 조항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때 중국이 파병할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함인데.... 의도와 다르게 조선은 서양과 직접 외교 교섭 이 이루어질수 있었던 것이지요!
중국이 "황제국 이면 제후국인 조공국" 이 있어야 하는데..... 유구국을 일본에, 베트남 을
프랑스에 잃은 지금 유일한 제후국인 조선 을 한사코 뺏기지 않으려는 청나라와.....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 떨어져 나가면 중국은 더는 황제국을 칭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기어이 뺏으려는 일본이 각축하는 것이니, 메이지 유신의 1등 공신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는
1873년 조선을 서양에 뺏기기 전에 먼저 취해야 한다며 정한론(조선침략) 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에서 시기상조 라고 거부 당하자 규슈에서 서남전쟁 반란 까지 일으킵니다.
조선은 일본에서 당장 조선을 침공하느냐 문제로 내란이 일어났는데도 그런 사실 조차도 몰랐다는...
중국의 속국인 조선 을 집어삼키자면 임진왜란 처럼 청나라가 제후국을 뺏기지 않으려고
군대를 파병할 것이니, 그럼 종주국 중국과 전쟁 을 벌여야 하는데, 아직 일본의 국력 이
미약한지라 메이지 정부의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토 히로부미등이 반대 를 했던 것입니다!
중국은 임진왜란에서 부터 4차례 조선을 구원하는데, 2차는 1882년 청군이 와서 임오군란 을 진압해
주었고 3차는 1884년 청군 원세개가 갑신정변 을 진압해 주니 패한 일본은 텐진조약 으로
조선에서 철수하고는 조선의 종주국이 청나라 임을 인정했는데, 1894년 동학농민군에 전주를
뺏긴 조선은 농민군과 합의후에, 뒷구멍으로 4번째로 중국군이 동학군을 진압해 주기를 애걸합니다.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규슈에서 일으킨 서남전쟁 반란을 진압 했지만 토사구팽
당한 무사들의 불만 을 다독여야 하니 조선 대신에 대만에 군대를 파병 했던 것인데....
서구문물을 도입해 국력을 키우고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 일어나자 기회를 잡게됩니다!
죽창에 화승총이 주무기인 오합지졸 농투성이 동학군 이 뜻밖에도 부패하고 무능한 관군을
격파하고 이씨 왕조의 발상지 인 “전주” 를 점령하자 진압할 힘은 없고 그렇다고....
상놈인 동학당에 기득권을 양보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던 조선 조정은 손쉬운 길 을 택합니다.
손 안대고 코푼다고 청나라에 동학군 진압 을 요청하니.... 일본군도 텐진조약에 따라 조선에 출병 하는데
아베 신조 전총리의 외고조부인 오시마 요시마사 의 4천은 인천에 상륙해 서울 무혈입성후 4천이
증강되자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을 포로 로 잡아 친일내각 을 세운후 아산만에 상륙한 청군을 공격 합니다.
일본 해군 제1유격대 요시노, 아키츠시마, 나니와 호는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풍도(豊島) 에
정박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해 광을호를 격침 하니 제원호는 백기를 올리고 도망칩니다.
그러고는 엽지초 제독이 이끄는 성환의 3천명 청군 을 일본군 오시마 요시마사가 4천 으로
공격하니 청군은 500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포로 를 내고는 평양으로 달아납니다.
이어 오시마 요시마사와 증파된 일본군은 평양으로 진격 하니 9월 15일 15,000 명의 청군을 향해 일본군
5사단 12,000 명이 공격해 현무문을 부수고 진격 하여 단 하룻만인 다음날 평양성을 함락 시킵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청군은 평양에서 2,000 명의 전사자와 600명의 포로 를 내고
달아나니.... 일본군은 이를 추격하여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로 진격 합니다.
청일전쟁 2년 전에 러시아 황태자가 도쿄 에 오자 청나라 이홍장은 독일에서 구입한 거대한 최신식
군함 정원과 진원 2척을 도쿄만에 보내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 하게 했는데, 2년후 해전에서 그
실체가 들어나니 전투는 장비 보다는 지휘관의 전술과 훈련된 병사들의 숙련도 가 좌우한다는 것을.....
육전에서 승리하는 한편 일본 해군도 북상하여 압록강 입구에서 9월 17일 황해해전 이 일어나니
요시노등 12척 일본 군함은 정원호등 14척 청나라 북양 함대 를 거포와 속사포로 공격 합니다.
