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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알바라신2 - 알바라신에서 골목길을 걸어 언덕을 올라 알바라신 성에 오르다!
2026년 5월 17일 사라고사 Zaragoz-Delicias 역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을 남쪽으로
달려 테루엘 Teruel 역에 도착해 언덕을 올라 토리코 광장에 도착해
다시 언덕을 넘어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토.일요일은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답니다.
스페인 여자분들의 도움으로 닫힌 문을 두드려서 경비원에게 부탁해 자가용 택시를 불러 타고
40분을 달려서 깊은 산속에 자리한 알바라신 Albarracín 에 내려서는.... 언덕길을
올라 도시의 중심인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을 지나 Hotel Albarracín 에 체크인을 합니다.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에서 궁전 Palacio Episcopal 이나 대성당 Albarracín Catedral 에 갈까
하다가 저긴 나중에 보기로 하고..... 먼저 알바라신 성 Alcázar de Albarracín 을 보려고 합니다.
골목길을 올라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접어드니 가파르고 좁은 산길이 보여 올라가는데, 산에 비스듬히 난
가파른 길은 오른쪽은 수십미터가 넘는 경사면이니.... 경사도가 워낙 급한 탓에 마치 절벽 처럼 보입니다.
조심조심 산길을 올라가는데 위쪽에서 사람이라도 내려오면 마주쳐서 지나갈 때는 서로 산쪽으로
붙고 싶은 생각마저 하면서 산 정상에 올랐는데..... 참으로 놀라운 것이 이런 산 꼭대기에
다시 엄청 높고 튼튼한 성벽을 쌓아 올렸으니, 그 집념과 기술에 경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알바라신 Albarracín 이라는 도시 이름은 11세기에 이 지역을 지배했던 이슬람
북아프리카 베르베르계 바누 라진 (Banu Razin) 가문에서 유래했다는데,
‘라진의 아들들의 장소’ 라는 뜻의 알-바누 라진 (al-Banu Razin) 이 변형된 지명입니다.
시리아 다마스커스에 수도를 둔 이슬람 우미이야 왕조가 북아프리카를 손에 넣고는
712년에 바다를 건너 스페인땅을 침공해 게르만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
스페인과 남부 프랑스를 지배하게 되고 기독교도 일부는 피레네 산맥으로 달아납니다.
알바라신 지역은 8~ 11세기에는 이슬람계 타이파 (Taifa) 소왕국의 중심지로 번영
했으며, 11~13세기에는 피레네 산맥에서 기독교 왕국이 남진하니, 영주령
으로 독립된 지위를 유지하다가 1285년에 기독교 아라곤 왕국에 합병되었습니다.
1961년에 알바라신 마을 전체가 스페인 국가 기념물로 지정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가 되었는데...
다양한 세력이 지나간 역사는 알바라신 건축물, 집 구조, 성벽, 골목에서 생생하게 발견할수 있습니다.
다카스커스의 우마이야 왕조가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압바스 왕조에게 망하니 우마이야 왕조의
안달루스 총독이었던 유수프는 왕 (말리크) 을 칭하고 스페인은 아랍으로 부터 독립을 합니다.
하지만 몇년후 755년에 망한 우마이야조의 왕자인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시리아를 탈출
하여 안달루스에 당도해 유수프 왕에게 도전했는데.... 마침 알바라신이
속한 사라쿠스타( 사라쿠사) 는 바스크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기에 거의 독립 세력이 됩니다.
756년 아브드 알 라흐만이 안달루스 (스페인) 대부분을 장악한 후에도 사라쿠스타의 후사인 알
안사리는 명목상으로만 복속했다가, 774년 스페인에 세워진 후우마이야조가 아닌
바그다드 압바스 왕조에 복속을 표하며 독립했으니 외교는 원교근공이고 적의 적은 우리편이라?
이에 아브드 알 라흐만은 압둘 말리크 우마르를 보내 토벌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777년
이슬람 후우마이야왕국 바르셀로나 총독인 술라이만이 프랑크왕국
샤를마뉴에 복속한후 778년에 프랑크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사라쿠스타에 당도합니다.
