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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4: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1 산고를 모르는 자여 즐거워하라
이 말씀은 두 부류의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들과 남편있는 자의 자녀들이다. 즉 남편이 없는 자가 더 많은 자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잉태하지 못했고 산고를 모르는 자에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비 논리적이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로 살펴보면 '결혼한 여자의 자녀들 중에 황폐하게 된 자녀들이 많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다. 뒤에 따라오는 구절을 보면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지금도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박해(핍박)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황폐하게 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잉태하지 못하고 산고를 모르는 자에게 기뻐 외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록된 바 기뻐하라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출산의 고통을 겪지 않은 자여 크게 외치라. 이는 결혼한 여자의 많은 자녀들이 황폐하여졌음이라. (갈4:27번역)
2 여호와께서 남편이 되어 주셔서 영화롭게 하신다
이 말씀은 이사야 54장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여자는 보석으로 기초를 쌓고 꾸미게 될 예루살렘을 말하고 있다. 육체로 난 자들의 핍박으로 인해 많은 자녀들이 죽고 황폐하게 되지만 예루살렘은 다시 결혼한 자와 같고 공의로 서게 될 것이며 보석으로 꾸며지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고난이 예루살렘에 오는 것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이유이다. 즉 죄없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죄악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고난이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죄악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여 버림받고 고민하는 아내와 같으나 여호와께서 다시 남편이 되어 주시고 이제는 결코 책망하지 않고 노하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두려움과 공포도 가까이 하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젊을 때 받은 수치를 잊고 과부 때 치욕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영화롭게 하실 거라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잉태하지 못하고 출산하지 못한 자들에게 즐거이 외쳐 노래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죄로 인해 많은 자녀들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자녀가 있더라도 여호와께서 남편이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자손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교훈을 받고 큰 평안을 얻고 열방을 얻게 하실 것이다.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이다. 죄로 인해 핍박을 받고 환란을 받을 지라도 회개함으로 주께 돌아오면 온갖 보석으로 영화롭게 하시며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친히 남편이 되어 주시고 놀라운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이다.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홍보석으로 네 성벽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너는 공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며 공포도 네게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라 (사54:11-14)
3 자칭 유대인에게 박해를 당하여 쫓겨남
지금도 이삭과 같이 성령으로 난 자들을 육체로 난 이스마엘 같은 자들이 박해(핍박)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하나님의 유업을 얻을 거라고 믿으며 오히려 성령으로 난 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내고자 한다. 이 것은 계시록 말씀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기는 자는 아버지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고 결코 다시 나가지 않을 것이다'(계3:12)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땅에서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가야만 했다면 하늘 예루살렘이 이 땅에 내려 왔을 때는 오히려 성전의 기둥이 되어 다시는 나가지 않게 될 것다(계3:9-12).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3:8-12)
어떤 사람은 토라를 지키는 이방인들이 스스로 ‘내면적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자칭 유대인’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말씀의 문맥을 이해하지 못해서 오해하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고난을 당한 이유는 바로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란 언약이 없고 하나님이 없는 불법한 죄인을 의미한다. 반면 유대인이란 언약의 말씀을 지키는 순종하는 정직한 자라는 뜻이다.(갈2:15) 그러므로 자칭 유대인이라는 말은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율법(말씀중에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핍박한 것이다. 즉 말씀을 지키는 죄에서 자유한 자들이 성전에 기둥이 될 것이며 이들 위에 예슈아의 새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계3:12) 새 예루살렘에 속한 순종하는 자유자들이 율법을 듣는 자이고 이삭과 같이 믿음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롬2:26-28)
4 우리의 가치판단을 내려놓아야 들을 수 있다.
