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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olution or Reform, That is the Question
(탄핵 소동이 한창이던 당시 올렸던 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후 헌재에서 인용되어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났다가 뇌물죄로 수감되시어 옥고를 치르시던 중 문재인에 의해 사면되시고 대구의 사저로 내려가셔서 칩거하고 계시는 지금까지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이름만 대한민국일 뿐 1948년 초대국회에서 제정된 헌법은 사실상 사문화 되었고 그저 문재인과 윤석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법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글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헌재에 접수되어 심의 중이던 당시 올렸던 글인데 그 후 포스팅한 글들을 정리하고 재정비하면서 삭제했다가 최근 돌아가는 한심한 상황을 보고 그 당시를 돌아보면서 그 때와 지금의 우리들의 정신자세를 비교해 보고자 약간의 손질과 몇 줄의 추가를 한 후 다시 올린다.
혁명과 개혁... 우리의 운명은 어느 쪽이 될 것인가?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사전을 참조해 보면 “권력이나 조직구조, 혹은 사상이나 문화 등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의미한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혁명의 경우는 정치적 혁명이기에 권력과 사회구조의 갑작스러운 교체를 혁명이라고 할수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혁명의 주체는 권력자가 아닌 비 권력자가 권력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사회구조의 갑작스러운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개혁의 사전적 의미라면 “본질적이고 급진적인 변화가 아니고 사회의 어느 특정한 부분의 점진적인 변화”라고 되어있다.
정치적 개혁이라면 권력과 사회구조의 교체가 아니고 권력자가 주체가 되어 기득권자들과 비 기득권자들간의 권력이나 부의 분배를 타협에 의해 조정하는 것이라고 할수 있겠다.
혁명이란 단어와 개혁이란 단어를 그 객체를 정치사회적 구조에만 한정하고 위의 정의를 받아들이고 판단한다면 개혁의 경우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대화와 타협에 의해 쟁의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기에 양측의 극단적인 의견 대립도 드물고 폭력과 유혈사태가 생길 가능성 역시 낮아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의 영국이나 일본이 그러한 경우라 할수 있다.
그러나 혁명은 이야기가 다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혁명이 여러차례 있었던 것을 알 수있는데, 우선 로마의 위세를 등에 업고 중동과 북아프리카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유럽인들을 몰아낸 모하메드에 의한 회교혁명이 있고 그 후 숱한 귀족들의 목을 날린 프랑스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러시아의 11월 혁명 등등, 그리고 바로 우리나라의 4.19 혁명이나 5.16 혁명등이 그 예가 될수 있겠다.
이들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혁명이란 기득권을 포기하기를 거절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피 지배자를 억압하는 기득권자들을 피지배자들이 폭력등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내 쫓고 기득권자들이 가졌던 기득권을 빼앗아 재분배하는 급진적인 권력의 교체와 사회구조의 재편성을 말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폭력이 필수적인 수단으로서 필요했었기에 항상 유혈사태가 따랐었다.
뿐만 아니라 개혁은 이미 확립되어있는 법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합법적인 것이라 할수있고 혁명은 법 질서를 어기면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개혁과 혁명은 그 과정에서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된다.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이 선거법을 공공연연히 위반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저지르는 선거부정에 분노한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난 항의시위가 것잡을 수 없이 커지자 당황한 정부당국의 발포명령으로 시위학생들 등 200명 가까운 사망자와 그 외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유혈사태를 야기했고 결국 아직 임기가 덜 끝났던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당시 정부통령 당선자였던 이승만-이기붕 두 사람의 당선무효로 이어진 4.19 혁명을 가져왔다.
이 경우 정부에 의한 선거부정이라는 위법행위를 제쳐 놓는다면 형식논리상으로 이승만-이기붕은 합법적인 정부통령 당선자이고 이에 항의하여 시위를 일으킨 시위대는 불법난동 세력이 된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이 자기들이 저지른 선거부정이라는 불법적인 행위를 시정하기를 거부하고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국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공권력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이것을 단속하고 억압할 뿐 아니라 국민들이 이러한 공권력 남용에 대해 항의를 하거나 권력자들의 시책에 다른 의견을 갖는 것 행위 자체를 불법화하고 그러한 억압정책이 기득권자들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보호 내지는 방조하는 하는데까지 미치게 되면 이러한 악성 불평등은 결국 전 국민적인 불만을 낳게된다.
이러한 전 국민적인 불만이 계속 누적되어 어느 상태에 이르면 고압솥이 폭발하듯 국민들이 더 이상 법에 문제의 해결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의 손으로 정의를 실현하기위해 봉기를 하게 된다.
