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있어서 ‘사유’란 애초 물질적 존재로서의 사물을 정신적 존재인 작가의 대리물로 간주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를테면, 사유는 초기 작품에서처럼 사물들이 자연적 존재로서의 사물이기 이전에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힘을 과시하면서, 융기하거나 함몰하는 자태, 아니면 인간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어져 포효하는 모습을 작가 자신이 약동하고 찢겨진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자연을 자신의 인격적 사유주체로 간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종래 그가 다루었던 자연의 사물들은, 이런 데서 사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작가가 그 자신과 투쟁하고 있는 어두운 내면의 심상을 대변하였다. 작가가 지탱하고 있는 실존으로서의 모습이 그러한 것처럼, 그것들 또한 어두운 침묵 속에서 물화되고 신음하는 모습으로 다루어졌다. 그가 그린 ‘산’은 어느 덧 깊은 어둠을 안고 가까스로 숨쉬는, 이를테면 살아있는 자연의 ‘환영’으로서 그려졌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의 모습에 진배없었다. <도시의 환영>은 원경스타일의 비스타비젼을 상기시키는 수평대작들과 수직빌딩의 근접비젼을 다룬 중간 크기의 작품들이 대종을 이룬다. 근작들은 종래에 보여준 두꺼운 안료의 마티엘을 다소 완화하는 대신, 이것들을 작은 네모로 쪼개어 파편화한 미세 조각들의 올오버 화면을 등장시킨다. 이들 미세조각들은 도시의 집들과 건물들을 시사하는 한편, 파편들이 상하좌우로 도열된 화면은 생기를 상실한 인체의 피부를 상기시킨다. 거칠고 으깨어진 네모의 점경들의 무수한 집합에서 거대 도시의 환영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상주하면서 도시의 분신으로 존재하는 인간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상상케 한다. 이들 화면은 작가가 현실을 직시하고, 여기에 그 자신의 내면 세계를 중첩시킨 이중화면으로 읽힌다. 그것들은 우리가 물질화된 존재로서 살아가야 할 운명을 반영한다. 사람의 얼굴 대신 파편으로 존재하는 편린들의 반복이 인간들의 운명을 대변한다.
<도시의 환영>은 사람이 소외된 익명의 도시이고 그 얼굴이다. 익명의 도시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환영이 살고 있는 도시의 표상이다. 사람의 실체가 상실되고 온기를 잃어버린 도시의 얼굴이다. 그래서 김성수의 근작들은 어둡고 무겁고 지층같은 색료의 두꺼움 만큼이나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는 도시의 얼굴이 아닐 수 없다. 근작 <도시의 환영>은 생명의 빛을 상실한 현대 도시의 차가움을 작가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근작들은 실체를 상실하고 환영이 지배하는 현대의 도시를 궁극적으로 비판한다. ‘비판’criticism으로서의 풍경이다. 그렇다! 김성수는 어느덧 비판을 앞세운다. 애초 그는 자연의 사물을 빌려 작가 자신의 생명의 약동을 드러내려는 데서 ‘그림’을 시작하였다. 그림을 그리면서 ‘사유’를 감정에 앞세웠다. 이제 그는 사유의 최전선에다 비판의 날을 세운다. 비판의 날을 세우고자 함이 근자에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 할 수 있다. 비판은 원래 1930년대 이래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존재해온 근본이유이기도 했다. 호르크하이머를 위시한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학자들과 이들을 추종하는 작가들이 자본주의가 초래할 미래사회를 예견하고 이를 비판한 데서 연유하였다. 화가 김성수가 비판의 시선에 주목한 건 그가 지난 날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던 데서 떠나 물화된 도시를 그리면서였다. 이 때문에, 김성수의 근작들은 회심의 전환점에 서있다. 자연을 사유할 때 사용했던 색료의 해맑은 밝음과 두터운 어둠의 대비가 사라졌다. 그 대신 모노톤의 네모 패턴을 반복해서 도열하고 중첩함으로써 모노크롬 화면으로 대체되었다. 이것들은 물화된 도시의 질량처럼 육중함을 드러낸다. 이는 고독한 도시인의 내면풍경이자 현실에 대한 고뇌에 찬 비판을 시사한다. 그는 이즈음 자신의 회화를, 한편으로는 보다 더 자신의 내면에 근접 시키고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 사유의 날을 세우는 양도논법을 구사한다. 그의 근작전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댓글 좋네예~~~은은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