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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0. 묵상글 ( 연중 제15주일 목요일. - 일상의 노고와 고통이 나의 십자가인가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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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0. 연중 제15주일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일상의 노고와 고통이 나의 십자가인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을 얻는 방법은 당신 마음의 온유하고
겸손한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타인에 의해 지워지는 짐도 있고 나의 잘못으로 지는 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무거운 짐이 십자가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일상의 십자가를 잘 지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면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는 참 십자가의 의미를 잃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십자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래 이야기에서 이 사람의 진정한 십자가는 무엇인지 발견해봅시다.
마이크 블랙은 100억 대의 사업가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잠시 접어두고 무일푼 노숙자로 시작해서 1년 안에 10억을 버는 챌린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목적은 젊은이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도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과 도전의 용기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판매할 수 없는 자신의 일상을 담아야 하는 카메라, 휴대전화, 그리고 옷 한 벌입니다.
자신의 전문 분야 사업을 하면 안 되고 자신의 인맥에 도움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신용이나 가족, 친구, 현금, 자산, 전문지식, 인맥,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진짜 리얼로 길바닥에서 맨땅에 아무것도 없이 그의 챌린지는 시작됩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물 한 잔 얻어 마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조금씩 이 챌린지를 시작한 것을 후회합니다.
한 푼도 못 벌고 노숙 생활을 하며 음식도 먹지 못하여 말라갑니다.
그는 첫날 저녁부터 눈물을 흘립니다.
다행히 모르는 사람이 며칠 재워주기도 하지만,
집이 없다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면서도 한 푼도 벌지 못합니다.
그저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먹고 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이크는 아이삭이라는 인상 좋은 사람의 도움으로 며칠을 카라반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슬슬 사업을 시작합니다.
스마트폰으로 남이 버리는 가구를 팔아 이익을 배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모으는 동안 그는 돈이 없어 오로지 콩만 먹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사업화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좀 모이자 집도 하나 월세를 내어 자신도 살고 나머지 방들은 세를 줍니다.
잠도 자지 않고 일을 합니다.
자그마한 사무실도 임대합니다.
이 과정에 실패도 겪었지만, 그래도 돈은 조금씩 쌓여갑니다.
12주 차 6,600불의 현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사업은 그가 관심을 가지지 못하자
매달 25,000불의 적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이제 인터넷으로 커피를 판매하려고 합니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타겟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익 중 일부를 유기견 보호센터에 기부하는 형식입니다.
첫 판매도 이루어지고 어느 정도 사업이 궤도에 오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32주가 지났을 때 그는 임대업으로 1,600불의 현금흐름을 일으킬 수 있었고, 커피 사업으로만 34,000불을 법니다.
그러는 와중에 아버지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전화를 받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는 얼마 못 삽니다.
그는 챌린지를 계속해야 할까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차피 시작한 것 끝까지 가보라고 합니다.
마이크는 아버지를 자신의 월세 집에 모시고 돌봐드리며 사업을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42주 동안 달려온 그도 건강이 악화하여 건강에 문제까지 발생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챌린지를 포기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42주 동안 맨땅에서 시작하여 그의 통장엔 64,000불을 찍었습니다.
노숙자에서 10개월 만에 8천만 원의 돈을 모으게 된 것입니다.
2개월 더 했다면 10억을 벌 수 있었을까요?
어쨌건 마이크 블랙은 자신의 건강도 챙기고 아버지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며 좋은 곳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챌린지는 비록 실패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도 처음 사업을 할 때 5천만 원의 빚을 져서 고통스러워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면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이크 블랙의 십자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자기 사업이 월 3천만 원씩 적자가 나는 것?
아버지의 대장암? 친구들의 비웃음? 먹을 것이 없고 잠잘 곳이 없었던 인생 최대의 고통? 아닙니다. 그의 십자가는 이것이었습니다.
“아무것 없이 시작해도 믿고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은 마음.”
이 마음 때문에 그는 그 많은 고통을 사서 겪어야 했습니다. 그 마음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구원하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은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받는 고통이나 어쩔 수 없이 받는 고통은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냥 무거운 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을 받아들여 멍에로 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십자가를 진 사람이고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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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0. 연중 제15주일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인생은 고생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라고 하신 주님 말씀을
삐딱하게 이해하면 그러니까 오해하면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자만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시고 그렇지 않은 자는 초대치 않으시는 줄로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실 리 없으시고,
또 고생하지 않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고,
다만 주님께 가는 자와 가지 않는 자가 있을 뿐인데,
그런데 주님께 가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루의 힘든 일을 끝내고 선술집에 가는 사람이나
피로를 풀기 위해 오락이나 쾌락을 찾아가는 사람이나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에게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고단한 인생의 해법을 찾고자 하는 사람일지라도
점쟁이나 인생 스승을 찾아갈 뿐 주님께 가지 않는 것입니다.