듣는 것은 구원의 문제라고 말할 정도로 성경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과연 듣는 것은 무엇인가? 예슈아께서 눈을 뜨게하신 맹인 이야기를 살펴보자(요9:13-41). 예슈아께서 맹인을 샤밧(안식일)에 치유해주셨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슈아께서 샤밧을 범한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안식의 나라의 주인이시다. 안식의 나라에는 아픔도 슬픔도 없을 것이다. 온전한 나라이므로 맹인도 그때는 볼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의 나라를 상징하는 안식일에 맹인을 고쳐주고 병자를 고쳐주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없는 일이 아닌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샤밧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예슈아를 불법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즉 아버지의 말을 듣고 그분을 아는 자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맹인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눈에 진흙을 발라 주셨고 물로 씻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말했다(요9:15). 그러나 또 다시 재차 묻자 그는 말을 했는데도 듣지 않고 또 다시 듣고자 한다며 죄인이라고 정죄하면서도 예슈아의 제자가 되려고 하느냐며 빈정(?)거린다. 그러자 그들은 맹인을 욕하며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모세의 제자라고 말한다. 맹인은 이들의 대답을 들으며 '이상하다'라고 한다. 모세의 제자들이 어떻게 사람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의 말은 듣지 않고 경건하여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듣는데 어떻게 눈을 뜨게 한 자가 죄인이라고 말하고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을 못 알아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예슈아께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못 알아보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온전히 죄 가운데 태어난 맹인이었던 주제에(?) 자기들을 가르치려 하느냐며 쫓아 버린다(요9:17-34).
이 말씀에서 예슈아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일까? 누가 메시아를 못 알아보았는가? 누가 진짜 맹인인가? 그렇다. 바리새인들이 예슈아를 못알아 보았고 그들이 진짜 맹인이다. 이들은 들어도 듣지 못해 재차 물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판단(교리) 때문에 듣지 못했다. 즉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샤밧에 아무일도 하지 말라'(출20:10) 는 계명은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예슈아는 메시아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아버지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아들이 될 수 없고 여호와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둠이 우리의 가치관을 왜곡시키면 우린 하나님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게 한다면 즉 불법을 허용한다면 그러한 교리나 전통은 거절해야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바르게 볼 수 있고 말씀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과 반대되는 우리의 생각, 옳다고 여기는 판단들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우리의 묵은 누룩을 버려야만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이 보일 것이다.
5 맹인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이 있다. 맹인은 ‘온전히 죄 가운데 태어났다’는 것이다(요9:34). 과연 그럴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제자들도 예슈아께 질문했다. 누구의 죄 때문에 맹인으로 태어났느냐고 물었다. 부모의 잘못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잘못인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 예슈아께서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the works of GOD)을 나타내려고 하신다고 말씀하셨다(요9:1-3). 그리고 예슈아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이 샤밧에 할 수있는 일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되었다(요9:16). 반면 맹인은 예슈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 경건한 분으로 믿었다(요9:31). 예슈아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맹인이 눈을 뜨게 하고 본다고 하는 자들을 맹인이 되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다. 즉 하나님의 일은 샤밧에 맹인을 온전케 하는 것이었고 본다고 하는 자들을 맹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사람이 맹인이 된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모든 맹인이 이 사람과 같은 사명일까? 그렇지 않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명은 물론 다를 것이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9:1-3)
오히려 말씀을 통해 맹인이 진정으로 보는 자였으며 듣는 자였음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슈아의 말을 뜯고 "그럼 우리가 맹인이라는 소리냐"라며 항변한다. 이때 예슈아께서 하신 말이 놀랍다. "만약 맹인이라면 죄가 없다. " 영어를 직역하면 그렇다. 분명 제자들은 맹인으로 태어난 이 사람은 누구의 죄때문이냐고 물었고 바리새인들은 맹인에게 온전히 죄 가운데 난 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말한다. "만약 맹인이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이 말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전혀 죄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오히려 이 말씀을 통해 우린 맹인 더 진정 보는 자였고 경건한 자였음을 볼 수 있다. 바리새인이 이스마엘이었다면 이 맹인은 이삭이었고 예슈아를 보고 믿는 자였다. 하늘 예루살렘에 속한 자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39-41)