그러니까 사라쿠스타와 바르셀로나등 여러 아랍계 이슬람 소국들은 도읍지 코르도바
를 장악한 후우마이야 왕조의 직접 지배를 모면하기 위해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에 명분상 복속하거나 프랑스땅의 프랑크 왕국에 구원병을 청하게 됩니다.
적인 멀리 떨어진 기독교 왕국의 원군을 빌려서 기까이 있는 같은 이슬람 후우마이야왕국의 지배를
막으려고한 것인데.... 프랑크는 이참에 북부 스페인을 손에 넣고자 대군을 몰아 내려왔으니
원군을 청한 아랍계 타이파들은 물론, 같은 기독교인 바스크족들도 기겁을 하고는 방어에 나섭니다.
사라구스타 (알바라신이 속한 사라고사) 의 후사인은 복속을 거부하니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는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한가운데 독일 국경에서 반란이 일어난 탓에 포기하고 돌아가다가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바스크 인들에게 패하니 이른바 유럽의 오랜 서사시 “롤랑의 노래” 입니다?
롤랑의 노래 (La Chanson de Roland) 는 필리프 1세 치세인 11세기 말엽에 쓰여진 프랑스 왕국의
서사시인데, 유럽에서는 이교도 이슬람군과 싸워 장열하게 전사한 기독교도 기사 롤랑을
노래했지만, 실제로 롤랑이 싸운 적은 이슬람이 아니고 훗날 기독교도가 되는 바스크족 군대였다는?
“롤랑의 노래” 는 총 4,000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중에게 구어로 전달되었는데, 1834년
발견된 옥스포드의 앵글로노르만어본이 원본으로 인정되며, 3세기 전에 벌어진
기사 롤랑 최후의 전투를 노래하고 있으며 주제는 기사도와 봉건 도덕관에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사도 문학의 정수라고 알려지는데.... 롤랑과 전우 올리비에의 죽음은 롤랑의 저돌적이고 무모한
성향 때문이며..... 샤를마뉴는 계속된 전쟁에 지치고 휴식을 바라는 한탄을 하는데, 적들
또한 단순히 사악하기만 한 악당이 아니니 기사도 문화가 긍정적으로만 그려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주인공인 롤랑은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오히려 결함이 많으니, 그는 무모한 행동을 하며 그 탓에
아군 측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은데, 그가 인정받는 부분은 무수한 적을 상대로 했을때
보이는 굳건한 의지와 용맹한 무예니 결국 자신의 목숨을 이슬람 왕국에 대한 승리와 맞바꿉니다.
인물들이 추구하는 명예와 영광에 대한 집착은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데, 롤랑은 어려운 전황에도
원군을 요청하는 뿔피리를 좀처럼 불지 않으니 이는 도움을 청하지 않는게 더 명예롭기 때문입니다?
778년 8월 15일 실제로 있었던 롱스보 (론세스바예스) 전투를 배경으로 했는데, 중세인들의
오해와 창작으로 인해 실제 역사와 다른 점이 많으니..... 가장 크게 다른건 그가
이교도인 이슬람 군대와 싸웠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피레네 산맥의 바스크족과 싸운 것입니다.
Carles li reis, nostre emperere magnes
우리 위대한 황제 샤를 왕께서는
Set anz tuz pleins ad estet en Espaigne.
칠 년 동안 내내 에스파냐에 계셨다.
수많은 전장을 치른 샤를마뉴 (카를 마르텔) 의 프랑크군이 이슬람교도가 지배하는
히스파니아 원정을 가니 궁지에 몰린 히스파니아 사라고사의 마르실 왕은
올리브 가지를 신하들한테 쥐어 주고 사신으로 보내 개종할 것을 밝히며 항복합니다.
롤랑은 지략과 화술이 뛰어난 의부 가늘롱을 항복 교섭의 사자로 추천하니 비극의 시작으로 가늘롱은 자신
을 사지에 몰아넣은 롤랑에게 앙심을 품고 죽일 것을 결심하고는 이슬람 마르실왕을 회유하는데
성공하니 12 팔라딘만 제거되면 히스파니아와 프랑크 사이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마르실 왕을 부추깁니다.
'샤를마뉴 왕이 퇴각할때 12 팔라딘이 후미를 방어할 것이다. 많지않은 군대만 남을 거니 공격하면 성공
할수 있을 것' 이라며..... 자신이 나서 롤랑이 뒤에 남게 일을 꾸미니 가늘롱의 계략은 성공합니다.