즉 법이 정의구현의 수단으로서 기능을 다하지 못 한다고 국민들이 판단하게되면 기득권자들이 불법적이라고 부르는 “봉기”를 하게 되고 이것을 기득권자들이 “공권력”이라고 부르는 폭력으로 진압하려들면 국민들 역시 자위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여 이것에 맞서게 된다.
이러한 충돌의 과정에서 기득권자들에 의해 불법적이라고 분류되는 국민들의 폭력에 기득권자들을 지켜주는 공권력이 굴복하게 되면 기득권자들의 권력은 무너지고 사회구조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혁명에 성공하려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 있다.
개혁은 강자가 약자의 반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혹은 좋은 마음으로 못 가진 자들에게 약간의 양보와 분배를 허락하는 것이지만 혁명은 전혀 다르다.
혁명은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도 없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갖춘 기득권자들을 상대로 싸워서 이들을 몰아내고 이들의 손에 있는 권력과 사회적 특권을 빼앗이 이를 재분배 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혁명이란 힘없는 자가 힘센 자와 싸운다는데서 개혁과는 완전 반대로 보아도 될 것이다.
그 것은 개혁의 주체는 기득권자인데 반해 혁명은 그 주체가 비 기득권자, 혹은 피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그 혁명의 과정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영화 “자랑과 정렬”에 나온다.
당대 최 신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의 나폴레옹의 군대와 그에 붙어 부역하는 스페인의 기득권자들로 구성된 매국노 집단의 군대가 합세해서 무자비하게 퍼부어 대는 포탄과 총탄에 맞서서 손에 든 것이라고는 삽과 괭이등 농기구 밖에 없는 무식한 시골 농군들이 무수히 쓰러져 가면서 덤벼들어 마침내 기득권자들을 몰아내고 수도 아빌라 성을 탈환하고 나폴레옹 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는 장면은 혁명을 일으키는 소위 혁명투사가 되려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극명하게 설명해 준다.
삽화로 전개되는 이 영화의 타이틀 씬의 장면들 중 말이나 소가 없어 초대형 대포를 수도 아빌라까지 맨 손으로 밀고 끌어서 운반하느라 사력을 다하는 농민군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위해 한 팔로 아이를 안은 여인이 남은 한 쪽 손으로 힘겹게 대포를 미는 모습이 있는데 대한극장에서 본 그 장면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아주 오래 전이었는데도 아직도 기억에 뚜렷하기에 그 부분을 아래에 퍼왔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로부터 딱 1년 후에 4.19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투사가 되려면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는 빨갱이들의 태양인 가짜 김일성 김성주가 잘 말해 주었다.
김성주는 혁명투사로서 인정받을수 있는 조건으로 다섯가지를 갖추라고 했다고 한다.
그 다섯가지는 모두 다섯가지 다른 과정으로 죽을 각오로 투쟁하라는 것인데 다섯가지를 다 듣고 보니 중복되는 게 있어 셋으로 줄여 말한다.
그것은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고” 하는 이 세가지다.
혁명투쟁을 하는 도중 기득권자들의 개들에게 쫓기면서 제대로 몸을 덮지도 못하고 한데서 떨면서 자야하고 끼니도 못 얻어먹어 배 곯아야 하고 그러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악랄한 고문기술자에게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지독한 고문에 시달려야하고 그러다 보면 투쟁 도중에 죽거나 병신이 되는 일이 허다할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종북들이 민족의 원수요 친일의 상징으로 여기는 이승만 박사는 사실은 일경에 붙들려 고문을 하도 많이 받아 그 후유증으로 죽을 때까지 안면경련 증세로 시달렸으나 정작 종북 자기들의 태양 김성주는 아무런 그런 고문이나 굶주림과 추위로 고통받는 극단적인 투쟁경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는 문제로 한국은 완전히 모든 인프라가 마비되어있는 모양세다.
