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옷장 _ 환대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할 때 어린이 찬양을 종종 듣습니다. 밝고 명랑한 멜로디의 어린이 찬양을 틀어놓고 어제 못한 설거지를 하기도 하고, 세탁기도 돌리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죠. 잠이 덜 깨 몽롱하고 마음이 분주한 아침 시간, 경쾌하고 신나는 어린이 찬양은 활력소가 됩니다. 그 중 제가 참 좋아하는 어린이 찬양을 한 곡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2015년 감리교 여름성경학교의 주제 찬양이었던 ‘하나님의 옷장’이란 노래입니다. 이 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옷장을 열어보니
날 위해 준비한 사랑의 옷 가득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 선물이
오늘도 날 찬양하게 해
아담과 하와의 가죽 옷
아들을 위한 용서의 새옷
강한 하나님 군대의 전신갑주
천국으로 가는 구원의 세마포 옷
노래 할래요 하나님 사랑
따라 갈래요 하나님 말씀
우리에게 늘 좋은 옷 입히시는 주 은혜
노래 할래요 하나님 사랑
따라 갈래요 하나님 말씀
우리에게 늘 좋은 옷 입히시는 주 은혜
이 찬양은 성경에 등장하는 네 가지 옷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 담겨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심을 상징하는 아담과 하와의 가죽 옷, 용서를 상징하는 탕자의 새 옷, 우리를 강하게 하는 전신갑주,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는 세마포 옷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 저희가 주목해볼 옷은 아들을 위한 용서의 새 옷입니다.
그 전에 성경에서 바울이 사용한 옷과 관련된 표현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것과 같다(갈 3:27)' 고 했습니다. 또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아야 한다(롬 13:14)' 고 조언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로 보내는 편지에서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는 ‘칭의’라는 중요한 교리를 거듭 강조해서 설명하는데, 이 ‘칭의’도 시각화 한다면 결국 죄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는 옷이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막 신앙을 받아들인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는 개념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이미지화해서 설명하기 위해 ‘옷’이란 소재를 활용한 것이죠.
이제 다시 아들을 위한 용서의 새 옷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상속받고 대차게 집을 나간 둘째 아들. 하지만 그는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결국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도저히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지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 밖에는 살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후로 수시로 저 멀리 들판을 바라보며 아들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눅 15:20), 아버지는 저 멀리서 보이는 아들을 보고 달려나갑니다. 누더기를 걸친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 아마도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 용서의 옷,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담긴 새 옷을 입혀줍니다.
여러분과 저 역시 이 용서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던 우리들에게 이제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포해주신 '그분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가 행해야 할 구체적인 행동을 저는 아들을 맞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아버지를 잊고 방탕한 삶을 살고 온 아들을 아버지는 마음을 다해 환대하며 맞이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따듯한 ‘환대’의 모습니다.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 인류학자인 저자는 우리가 환대를 통해서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건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환대'라는 것이죠.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입혀준 용서의 옷과, 아버지의 깊고 따스한 환대를 가만히 묵상해봅니다. 여러분과 저 역시 하나님의 한량없는 환대를 받았고, 여전히 그 환대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따스한 온기를 오늘 내가 만나는 누군가에게 살며시 전달할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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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나 싫으나 어차피 우리는 설교자이니까 성경 말씀을 콘텐츠로 해서 글을 써보는 걸 시도해보라'는 김기현 목사님의 조언이 오랫동안 내 주위를 맴돌았다. 내가 애써 외면해온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수면 위로 끌어 올려주신 것 같아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글쓰기에 맛을 들인 후 오랫동안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뭘까, 나만의 콘텐츠는 뭘까, 난 어떤 글을 잘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작가 은유는 뭔가 딱 규정짓기 어려운 불확실한 글들을 썼던, 그 어정쩡한 시간들이 돌아보니 글쓰기의 동력이었다고 했건만, 나는 나의 이 어정쩡함에 질려 익사해버릴 것 같았다.
그런 중에, '어차피 지금은 어떤 글이든 시도해 볼 수 있는 때이니 이제 성경 말씀을 콘텐츠로 해서 글을 써보라'는 말을 들은 것. 솔직히 그동안 사역이 즐겁지 않았고, 사역자라는 정체성에 회의감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사역의 자리를 벗어나려고도 시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자라갈 수록 점점 더 내 길은 사역자로, 설교자로 좁혀졌고 이제는 체념하고 받아들인 상태였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씀이 있지만 나는 설교준비를 할 수록 뭔가 가슴이 얹힌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말씀이 나를 자유케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얽매는 창살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는 솔직담백한 에세이들을 읽을 때 위로를 얻고 자유로움을 느꼈다. 에세이에서 시작된 독서는 자기계발서, 글쓰기 관련 작법서, 인문학 서적들로 범위를 넓혀갔고 성경과 신앙서적이 아닌 이런 류의 책을 읽고 사유할 때 내 세계관이 훨씬 더 넓어지고 다채로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어정쩡한 글들을 써오면서 나만의 콘텐츠에 목말라 하고 있던 올해 4월 와중에 '로고스 서원 글쓰기 학교'를 알게 되었다. 자기만의 콘텐츠로 글을 쓰는 글벗 분들을 보며 다시금 글을 정기적으로 쓰며 책으로 엮일만한 어떤 주제의 글을 쓸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됐다.
위의 글은 성경 말씀을 콘텐츠로 삼은, 나의 첫 글이다. <룻기 묵상 28일> <간절함의 자리> 를 쓴 오지영 작가의 글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나도 만약 신앙적인 글을 쓴다면 이런 분위기의 글을 쓰고 싶다 생각했기에 이 작가와 비슷한 문체와 분위기와 흐름으로 글을 쓰려고 많이 참고를 했다.
어차피 설교자로 살거면 내 글의 주된 콘텐츠는 성경이 될 수 밖에 없다. 다만, 그 성경의 이야기들이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그리고 깊은 사유가 담긴 인문학 도서들의 내용을 잘 융합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첫 시도를 해보았다. 과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내 글쓰기에도 적용이 될 지, 앞으로 몇 주간 계속 실험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