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2주간 수요일
히브리 7,1-3.15-17 마르코 3,1-6
계명을 따르다 보면 정확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하는 계명은 무엇을 해야 또 하지 말아야 거룩하게 지내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열려 있는 가르침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도 마찬가지다 보니 라삐들은 안식일에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무엇이 노동이고 아닌지를 구분합니다.
물론 유다교에서 생명이 위독한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안식일에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위급하지 않은 지병인 경우는 다른 날에도 고칠 수 있기에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에 속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고치신 이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입니다.
복음이 정확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분명히 이 사람은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것은 규정에 어긋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 질문에 어느 누구도, 바리사이들조차 대답하지 못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은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규정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나무라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문자 그대로를 따르는 것보다 넓은 의미입니다. 어쩌면 그 계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하고 고민하는 것부터가 계명을 따르는 과정일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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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모세 신부
연중 제2주간 수요일
히브리 7,1-3.15-17 마르코 3,1-6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면 고발하려고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과 다른 관점을 가진 예수님을 어떻게든 망신 주고 혼내는
데만 쏠려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받는 이가 온전해지는 일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
아마도 고발하려는 자들이 그를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 불행한 모습을 바라보며 연민을 가져 그 무디고 완고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생기기를
바라셨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씀으로 그들을 부드럽게 다독이시며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3,4)
그러나 그들은 끝내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습니다. 입도 마음도 모두 닫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손을 뻗어라.”(3,5)라고 말씀하시고,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곧바로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난 우리이지만, 우리 마음이 때때로 무관용과 적대로
완고해지고 경직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각박해지고 입이 사나워질 때도 있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나날에 따스한 연민과 친절함이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켜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 사랑 덕분에 우리가 그리된 것이니까요.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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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주간 수요일
히브리 7,1-3.15-17 마르코 3,1-6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8살에 억울하게 3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낸 ‘흑인청년 보젤라’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보젤라가 사는 동네에 할머니가 잔혹하게 죽었습니다. 경찰은 두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보젤라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습니다. 보젤라는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했지만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었고 그렇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나중에 할머니의 집에서 다른 사람의 지문이 나왔지만 그것도 보젤라를 감옥에서 나오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32년을 지낼 무렵 무죄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단체에서
보젤라를 위해서 변호사를 선임했고 재심 끝에 보젤라는 50세가 되는 해에 무죄를 선고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32년 동안 죄를 인정하면 감형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죄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젤라에게 감옥에 있던 32년은 고통의 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보젤라는 감옥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동료 죄수를 면회 왔던 여인을 알게 되어 감옥에서 결혼도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보젤라는 언젠가 나올 줄은 알았지만 너무 긴 시간이었다고 감회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불의와 거짓이 보젤라를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보젤라의 정신과 영혼까지 감옥에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도 감옥에서 27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감옥이 만델라의 몸을 가둘 수는 있었지만 만델라의 정신과 영혼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만델라는 긴 감옥에서의 시간을 독서와 명상의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과 백인의 인종 갈등을 치유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사형선고를 받았고,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겼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감옥에서 많은 책을 읽었고, 언어를 공부했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표어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국가부도 위기를
국민들과 함께 잘 극복하였습니다. 불의한 정권이 김대중 대통령을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의 정신과 영혼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우리에게 요셉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억울하게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무고하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요셉의 정신과 마음은 자유로웠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하였고, 이집트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을 용서하였고,
가족들이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자리에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손은 멀쩡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오그라드는 것을 넘어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그라든 손으로 평생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의 아픔을 보듬어 주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한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절망하는 사람은 비록 몸은 넓은 세상에 있어도
그 정신과 영혼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이웃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비록 몸은 넓은 세상에 있어도 그 정신과 영혼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몸을 가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두려워하여라.” 저 자신은 보젤라처럼, 넬슨 만델라 대통령처럼,
김대중 대통령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큰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넓은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정신과 영혼은 때로 오그라들었고, 쪼그라들었던 적이 많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고, 허영과 교만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저의 정신과 영혼을 쪼그라들게 했습니다.
안식일은 규정과 율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안식일은 내가 있는 삶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을 수 있습니다. 그곳이 삶의 자리입니다.
편하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곳이 삶의 자리입니다.
비록 몸은 삶의 자리에서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삶의 자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은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지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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