또한 맹인을 출교시킨 유대인은 계시록에서 말하는 자칭 유대인에 속한다. 즉 유대인이면서도 율법을 듣지 못하는 자들, 본다고 하나 깨닫지 못해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자칭 유대인인 것이다. 지킨다고 하나 사람의 교리와 전통을 지킴으로 율법을 폐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은 아닌 것이다(막7:8,9). 이스마엘과 같이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나 이방인인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내면적 유대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롬2:26-28).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7:8,9)
6 나를 듣는 자가 되라
경청은 언어를 듣는 것이 아니다. 경청은 그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언어뿐 아니라 풍기는 느낌, 일상의 패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듣는 것이다. 또한 나의 판단은 유보해야 한다. 어떤 부분은 수용이 되고 어떤 부분은 모른 척하는 것은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내 식대로 듣는 것이다. 경청은 말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과정으로 그의 세계를 투명하게 여행하는 일이다. 어떤 것이든 판단없이 ‘그는 그렇게 살아왔구나’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의 가치판단을 내려 놓아야 제대로 그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쉽지 않아 경청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긍정적인 면은 쉽게 경청이 되고 잘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들은 왜 꼭 그렇게 생각하는지 내 안에 반론이 생기고 그래서 들리는 이야기를 그대로 듣기보다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경청 훈련에서 부정적인 면을 비판 없이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율법)을 들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가치판단이 말씀과 다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시내산에 심히 큰 나팔소리과 번개와 불로 임하셔서 토라(율법)가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우리가 정말 죄를 두려워하기 원하는 마음을 담아 나타나셨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께서 표현하시는 여러 모습들을 투명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계시록에서 말하는 귀 없는 자와 동일한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벽과 같이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무슨 말을 해도 딴 소리를 하는 소통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듣는 것을 통해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다. 소통은 듣는 것부터 시작된다. 진짜 경청할 때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알게 된다. 그러나 듣는 기술은 저절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훈련하고 연습해야 한다.
하나님을 듣기 위해 우리가 먼저 연습해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소리도 들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사실 들리는 말보다 들리지 않는 말이 더 중요하다. 태도, 표정, 몸짓 등 사람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 결국 듣는 것을 훈련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듣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이 왜곡되어 두려움으로 분노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결하지 않은 감정이 우리를 속여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우린 우리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부터 연습해야 한다. 그때 배우자의 소리도 들리고 자녀의 소리도 들릴 것이다. 앞서 말한 거처럼 들리는 말보다 들리지 않는 말이 더 중요하다. 들리지 않는 말은 무엇일까? 표정, 태도, 행동?... 이 모든 것은 사실 감정들이다. 우리가 기쁠 때 웃고 춤을 추며 슬플 때 울고 어깨가 처진다. 두려울 때 움추러들고 화가날때 얼굴이 일그러지고 빨개진다. 이처럼 들리지 않는 말은 사실 감정이다. 하나님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없애고 투명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감정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린 쉽게 우울감이나 두려움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외면해버린다.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억누르고 또 억누른다. 이러한 감정이 튀어나올 때마다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감정이 이상 신호를 보낼 때 다루지 않으면 이젠 몸에서 이상 신호를 보낸다. 왜냐하면 주인이 부정적인 감정을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젠 더 큰 증상으로 예를 들어 두통, 소화불량, 불면증, 호흡곤란 심지어 당뇨나 암으로 까지 발전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부정적인 감정은 대면하고 해결해야 한다.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들어야 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고 모두 수용해야 한다. 감정은 옳고 그름이 없다. 어떤 것도 잘못된 것은 없다. 희로애락의 감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므로 모두 선하다. 그런 감정을 우리가 대면할 때 더욱 건강하게 표현될 수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빛나는 보석을 주셨는데 그 보석이 감정이라는 포장지에 싸여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두려움이라는 감정, 우울감이라는 감정, 분노의 감정을 대면하고 인정해주고 원인을 찾아 해결할 때마다 포장지가 벗겨지고 보석을 발견하게 되어 빛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린 부정적인 감정을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보화를 바라보아야한다. 억눌러 왔던 감정을 벗겨내야 보혈로 씻어진 아름다운 보화를 맞이할 수 있다. 보화에 눈을 고정할 때 우린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갈 수 있다. 모든 것을 객관화하여 보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너무 큰 문제로 부풀려져 대면하기 두려워했던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두려움을 이기고 자신의 소리와 대면하면 마침내 자신을 묶고 있던 감정의 실타래에서 드디어 해방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소리를 진정으로 듣고 우리의 창조 목적을 깨닫고 진정한 자유를 얻을 것이다.
