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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애국지사
대한의 독립을 세계에 역설한 파란눈의 후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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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 1. 26 ~ 1949. 8. 5) ◈대한의 독립을 세계에 역설한 파란눈의 후원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헐버트를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한국의 영원한 벗으로 삶을 산 헐버트 박사를 탄신 150주년을 맞아 외국인 최초로 선정하게 되었다. 헐버트 박사는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청년의 계몽에 기여하였으며 독립신문 창간 지원 및 korea review' 창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 특사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863년 1월 26일 미국 동북부 버몬트주에서 아버지 칼빈 헐버트와 어머니 매리 우드워드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사이면서 미들베리(middlebury)대학 총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다트머스(dartmouth)대학 창립자의 후손이었다. 헐버트는 엄격한 도덕성, 인간 중심사상 및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는 가훈 속에 성장하였으며, 다트머스 대학에서 수학하고 1884년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마친 후 해외선교사의 길을 택했다.
미국인 청년 헐버트는 1886년 7월 육영공원 교사자격으로 처음 내한하였다. 육영공원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로 양반 자제와 관리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하기 위해 세워졌다. 헐버트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세계지리서를 펴내는 등 한국청년에게 세계를 알리는 계몽활동에 전념하였다.
1893년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한 헐버트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등에 관한 집필활동에 집중했다. 영문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와 이후 1901년부터 본인이 편집책임을 맡았던 'the korea review'에 한국에 관한 1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여 구미열강에 한국을 알리는데 큰 몫을 하였다.
헐버트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한국의 정치와 사회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 11월 고종황제를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는 춘생문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헐버트는 ymca의 창설과 초대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근대적 사회개혁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러일전쟁 후 일본의 한국 보호통치 문제가 표면화되자 워싱턴 밀사활동을 전개하였다. 고종의 친서를 휴대하여 워싱턴으로 가 일본 침략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과 미국의 밀약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06년 다시 내한하여 1907년 제2차 세계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을 이준, 이동휘, 김구 등에게 전하고 헤이그 밀사의 막후활동을 전개하였다. 헤이그 밀사 3인과 함께 각국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불어로 번역된 호소문은 언론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은 외교권이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참가자격을 얻지 못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헐버트는 미국에 돌아간 후에도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광복 후 1949년 국빈자격으로 그토록 갈망한 독립된 한국을 다시 찾았던 그는 내한 후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영면하였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유언에 따라 사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정부에서는 1950년 외국인 최초로 헐버트 박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대한의 독립을 세계에 역설한 파란눈의 후원자 -
헐버트의 한국에서의 교육, 선교, 사회 및 막후 외교활동
윤 경 로(한성대학교 명예교수)
머리말
국가보훈처에서 매년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편에 2013년도 7월의 인물로 외국인이 처음으로 선정되었다. 그 첫 인물이 호머 비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이다. 또한 1950년 우리 정부로부터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을 서훈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관련된 외국인들이 적지 않은데 그 중 첫 인물로 헐버트가 선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은 이 물음에 도움을 주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취지에 맞추어 한국과 관련된 헐버트의 활동을 시기와 주제별로 나누어 소개하기로 한다. 올해는 마침 헐버트박사 탄생 150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러한 의미있는 해를 맞이해 헐버트를 기리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점 또한 의미가 있다하겠다. 미국인 청년 헐버트는 1886년 7월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자격으로 내한하였다. 1886년 6월 1일 헐버트는 동료 벙커(Dalzell A. Bunker)와 길모아(George W. Gilmore)와 함께 미지의 나라 ‘코리아’로 향해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출발한 5천톤급 북경호(City of Peking)에 몸을 실었다.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18일만에 태평양을 건너 요코하마에 도착한 이들은 다시 ‘스루가마루호’로 갈아타고 1886년 7월 4일 조선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다. 미국을 떠난 지 35일 만에 목적지 ‘조선’에 입국한 것이다.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먼트(Vermont)주의 목사이며 미들베리 대학(Middlebury College)의 학장이었던 칼빈 헐버트(Calvin Butler Hulbert)와 인도 선교사의 딸, 메리 헐버트(Mary Woodward Hulbert)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헐버트는 외가에서 설립한 다트마우스 대학(Dartmouth College)에서 수학한 후, 1884년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을 마친 후 해외선교사의 길을 택했다.
1882년 5월 23일 조선과 미국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양국 간에 외교관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 조약체결에 따라 조선에 최초의 서구식 근대 교육기관 곧 육영공원(育英公院)을 개원하기로 하고 미국인 교사 약간 명을 통상조약 체결 직후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나 미루어지다가 1886년에 비로소 실행하게 되었다. 동년 7월 4일 육영공원 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내한했을 때 헐버트의 나이는 약관 23세였다. 그는 이후 86세로 하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60여년간 직간접으로 조선과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을 위해 어느 한국인보다도 더욱 한국을 사랑한 벽안(碧眼)의 미국인이었다. 한국을 자신의 조국보다 더욱 사랑한 그는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어 대한민국 새 나라를 건국하자, 86세의 노구의 몸으로 대한민국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1949년 8월 5일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합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하여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1. 육영공원 교사로서의 교육 활동 (1886. 7.-1891. 12.)