참 스승이요 구원자이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고
그분이 두 팔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찾아갈 주님이 있는 우리는 얼마나 복됩니까?
이는 힘들 때 찾아갈 친정엄마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주님을 찾는 이유가 잘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짐을 벗겨 주시기 위해 오라고 하신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 가운데 그런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안식을 주겠다고 하셨지 짐을 벗겨 주겠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어떻게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고,
그러니 그 비법을 배우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비법이 바로 주님의 멍에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매고 짐을 지면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멍에가 편한 이유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짐을 거부하지 않는 마음이기에 편하고 안식을 줍니다.
그리 좋은 예는 아니지만
처음 목줄을 매는 강아지는 거부하기에 목줄이 불편합니다.
목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조이고 더 불편해지지요.
그러다가 벗어나길 체념하고 목줄을 받아들이는 순간 편해집니다.
고생이나 무거운 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생이?
왜 나에게 이런 무거운 짐이?
이렇게 거부하는 마음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거부하는데도 주어지는 것 때문에 분노하면 그 마음에는 더더욱 안식이 없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이란
고생과 무거운 짐이 마땅히 내 거라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사실 인생은 고생입니다.
이걸 받아들이면 안식이 마음의 평안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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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0. 연중 제15주일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나그네가 바랑을 지고 다니듯, 바랑이 없는 거지도 끼니를 챙겨야 하는 ‘짐’을 져야 하듯, 오늘도 우리는 삶을 ‘짐’으로 지고 살아갑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있고, 수도자로서 스스로 짊어진 ‘짐’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자녀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가족으로서 함께 져야 하는 ‘짐’이 있습니다.
질병과 육신, 상처와 나약함, 분노와 원망을 ‘짐’으로 지고 가기도 합니다. 형제를 ‘짐’으로 지고 가고, 세상을 ‘짐’ 지고 가며, 자기 자신을 ‘짐’으로 지고 갑니다. 자신만이 짊어져야 하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짐’이 있고, 부당하게 떠맡겨지는 ‘짐’도 있고, 피하고 싶은 ‘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떠맡기기도 하고, 다른 이의 ‘짐’을 떠맡기도 하며, 함께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탄생과 더불어 생명을 ‘짐’으로 짊어지고 살아가고, 살면서는 죽음을 ‘짐’으로 짊어지고 죽어갑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그런데 나의 몸에서, 나의 짐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고 있는가?
사실, 예수님께서도 ‘짐’을 지고 가셨습니다. 세상을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아니, 그 ‘짐’을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그 ‘짐’을 지고서야 가실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결코, 그 ‘짐’을 지지 않고는 가야할 그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십자가 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길을 갈 수 있도록 를 도와주고 북돋아줍니다.
사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짐’이 아니라, 짐을 지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오히려 ‘짐’으로 하여, 우리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짐’이 우리를 짊어지고 가는 까닭입니다. 정녕 ‘짐’을 지고서야 갈 수 있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짐’이 없이는 가지를 못하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짐’은 우리를 북돋아주고 도와주는 은총입니다. 그 ‘짐’은 저를 구원으로 이끄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에"에 짐을 올려놓고 그리스도와 함께 짐을 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갑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그리스도의 멍에에 짐을 올려놓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몸소 우리의 ‘짐’마저 짊어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짊어진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고서 제가 갈 길을 사랑으로 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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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0. 연중 제15주일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앞서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계명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계명을 다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하셨으며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고 선언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율법을 가르치시고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1요한5,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평생을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헌신하신 부모님을 바라보면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식은 혹시 부모를 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부모는 자식을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의탁하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말씀에 힘입어 끝까지 희망을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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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0. 연중 제15주일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랫동안 절에 다니던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얘야 절에 있는 부처님은 풍채도 좋고 자비로운데 성당에 있는 예수님은 삐쩍 마르고 고통스럽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할머니의 느낌을 들으면서 공감이 갔습니다. 부처님 상은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합니다. 대부분 자비로운 모습입니다. 예수님 상은 대부분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피를 흘리는 모습입니다. 부처님은 고통에 대해 ‘성찰’하였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꺼질지 모르는 욕망과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삼독에 의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고통,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는 고통, 거짓된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고통은 ‘집착’에서 오기 때문에 그 집착을 버리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을 비롯하여 아시아로 전파되었는데 큰 박해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성찰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행복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부처님이 말한 고통과 예수님이 말한 고통은 드러나는 현상은 비슷하지만 그 원인은 달랐습니다. 부처님이 말한 고통은 그 원인이 ‘욕망’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고통은 그 원인이 ‘대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어리석은 것 같이 보였지만 그 길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부활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로마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도 100년 정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남에게 바라는 대로 여러분도 남에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을 자주해야 합니다. 험담을 하거나,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고운 말을 하면 사랑의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나쁜 말을 하면 원망의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서 치유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손을 높이 들어 하느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손을 내밀어 지친 친구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손을 가슴에 대고 나의 허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웃의 짐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도 합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손입니다. 남을 때리는 것도 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주신 것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함께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들의 곁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셨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진 많은 사람들은 그릇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길, 재물의 길, 명예의 길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사랑의 길, 희생의 길, 나눔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안내 해 줄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누군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고 싶다는 뜻으로 ‘사명’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가톨릭 신앙인이다.’ 이 말에는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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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0. 연중 제15주일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영원한 안식처’이시다
-정주와 환대-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시편90,1)
교황님은 바티칸에서 일하는 분들의 자녀들중 5세에서부터 13세까지 250명 아이들을 위한 여름 캠프에서 아이들과 주고 받은 대화들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세대를 초월하여 80대 후반의 할아버지 교황님이 10대 전후반 아이들과의 기탄없는 대화가 참 경이로웠습니다.