청나라 북양 함대 는 5척이 침몰하고 6척이 파손 된채 여순으로 달아나는 데, 일본측은 침몰은
한척도 없고 단지 4척만 파손 되었을 뿐이니.... 전투력의 차이 를 실감하는데, 군함의
크기나 대포의 사정거리등 전력은 청나라가 훨씬 뛰어났지만 지휘관과 병사 훈련이 부족 했다는?
일본군 제 1군은 압록강을 도하 하고, 제 2군은 여순 반도에 상륙 하여 금주를 점령하고 여순
으로 쇄도하여 공격을 시작한지 불과 하루 만에 11월 21일 간단히 여순을 함락 합니다.
이때 너무나도 손쉽게 여순을 함락한 달콤한 기억때문에 10년후 러일전쟁에서는 고전 합니다!
일본 해군도 산둥반도의 위해위 점령후 유공도의 중국 함대를 공격 하는데... 일본의 작은 어뢰정 한척 이
야밤에 유공도에 잠입해 어뢰를 쏘니 저 거대한 군함 정원호가 단 한발 어뢰에 파손 되니 함장은 배를
자폭시켰으며,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 를 전멸 시키고는 청나라 제독 정여창의 항복 을 받게 됩니다.
청나라 해군 지휘관들은 밤에는 전투도 쉰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경계를 너무 소홀히 했다는....
이후 일본군이 천진과 북경을 위협 하고 복건성 팽호도를 점령하니 중국 본토를 점령할 기세
라... 청나라는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서 1895년 4월 여기 시모노세키에서 조약 을 체결합니다.
일본은 조선을 차지 한데다가 거액(청나라 1년 예산의 2.5배) 의 배상금 에 중국의 영토인 요동반도,
대만, 팽호도 를 할양 받았으니 300년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 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저런 청일전쟁에 대한 회상을 접고는 회의장을 나오니 이토 히로부미 와 북양대신
이홍장 의 상반신 동상 이 나란히 서 있는데 그 옆 도로가 “李鴻章道
이홍장 도로” 이니..... 그것 참, 이곳을 방문하는 중국 관광객들은 입맛 이 쓰겠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야욕 은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 을 끌어들여 3국 간섭으로 반대하니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 (배상금은 좀 더 주고 요동반도 이권은 러시아에!) 했고..... 조선 마저 고종이
새벽에 엄상궁 가마에 발을 치고 엄상궁 뒷자리에 타고는 경비병에게 뇌물을 주고 경복궁
에서 탈출해 러시아공사관 으로 도피해, 친일내각이 무느지고 친러내각을 세우니 좌절 됩니다!
일본은 절치부심 피눈물을 흘리며 군사력 을 기르고 영일동맹에 미국을 우방 으로 만든후에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에야 조선을 차지 하게 되는 것이니..... 한가지 슬프고 분한 것은 조선이
망하는 모습 이라....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 대국이 망할 때는 "처절한 대전투" 가 있어야 했으니?
나라가 망하는데 전쟁은 커녕 전투 조차도 없었으니? 조선 조정의 병조에서 작전명령 을 내려,
조선 관군이 일본군과 공식적인 전투 를 단 한차례도 치르지 못했는데.... 다시말해
조선군이 일본군 에게 총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나라가 서류상에서 망했던 것이라....
지금의 한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무기와 탄약을 대줄 정도로 군사강국에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1453년 동로마 비잔틴 제국 이 오스만 투르크에 망할 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는 말에 올라
소수의 기병과 함께 적진으로 돌격 하니 몸이 적의 창칼에 넝마 처럼 찓겨져 죽었는데....
고종은 홍건적때 개경을 버리고 안동으로 달아난 공민왕 처럼 말을 탈줄 몰랐으니 어쩌랴?
인조도 말을 탈줄 알았으면 강화도로 무사히 도망쳐 항전할수 있었을텐데 가마 타고 가느라....
정원 한켠에는 이토 히로부미 를 칭송하는 비석 외에 복어 동상 도 서 있는데, 복어 가
여기 시모노세키 특산물 인 줄은 진즉 알지만...... 그래도 영문을 모르겠네요?
통계를 보면 시모노세키는 일본 전체 복어잡이의 70% 를 차지한다고 했으니 상징 이라?
구 영국 영사관 이며 아키다 상회와 미모스조천 공원 그리고 해협 꿈의 타워 등 시모노세키시
관광지 사진을 보고는 겐페이 전쟁 때 여기 시모노세키 단노우라 해전 에서 8살 어린 나이 로
바다에 뛰어 들어 죽은 안토쿠왕(천황) 의 아카마진구 赤間神宮(적간신궁) 신사로 올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