헐버트가 한국에서 활동한 첫 기간(1886- 1907)은 안으로 근대화 개혁이 진행되는 한편 일본을 비롯한 구미열강의 제국주의적인 이권 침식과 국권 병탄이 동시에 진행되던 역사적 전환기이자 진통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변동기에 한국을 찾은 헐버트는 20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는데 이를 편의상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헐버트의 한국에서의 활동은 교육활동으로 시작된다. 1886년 조선왕조의 요청에 따라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내한함으로써 한국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헐버트가 한국에 온 후 공식적인 첫 활동은 <육영공원설학절목>(育英公院設學節目)을 제정하는 일로 시작한다. 이 작업은 헐버트 일행이 내한한 지 70여일만의 일이다. 육영공원의 문이 열리기 10일전인 1886년 9월 17일 <節目>을 완성하여 고종 임금에게 제출한 후 바로 서구식 근대교육 곧 영어.역사.자연과학.지리.수학 등 서구식 근대교육을 펼쳤다. 육영공원의 학생들은 주로 젊은 현직 관리 및 고급양반자제들 가운데 선발되었는데 이완용(李完用)도 이 때 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초기 학습 진도는 학생들에게 매우 흥미를 주어 효과적이었다. 교과목 중 가장 흥미를 끌었던 것은 ‘만국지리’과목이었다. 당시 일반인들의 세계관은 대체로 중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와 일본 정도로 알고 있었던 학생들에게 지구본과 세계지도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렇듯 학생들이 세계지리에 큰 관심을 보이자 헐버트는 한글판 세계지리서 편찬을 서둘러 1891년에 순한글판으로 『민필지』(士民必知)라는 제목의 세계지리서를 펴냈다. 책제목 또한 흥미롭다. “양반과 평민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 이라는 이 한글판 대중적 세계지리서는 당대 서울 장안의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민필지』를 펴낸 일은 헐버트의 육영공원에서의 활동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내한한 지 5년만에 외국인으로서 순한글판 세계지리서를 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국인으로서 짧은 기간에 어떻게 한글판『민필지』를 편찬할 수 있었을까?
그 첫 이유를 그의 남다른 한국어 실력에서 찾을 수 있다. 헐버트는 『민필지』를 펴내기 1년 전인 1890년부터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주관 아래 발간된 『한국어사전』(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편찬 작업에 게일(J.S.Gale)과 함께 참여하는 등 내한 직후부터 한국어 공부에 남다른 열심을 보였다. 그가 1차계약기간이 끝나는 1891년 말 귀국하려 할 때 아펜젤라(Henry G. Appenzeller)는 감리교 선교부 소속 선교사 자격으로 남아 함께 활동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는 영어로 말하는 것 못지않게 한국말로 훌륭히 설교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남다른 한국어 실력과 이해는 1892년 1월 The Korean Repository(韓國留記) 창간호에 한국어(The Korean Alphabet)라는 논문을 발표한 사실에서도 잘 묻어난다. 이렇듯 한국어에 대한 깊은 조예를 바탕으로 최초의 한글판 세계지리서인 『민필지』를 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동료 언더우드가 천주교도인 송덕조(宋德祚)에게 한국어를 배웠던 것같이 헐버트 역시 내한 초부터 한국인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다. 이같이 단기간에 한국어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내한 직후부터 한국과 한국사람 및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한글과 한국말을 공부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듯 한글판 세계지리 입문서인 『민필지』가 편찬되었고 이 교재는 당시 상당한 반향과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이 교재는 1895년 한역본(漢譯本)으로 재출판되었고 1906년 다시 국한문혼용본으로 출판되어 일반인에게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이해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초기 육영공원의 원생들은 과거의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신선한 충격과 도전으로 열심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엄격한 교육제도, 특히 시험제도에 불만을 갖는 등 점차 시들해지면서 결석하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여기에 육영공원 운영 경비도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1차 계약기간이 1888년 4월로 만료되자 3명의 교사 중 길모어는 급료인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귀국하였다. 그러나 헐버트와 벙커는 계약기간을 다시 3년간 연장하여 1891년까지 계속 육영공원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 기간에 헐버트는 한국에 관해 더욱 깊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1년 2차 계약기간이 끝나고 원생들의 학습에 대한 열의가 식고 성과 역시 저조하다는 이유와 외국인 교사의 급료와 경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 등을 들어 외국인 교사 1명만 고용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이에 벙커가 남기로 하고 헐버트는 1891년 12월 귀국함으로 육영공원 교사로서의 1차 활동이 일단락을 지었다.