“교황님의 슈퍼 영웅(superheroes)은 누구입니까?”
한 아이의 질문에 대한 교황님의 답입니다.
“조부모가 나의 슈퍼영웅이다. 나는 그분들의 지혜를 생각한다.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참으로 중요했다.”
어렸을 때, 어른들의 좋은 영향력은 아이들의 밑거름이 되어 노년에까지 큰 성장 동력이 됨을 봅니다. 노인은 많은데 어른이 없다는 세상에 참 어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열정의 교황님입니다. 어른하면 생각나는 바 든든한 배경의 산같은 분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여기서 산은 제가 35년 동안 정주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다 본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불암산은 제 정주와 환대의 스승인 주님을 상징합니다. 요셉 수도원의 정주영성과 직결된 환대영성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하여 면담성사를 본 착한 자매와의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의 청담淸談도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늘 멋지고 품위있게 사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마가렛꽃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꽃말은 ‘진실한 사랑’이라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신부님, 계시는 존재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참 좋습니다. 꽃말이 너무 이쁩니다.”
“단아端雅하기가 자매님을 닮은 마가렛꽃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런 향기로운 청담은 주고 받는 모두에게 사랑의 자양분이 됩니다. 어제 산책중 처음 발견한 마가렛꽃이 참 반가웠습니다. 꼭 1년을 기다렸다가 아무도 돌보지 않았는데 거기 그 자리에 다시 피어난 정주와 환대의 청초한 보라색 마가렛꽃을 보니 수차례 인용했던 ‘환대는 꽃처럼’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찌프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틀 몇날이든
언제나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반가이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주차장 옆 코스모스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구나
볼 때 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무려 23년전 여기 요셉수도원에서의 시입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과 꽃들이 상징하는 바 정주와 환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삶의 중심 자리에 정주하시면서 마음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시는 주님입니다. 이래서 주님의 집인 정주의 요셉 수도원은 환대의 집이 되고,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축복, 환대의 아름다움등 끝이 없습니다. 사랑의 초대에 이어 사랑의 환대입니다. 반면 무시와 냉대의 아픔은 얼마나 길게 지속되는 지요! 주님이야말로 끝없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사랑으로 초대하시며 환대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초대와 환대를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의 초대요 환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강렬합니다. 제가 고백성사 보속시 참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차별없이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안식의 품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환대를 그대로 반영하는 요셉 수도원입니다. 대부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생존에 허덕이는 광야 여정중의 참 측은하고 가엾은, 영육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짐은 가볍다.”
그러나 값싼 은총은, 안식은 없습니다. 부단한 선택과 훈련, 습관화없이는 은총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참된 안식도 없습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학인이기에 평생공부는 필수입니다. 무슨 공부입니까?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날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의 멍에를 메고 배움의 여정에 충실할 때 주님을 닮아 온유와 겸손의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불편한 내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무거운 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변합니다. 값싼 은총, 값싼 평화, 값싼 자유, 값싼 안식은 결코 없습니다. 100% 주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 했습니다.
참으로 평생학인이 되어 부단히 치열히 온유를, 겸손을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하여 주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참된 안식에 참된 평화에 참된 자유입니다. 이래야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고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탈출기의 모세와 복음의 예수님이 너무 닮았습니다. 어제 봤다 시피 두분의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입니다. 예수님의 예표로 손색이 없는 참 매력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광야여정의 수련중 단련되어 황금같이 단단하고 순수로 빛나는 모세를 찾아 오신 하느님을 환대하여 긴밀한 기도의 대화를 나누는 참으로 진지하고 침착하며 열정많은 모세입니다. 모세를 환대하는 주님이요 주님을 환대하는 모세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시고 흉금을 열고 자신의 계획을 소상히 밝히십니다. 얼마나 모세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주님이신지요! 주님과의 이런 깊은 친교의 만남이 주님과 관계를 한없이 깊이 했을 것이며 모세에겐 내적 힘과 안식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닮아 겸손과 지혜, 신뢰와 자비의 사람이 되었을 모세입니다.
