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주간 토요일
히브리 4,12-16 마르코 2,13-17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계명과 율법을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문자로 기록해 주신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고, 실제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에 걸맞게 거룩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생활이나 음식이나 모든 일에서 부정해지는 것을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에 자주 언급되는 바리사이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
몰두하였던 이들입니다. 유다인들의 의도는 좋은 것이었지만 거기에서 부정적이거나 배타적인
여러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데
그 대표적인 이들이 죄인과 세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의문을 가집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이들의 생활 방식을 생각하면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염두에 둔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으로 여기는 이들을 부르러 왔다.’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들 또한 예수님의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잘못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스스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그릇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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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연중 제1주간 토요일
히브리 4,12-16 마르코 2,13-17
“ 나를 따라라.”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그 중에 하나가 이웃이 자신에 대한 악한 비판일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변명하기 바빴고 또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큰 걱정을 안고 살았던 흔적을 회상해봅니다. 세상에 살면서 사람의 눈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
더군다나 사랑의 마음보다는 미움과 편견의 시선을 느낄 때, 또 다른 고통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관계가 미묘해서 어제의 이해하고 가깝던 친구가 오늘은 남 보다 더 못되게 구는 사이가
될 때도 있는 것이지요.
오랫동안 들어서 익힌 M.Haydn 작곡 성가 27번 ‘이 세상 덧없이’의 2절
‘출렁이는 바다의 물결 파도 같이 한결같지 못함은 사람의 맘 이네. 어젯 날의 우정도
변할 수 있으니, 변치 않을 분 홀로 천주 뿐 이로다.’라는 가사가 더 마음에 닿습니다.
만일에 정치할 기회가 주어지면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시겠는가?’라는 질문에 공자님께서
대답한 말이 떠오릅니다. 중국 고서 논어(論語)의 술이(述而)편에서 그 경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공자님의 대답이 ‘포호빙하(暴虎氷河)’, ‘필야임사이구 (必也臨事而懼)’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하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다’는 기개의 사람이 아니라
‘마땅히 일에 임해서는 두려워해야 한다.’라는 말대로 일에 있어서는
소심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언젠가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1970년 5월에 당신의 사제서품 50주년을 기념하여
사제서품을 집전하시고 새 사제들을 위해 바치셨던 기도 중에 한 부분이 떠오릅니다.
“감수성 풍부하면서도 겁도 낼 줄 아는 어린이의 마음 같은 순결한 마음을 주소서.”
교황님께서는 이어서 그리스도의 심장과 고동을 함께 하며 “온갖 유혹과 시련, 온갖 싫증과 피로,
온갖 환멸과 모욕을 견디어 내는 넓고 강한 마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덕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하고 대인관계에서 실망과 고통을 겪고 나서야 얻는
결실이라고 하겠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사람도 시련과 실망을 겪은 연후에야
진정한 우정도 대인관계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이렇게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리서 4,14-15)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완전한 의인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너무 쉽게 이웃을 형편 없이 비판하는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의 인도로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힘을 줍니다. 또 많은 이들에게 버림을 받고 모퉁이의 돌이 되셨다는 사실도
또한 우리의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시편 저자가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2.23)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며 포도밭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중에
이 시편을 인용하십니다.(루카 20,17)
마르코는 주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를 부르신 대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세리는 돈의 여유는 있을지는 몰라도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아울리시며 꼴 보기 싫은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당시 상식으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7)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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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모세 신부
연중 제1주간 토요일
히브리 4,12-16 마르코 2,13-17
일치 주간의 첫째 날 우연히도 우리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르 2,14)의
소명 이야기를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레위를 기꺼이 당신의 제자로 뽑으셨고,
이어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죄인들의 친구’로 낙인찍히셔야 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의
문턱은 눈에 띄게 낮아졌습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신학교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던 저는 막상 신학교 지원을 앞두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저녁 미사를 드리는데 그날 복음이 바로 오늘 복음과 같았습니다.
복음이 봉독되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2,14)
하는 말씀을 들을 순간부터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영성체를 어떻게 하였는지, 미사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습니다.
미사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앉아 있다가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며
일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마르코 복음 청년 성서 연수’에 참여하여 오늘 복음을 다시
만났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그럭저럭 넉넉하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은, 좀처럼 충족되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레위의 마음도 제 마음도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제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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