그것 때문에 국론이 갈라져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주동하고 이것을 지지하는 촛불시위대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된 태극기 시위대가 서울은 물론 전국 주요도시에서 연일 세 대결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날씨가 덜 춥고 좋을 때는 촛불시위대가 거리를 매울듯 시끄럽더니 막상 날씨가 추워지고 기타 이것 저것 주변의 지탄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촛불 시위장이 시위하는 사람보다는 구경꾼이나 술 얻어 먹으려고 오는 노숙자들이나 모여 서성대는 곳으로 바뀌고 태극기 시위장은 그야말로 온 서울 사대문안을 채우고도 모자라 온 종로 거리를 채우고 세종로, 남대문을 한참 지나 용산까지 사람들이 들어찰 정도가 되었는데 기록이라 할 만한 혹한의 추위에도 몸이 불편한 나이든 사람들이 시위대에 대거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고 촛불시위대의 시위양상이 국가 체제전복을 하겠다는 반란의 형태로 바뀌어가면서 촛불시위대에 가담하던 젊은 층들이 점점 많이 태극기 시위대로 넘어오고 있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판세가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어도 좋다는 이 세가지 각오를 가진 사람들은 그러한 각오를 가지라고 외친 김성주를 태양으로 모시는 종북집단이 아니라 그동안 병신처럼 잠잠히 있던 애국시민들이라는 웃기는 사실이 들어났다는 것이다.
내가 김정은의 입장이라면 북한이 남한을 접수했을 때 종북과 태극기집단 중 어느 쪽을 더 쓸모있는 집단으로 여길 것인가 신중히 생각을 할 것이다.
어릴 적부터 밤마다 촛불이나 들고 술판이나 벌리다가 낮이면 여관에서 남녀가 서로 부등켜 안고 떼씹이나 하고 딩굴면서 게으름이나 피우던 이런 밥버러지나 다름없는 족속들인 종북들에게 무엇을 시킬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이유에서 나 같으면 일단 남한의 종북집단들은 수용소로 끌어다가 모두 죽여버리는 일부터 할 것이다.
그리고 태극기들고 투쟁하던 남한의 애국세력 인사들은 장기분단으로 괴리된 남북간의 문화적 사상적 재 봉합을 하고 그간의 적대관계로 국력이 소모되는 바람에 지연되어온 경제건설을 하는데 종사하도록 재교육을 시킬 것이다.
현재 남한에서 날뛰고 있는 종북주의자들은 사실은 투쟁에 필요한 정신력이라곤 전혀 없는 허깨비같은 것들이다.
이들 촛불시위대에 가담해 있는 인간들의 게기름이 번지르르하고 피둥피둥한 얼굴을 보면 이들이 평소에는 직장을 다니며 열심이 일하기 보다는 민주화보상금이나 자금원을 알수 없는 곳에서 주는 돈이나 까 먹으면서 빈둥거리는 무위도식자들임을 단번에 알수있다.
나는 그래서 지금 광화문에서 촛불들고 설치는 종북주의자들을 전혀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본다.
종북주의자들이 투쟁력이 있었던 시절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죽은 김근태 세대로 끝났고 지금 날뛰는 인간들은 한 마디로 온실에서 자란 세대로서, 그야말로 계란도 못 깨는 겁쟁이들로 보면 맞는다.
여리고 성 앞에서 “하나님이 저것들을 우리들 손에 붙이셨으니 저것들은 우리들의 밥이다”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절규를 여기서 내 입으로 되풀이 하고 싶다.
순해보이던 우리 민족의 투쟁능력은 이미 4.19 때 증명이 되었고 우리 태극기부대의 투쟁력 역시 그간의 촛불시위대와의 세대결로 증명이 되었다.
법리적으로 해석하면 탄핵은 당연히 각하나 기각이 되어 마땅하지만 개조까튼 헌재 나부랭이들을 보니 인용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탄핵이 인용되면 해방후 이제까지 모든 국민이 자유민주주의를 누리는 서구적인 사회로 점진적으로 변해가던 개혁의 과정은 그 순간에 정지되고 완전히 돌이켜서 그 반대로 갈 가능성이 100%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탄핵이 인용된다면 자유 민주주의 사회로의 개혁으로 가는 길은 완전히 막히고 끊어져서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탄핵이 인용이 되는 경우 우리가 개혁으로 가는 길과 혁명으로 가는 길의 두 갈레 길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는 자명하지 않은가?
산적과 맹수가 곳곳에서 출몰하고 가시덤불이 우거지고 울퉁 불퉁 자갈로 뒤덮인 가파른 고갯길이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뚫린 길은 자신을 완전히 내 던지는 희생정신과 숱한 땀과 피흘림이 요구되는 혁명의 길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모든 것을 법에다가 맡겨 놓고 기다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죽어서 입과 코에서 썩은 물이 흘러나오는 법이란 것에 더 이상 기대를 걸 수 없으니 혁명을 위한 봉기라는 극단적인 선택를 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우리 남한 민중에게 그러한 용기나 뚝심이 있는가 하고 스스로 묻고나니 참으로 비관스럽다. 참으로 비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