바로 여기서 계시되는 “나는 있는 나다.” “있는 나”로 계시되는 하느님이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이 되시는 분입니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I AM sent me to you)
영어로 쓰면 분명히 드러나는 “I AM(있는 나)” 하느님 이름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I AM with us)”, “우리를 위해 있는 하느님(I AM for us)”임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하느님 이름인지요! 바로 이런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으니 바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신, 늘 우리를 위해 계신,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하고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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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0. 연중 제15주일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에 기로에 서서 슬픔을 갖지 말아요. 어차피 헤어져야 할거면 미련을 두지 말이요. 이별에 기로에 서서 미움을 갖지 말아요. 뒤돌아 아쉬움을 남기면 마음만 괴로우니까. 아무리….”
이 노래 제목이 뭘까요? ‘멍에’지요. 노래의 내용을 보자면 ‘사랑의 아픔’이 그 주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멍에’는 아프고 힘든 상처라는 것이 노래의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태어날 때도 마땅히 머리 누일 곳이 없었습니다. 율법에 대해 옳은 말을 했다고 누명을 씁니다. 또 사랑하는 제자에 의해서 팔려 가는 신세가 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 가장 큰 멍에는 욕설이나 매질이 아니라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이 가볍다고 말하는 ‘멍에’입니다. 이것이 가볍다고 이야기하는 사랑의 상처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볍습니까?
우리의 멍에는 가벼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각자의 멍에는 다 무겁습니다. 어떨 때는 버거워서 버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힘들다고 하소연할 때도 없이 무거움과 외로움에 더욱 아파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나와 하느님만이 아는 멍에입니다. 절대로 가볍지 않은 상처이고 아픔입니다.
주님은 그 멍에가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잘 읽어 보면 그 무거운, 외로운 멍에가 가벼운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멍에가 가벼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는 꼭 갈대와 같은 것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고 또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뿌리째 뽑히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겸손은 내가, 내 마음이 첫째가 아니라 하느님이 그 첫째 자리에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나를 생각하기보다 하느님을 생각하게 되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우리가 지금 지고 있는 멍에는 버릴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배우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이 부드러울 수 있는 온유의 은총을, 그리고 나를 생각하기보다 고통도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겸손의 은총을 청하십시오.
입은 하나, 귀는 두 개
오늘 후배 신부님이
이곳에 방문했습니다.
그냥 얼굴 보고 싶어 왔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인 입은 최대한 조용함을 유지하고
두 개의 귀는 열심히 듣고 또 들었습니다.
가끔 역정과 따뜻함으로 격려도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따뜻한 식사를 나눈 후
후배 신부님은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출발하는 차의 창을 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오늘 들어줘서 고마워요.
힘이 좀 납니다.
역시 귀가 두 개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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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0. 연중 제15주일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카데미 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 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이혼 후 싱글맘으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 두 아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연기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남편이 언론에서 자기 험담을 할 때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불공평이야. 서러움이 있지 왜 없어. 그런데 그 서러움을 내가 극복해야 하는 거 같아. 나는 내가 극복했어.”
또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살아있는데 어떻게 스트레스를 안 받겠냐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고, 행복한 일이야.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딨어?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지만 다 아프고 다 쉬워. 하나씩 내려놓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해. 난 웃고 살기로 했어. 인생 한번 살아볼 만해. 진짜 재밌어.”
윤여정 배우처럼 관점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관점을 바꿔보면, 사는 모습 자체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로 재미있는 인생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관점 바꾸기 어려워합니다. 관점은 다른 이가 바꿔주지 않습니다. 또 상황이 바뀌어야 관점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관점은 바로 나만이 바꿀 수 있고, 또 외부 상황이 변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이 변해야 바꿀 수 있습니다. 나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우리 힘이 부족함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커다란 위로가 되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보통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덜어주실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까지 다 벗겨 주시면 좋으련만 그것은 그냥 씌워 놓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다 없애시면 좋지 않을까요? 바로 우리의 몫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사라지게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하지 않고서 얻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몫은 나의 관점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나의 관점과 나의 마음을 바꿔서 주님을 향하는 것, 주님과 함께하는 것, 주님 안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불공평하고 서러움이 많은 세상이라면서 불평불만 속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아닌, 스스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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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일에는 일치가, 불확실한 일에는 자유가, 모든 일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요한 23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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