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50년전인 1975년 강원도 속초 인근 바닷가였습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장마철이고 태풍도 불었습니다. 여름방학이지만 1학기의 거의 대부분을 휴교 내지는 휴강을 했기에 방학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바닷가는 대부분 철거에 들어갔고 오고갈 데 없는 일부 청춘들만 바다의 공백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닷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김민기 '친구'
1970년대 중반 대학가는 그야말로 개점휴업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학교 운동장에는 탱크와 군인들이 진을 쳤습니다.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군인은 바로 얼마전까지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던 학우였습니다. 시위자와 시위를 진압하는 군인으로 다시 만나니 세상에 대한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날 학교앞 막걸리집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김민기 '아침이슬'
1979년 그 늦가을 그리고 이어진 겨울 한국의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전국에 엄습했습니다. 박정권이 붕괴되고 봄이 오려냐 했지만 그 봄은 한국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전두환이라는 또 다른 군부세력이 봄이 오는 길목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새로운 희망도 봄을 맞을 설레임도 송두리채 빼앗긴 땅에 비는 내립니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 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아름다운 그 이는 사람이어라."- 김민기 '아름다운 사람'
1970년대 1980년대 암울했던 시절을 찢는 가슴으로 노래했던 김민기 선생이 2024년 7월 2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73세입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청년이 어떻게 하다가 시국을 논하고 세상사를 풍자하는 음유시인이 되었을까요. 군사독재시절 그는 눈엣가시였습니다. 젊은이가 세상을 바라보며 불렀던 노래가 체제비판 노래라며 금지곡이 되고 강제로 군입대까지 합니다. 그가 배치받았던 군 내무반에서 선임이 네가 그 유명한 김민기이냐 노래 한번 불러보라해서 만든 노래가 '늙은 군인의 노래'라지요.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김민기 '늙은 군인의 노래'
1970년 80년대 김민기의 노래음반은 판매 금지품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청계천 뒷골목에서는 한 장에 몇만원 (지금으로 치면 수십만원)에 팔렸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그 음반을 사서 몰래 집에 가져와 숨죽여 듣던 그 순간이 지금도 가슴에 저리게 떠오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참으로 트라우마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한국의 대중 문화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의 업적을 논하기에는 제 필력이 너무 빈약합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예술혼은 영원히 이 나라 이 문화에 살아 남아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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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3일 베트남 호치민시티였습니다. 베트남의 영웅이자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호치민 선생을 찾아 떠난 여행지였습니다. 저녁무렵 한국인들이 많이 산다는 7군 푸미흥에 들러 저녁을 먹는 중이었습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어서 한국방송을 볼 수 있었습니다. 뉴스가 시작되고 얼마 있어 노회찬 국회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동안 멍한 상태로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혁명은 고깃집에서 불판을 통 채로 바꾸는 것입니다. 반면 개혁은 불판에 붙은 지저분한 것들을 하나 하나 떼어놓는 작업입니다. 불판을 통 채로 바꾸는 것이 쉽지 불판의 붙은 떼를 벗겨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다. 개혁은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노회찬의 '혁명과 개혁'
노회찬 의원은 진보정당계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진보정당 소속 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높은 대중성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제대로 된 진보세력을 이루어내겠다고 나선 몇 안되는 그야말로 진보 정치인이었습니다. 말로만 진보가 아닌 실질적인 진보세력 그리고 진보적인 사회를 이루겠다고 발 벗고 나선 인물이었습니다.
"노회찬은 옆집 아저씨같은 사람이었다.국민과 똑같이 사는 생활인이었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음악과 문학 영화 요리 낚시를 즐겼고 머리카락과 얼굴에 대해 가끔 걱정했다. 그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말이 그의 삶과 같았고 그의 삶이 국민의 삶을 닮았기 때문이다.". '옆집 아저씨 노회찬' 中.
노회찬은 스스로 서민적으로 살고 싶었던 인물입니다. 그의 명연설이라는 '6411버스를 아십니까'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심금을 울리는 연설입니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서울시 구로구 가로수 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서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입니다.이 버스는 새벽 4시 정각에 출발합니다. 출발한지 몇분만에 버스는 만석이 됩니다. 얼마후 버스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찹니다. 새로운 사람이 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매일 같은 사람들이 탑니다.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타고 강남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내리는지 모두가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스입니다. 탑승객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간이기에 매일 이 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 아저씨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중략)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노회찬의원 2012년 진보정의당 당대표 수락 연설중.
그런 그가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결국 2018년 7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어떻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천근 만근같습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호치민시티는 그날 밤 새벽까지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김민기· 노회찬 두분은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이 다녔다는 최고의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대학도 이른바 스카이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평범하게 일반인들이 걸어가는 그 길을 갔다면 낭만을 아는 예술가로 또는 국회의원이라는 울타리속에서 편하고 안락하게 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분은 평범한 그리고 자신의 안락만을 영위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아랫목을 거부하고 거칠고 차가운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과 삶을 함께 했습니다. 그들의 생에 동반자가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참으로 피곤하고 힘든 삶이었지만 김민기· 노회찬 두 분은 그런 삶속에서 살아가는 길의 의미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으로 힘들게 그리고 타인은 차마 이해하지 못할 생을 영위한 뒤 이승을 떠난 두분의 명복을 빌며 김민기· 노회찬 두분의 인생에 존재했던 그 길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묻습니다.
2024년 7월 22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