롤랑은 2만의 군사와 함께 롱스보 (스페인 론세르바예스) 계곡에 남겨지고, 곧 마르실왕이 거느리는 50만(?)
의 이슬람군이 습격해오니, 10만명씩 부대를 나눠 차례차례 프랑크군을 공격해 기운을 소모시키는
차륜전을 전개했지만 팔라딘들이 쓰러지기까지 무수한 패퇴와 이슬람 용사들의 죽음을 대가로 치러야 했습니다.
롤랑은 샤를마뉴로 부터 뿔고동을 건네 받았는데, 위험에 처했을때 불면 도우러 달려
오겠다고 약속한 물건이었으니..... 적의 군세가 생각보다 더 크자 롤랑의
절친한 친구이자 12기사인 올리비에는 전투 전에 롤랑에게 뿔고동을 불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롤랑은 아직 위험에 빠지지 않았고 더욱 의부 가늘롱 까지 위험에 빠지게 할수는
없다며 싸움을 계속했으나, 결국은 올리비에의 말이 맞음을 인정하고
나중에서야 뿔나팔을 불었으니 얼마나 세게 불었는지 코와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올리비에는 눈을 다쳐서 소리를 의지하며 처절하게 싸우다가 사라센인 마르가니스에게
뒤를 찔리고 동시에 반격으로 마르가니스의 목을 날려버리고 사망
하며, 롤랑은 뒤랑달로 마르실 왕의 오른손을 날려버리고 마르실의 외아들을 죽입니다.
모든 팔라딘과 프랑크군이 쓰러지고, 홀로 남은 롤랑은 연못으로 말을 몰아갔으니 말은
도착하자 힘이 다해 쓰러져버렸고 이슬람군이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었으니
롤랑은 검인 뒤랑달 만큼은 넘겨주지 않고자 바위를 세게 내려쳐 부러뜨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3번을 내리치도 뒤랑달은 흠집 하나도 나지 않고 오히려 바위가 동강나고 지면
이 갈라져 버리자, 죽을 때까지 적을 베어나갔고 그렇게 전사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신에게 기도를 올렸고 천사 가브리엘이 내려와 그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이후 샤를마뉴 왕이 도착했을 때는 팔라딘 10명과 후위 부대는 이미 전멸한 뒤였으니
전사한 팔라딘들의 무구들을 다른 선봉대에 있는 기사에게
하사하였고..... 배신자 가늘롱을 체포하였으며 히스파니아인들을 철저히 도륙합니다.
이때 히스파니아인들의 구원 요청을 받고 바빌로니아를 다스리는 사라센 대군주 발리강이
대함대를 이끌고 도착해 샤를마뉴왕의 본군도 큰 피해를 입으니, 발리강이 휘두른
칼에 샤를마뉴의 투구가 부서지고 샤를마뉴는 두개골이 드러날 정도의 중상을 입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샤를마뉴의 부상을 순식간에 치유하고 새 힘을 주어
샤를마뉴는 발리강을 죽이고 승리하니, 이 소식을 들은 마르실 왕은 화병으로
죽어버리고 왕비와 귀족들은 샤를마뉴의 포로가 되어 왕비는 그리스도교도로 개종합니다.
롤랑에게는 연인 알데 (오드) 라는 여인이 있었으니 히스파니아 원정 전 롤랑과 약혼한 사이였는데 전쟁이
끝나고 귀환한 샤를마뉴로 부터 롤랑의 죽음을 전해 듣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맙니다.
결말에서는 가브리엘 천사로 부터 또 다른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침략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샤를마뉴는
또 이교도들과 싸우러 가는데..... 11세기에 집대성된 것으로 알려진 필사본 롤랑의 노래 줄거리 입니다.
중세 유럽 군인들은 롤랑의 노래를 군가로 불렀다는데, 존 왕이 롤랑 같은 기사도 없는데 그 노래는 뭐하러
부르냐며 타박을 주자, 종자는 "샤를마뉴 같은 왕이 있어야 롤랑도 있을 거 아닙니까?" 한방 날렸답니다.