7 듣지 못하면 유업이 없다.
성경은 율법을 듣지 못하고 율법 아래에 머무르려 하는 자들을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노릇하는 이스마엘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율법을 듣지 못하면 유업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듣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앞에서 맹인에 대해 나누었다. 누가 진정한 맹인이었는가? 사실 육체적인 맹인은 죄가 없다. 오히려 더 경건한 자였다. 오히려 샤밧의 의미를 잘 모르던 이스마엘 같은 자들이 맹인이었으며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듣지 못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것도 귀머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듣는 자이고 경건한 자이며 하늘 예루살렘에 속한 자일 수 있다. 오히려 듣는다고 하는 자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지 않는 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듣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이웃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는가? 듣는 문제는 구원의 문제이고 유업을 얻는 문제인 만큼 심각한 사항이다.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성경을 읽지만 다르게 해석한다. 전혀 문맥에 맞지 않는 해석을 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즉 하나님과 불통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듣고 깨닫는 것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며 지식이 있게 하고 명철하게 한다. 모두 성령(하나님의 영)의 속성이다. 우리가 말씀에 붙어있으면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말씀이 왜곡되면 악한 열매를 맺게 되고 찍혀짐을 당할 것이다. 부부가 소통이 잘 되면 그 가정은 천국이지만 부부가 불통이되면 지옥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듣는 훈련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며 신중하게 연습해야 한다. 지혜가 부족하다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자(약1:9). 분명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실 것이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사11:2)
8 유대교는 실패한 교회인가?
예슈아께서 오신 후 교회는 이스라엘 멸망시키고 성전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스라엘이며 유대인은 2000년 동안 박해했다. 그러면서 동상을 세웠는데 하나는 교회를 상징하고 하나는 유대교를 상징한다. 교회는 십자가를 들고 성배를 들고 있고 유대인은 눈이 가려져 있으며 창으로 자기를 찌르고 성경은 있으나 읽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두 여자의 상징은 교회이며 교회가 유대교를 이겼음을 상증하고 있다. 또한 유대교는 맹인과 같아서 보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 예슈아께서 맹인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다 보는 자를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하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보는 자이고 누가 보지 못하는 자인가? 사람들은 이방인 교회가 보는 자이고 유대교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슈아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교회들이 많다. 정말 그럴까? 아니라면 성경적으로 누가 보지 못하는 자인가? 바로 자칭 유대인들, 이스마엘과 같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 믿음을 아직 못만난 자들, 율법을 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자들이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럼 보는 자들은 누구인가? 이삭과 같이 믿음으로 율법을 청종하는 자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자들, 하늘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분법적 사고를 좋아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고 극단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신 사랑이 없고 자비가 없는 공포의 하나님이지만 예슈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부르신 사랑많으신 분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처음부터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신 목적은 진정한 유대인, 내면적 유대인이 되기를 바라신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예슈아때도 동일하다. 진정한 유대인이 진정 보는 자이다. 내면적 유대인은 청종하는 자를 말하며 하늘 예루살렘에 속한 자를 말한다. 그래서 남녀노소 유대인 이방인에 찿이가 없는 것이다.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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