극중에서 이슬람교도들은 유일신이 아니라 마호메트(무함마드) 와 아폴랭이나 타르바강등 3명을 신으로
섬기며, 롱스보 전투에서 패배하고 신들을 비난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모두
유일신을 믿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임에도 이슬람을 고대 다신교와 똑같은 종교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적은 저런 “롤랑의 노래” 는 실제 역사와는 너무나도 다르니 역사를 왜곡한
창작 소설에 가까운데.... 첫째는 롤랑의 군을 습격한 군대는 이슬람이 아니라
바스크족이니, 당시 바스크족은 기독교화가 안된 이교도이지만 이슬람은 아니었습니다.
샤를마뉴의 지위도 다르니 교황 레오 3세를 보호해 준 대가로 ‘서로마 황제’ 칭호를 받은 799년 크리스마스
이전까지는 그냥 프랑크 국왕이었고, 또 롱스보 전투의 양쪽 군대 규모도 저것 보다 훨씬 적으며 적도
이슬람군이 아니고 마르실왕도 없었으니 영화 명량 처럼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하며 거짓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훈시 ‘롤랑의 노래’ 에서는 롤랑군 2만명과 동료 장군 10명 (샤를마뉴의 12 기사 중
10명) 이 후미를 맡았다고 나오지만 롤랑의 군대는 2만이 아닌 3,000여명에
불과하고..... 바스크족 군대는 그 규모 마저 불명확하며 많았다고만 전해질 뿐입니다.
가장 큰 왜곡은 7년간의 원정에서 이슬람 세력을 거의 쫓아냈다는 설정인데.... 샤를마뉴는 12년간 스페인
에서 싸웠으나 스페인 전 지역은 고사하고 사라고사도 함락 못해 교두보 조차 확보못했으며 문학을
장려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 샤를마뉴지만 스페인 원정만큼은 기록조차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다음 샤를 마뉴가 뿔고동 소리를 듣고 군대를 돌려 돌아와 이슬람 군대를 박살냈다는 것도 사실
이 아니며 그는 그냥 돌아가버렸고.... 더욱 바빌로니아를 다스리는 사라센 대군주 발리강이
대함대를 이끌고 도착해 싸웠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며, 샤를마뉴가 두개골이 드러날 정도로
부상을 입자 하늘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감쪽같이 치유해 주었다는 얘기도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중세시대 유럽에서 전설과 무훈시가 종교적 편견과 맞물렸으니, 스페인에 침입해 눌러앉은 이슬람 세력에
반감이 ‘롤랑의 단순한 전사’ 를 ‘이교도에 맞서는 고결한 기사의 장엄한 죽음’ 으로 변화시켰는데,
에드워드 사이드는 롤랑의 노래를 ‘기독교들이 편협한 이슬람관(觀)’ 을 갖는데 기여한 작품으로 꼽았습니다.
‘롤랑의 노래’ 에는 종교와 정치도 숨어 있으니 샤를마뉴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앵프 성을 구하라’
는 명령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루살렘으로.... 사건은 8세기 후반이지만 민간에게
퍼진 시기는 11세기 초이니, 로마 교황이 예루살렘 탈환을 호소한 1095년과 시기가 맞물립니다.
문제는 이런 왜곡이 서구인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았다는데 있으니 마쓰오카 세이고 (松岡正剛) 는
‘프랑스어가 생기고 롤랑의 노래가 만들어진게 아니라 롤랑의 노래가 프랑스어를 만들었다.’
즉 롤랑의 이야기를 편집하고 각색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어 라는 언어 규칙이 확립됐다는 것입니다?
1066년 영국을 침공했던 노르망디공 윌리엄의 군대는 전투 직전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구호
‘기독교는 언제나 옳고 이슬람은 나쁘다’ 를 반복하며 전의를 가다듬었다고 하니 샤를마뉴
의 신격화와 십자군 전쟁 동원 극대화를 위한 날조였지만...... 세계사 곳곳에 흔적을 남깁니다.
대항해를 통한 해외진출, 제국주의 침탈에 까지 롤랑이 스며있으니 미주 대륙은 신이 백인에게 준
선물이라는 ‘명백한 운명’ 과 서구인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는 키플링의 ‘백인의 책무’,
황인종의 발흥을 막아야 한다는 러시아 차르의 ‘황화론’ 까지 모두 ‘롤랑의 노래’ 의 변형판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