2. 선교 및 한국학 연구 활동 (1893. 9 -1897. 7)
헐버트의 한국에서의 2차 활동은 고종 30년(1893년) 9월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부인과 딸을 대동하고 내한하면서 다시 시작된다.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찾은 헐버트의 2차 내한 기간의 활동은 출판을 통한 문서선교 활동과 동시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 등에 관한 집필활동에 집중했다. 그의 선교활동은 교파를 초월하였다. 그는 감리교 소속 선교사였으나 언더우드가 주관하던 장로교 소속의 새문안교회에서 설교를 맡기도 하였고, 동대문 밖에 새로 세워진 볼드윈 기념예배당(The Bald-win Memorial Chapel) 일을 주관하는 등 서울지구 전도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노방전도나 지방순회전도와 같은 직접적인 전도사업 쪽보다는 주로 문서선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의 문서선교 활동은 1891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인쇄출판소인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 Trilingual Press)가 설립되어 출판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1896년부터 간행되는 <독립신문>도 바로 이 삼문출판사에서 인쇄, 편집되었다.
본래 이 출판사의 책임은 올링거(F.Ohlinger) 목사가 맡고 있었는데 그가 1893년 8월 싱가폴로 떠나면서 헐버트가 책임을 맡게 되어 더욱 문서선교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자 곧 인쇄소의 설비확대를 위하여 상해로부터 타자기를 여러 대 구입하는 등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책임을 맡은 지 9개월 만에 백만여 장의 전도지와 전도문서를 인쇄.출판하였으며, 출판사 운영 일체의 비용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만큼 삼문출판사를 일정한 궤도에 올려 놓는 성과를 낳았다.
삼문출판사는 본래 인쇄 및 제본소로, 초기 인쇄된 유인물은 주로 전도지인 <신약성서>(쪽복음) 등이었다. 이때의 인쇄물 중 주목되는 출판물로 당시 한국주재 선교사들의 학술연구지 성격을 갖춘 The Korean Repository(『韓國留記』)란 영문판 월간잡지가 있다. 이 잡지는 1892년 1월에 창간호를 낸 후 1893-94년 2년간 정간되었다가 1895년 1월에 다시 속간되어 아펜셀러와 존스(George H. Jones)의 공동책임 하에 편집되어, 1898년 12월까지 통권 60호를 간행하였다. 이 영문잡지는 당시 구미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오늘날 개화기 한국에서 활동했던 외국인들이 당시 한국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밝혀주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헐버트는 영문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와 이후 1901년부터 본인이 편집책임을 맡았던 The Korea Review(韓國評論)지에 한국에 관한 100여 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밖에도 헐버트는 이 기간에 Hulbert's Education Series(『敎育叢書』)의 일부를 편집한 <初學支志>(Cho Hak Chiji)를 편찬하였다. 또한 The Korean Repository의 편집과 운영을 맡고 있던 그 잡지에 <한국어>(Korean Alphabet), <吏讀>(The Itu) 등 16편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1901년부터 1906년 12월 The Korea Review가 정간될 때까지 그는 <한국의 격언>(Korean Proverbs), <衙前>(The Ajun), <여성지위>(The Status of Woman in Korea) 등 무려 120여 편에 달하는 한국에 관한 논문과 또한 한국의 주요 역사적 사건에 관한 평론을 게재하는 왕성한 한국학 연구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발표된 논문을 내용별로 보면, 한국민족의 기원, 한국민속, 풍습, 역사, 언어, 교육, 재원, 종교, 산업, 예술 등 한국에 관한 전 분야를 폭넓게 연구하였다. 이와 같은 의욕적인 한국학 연구는 그로 하여금 한국을 남달리 이해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게 하였다. 1906년 The Passing of Korea (大韓帝國의 終焉)이라는 역저를 간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관한 왕성한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삼문출판사를 중심으로 헐버트의 출판 및 문서선교 활동은 그 책임을 벙커에게 넘겨준 1897년까지 약 4년간 계속되었다.
그의 이러한 의욕적인 한국학 연구활동은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음은 물론이다. 한국에 관한 영문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와 The Korea Review지는 당시 한국에서 영문으로 출판된 유일한 한국학 잡지였으며, 특히 The Korea Review지는 당시 5개주 19개국에 독자를 확보하고 있어 구미열강에 한국을 알리는 데 큰 몫을 하였다. 헐버트의 한국에 관한 깊은 관심과 폭넓은 연구태도는 이후 그로 하여금 한국의 사회와 정치문제에까지 참여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계기가 되었다.
3. 춘생문사건과 YMCA창설 활동(1895. 11-1904. 9)
1) 춘생문사건
헐버트가 한국의 일반 사회․정치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 분야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895년을 전후한 시기부터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미한 정국에서 일어났던 을미사변, 곧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 그로 하여금 한국의 정치문제에 관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정치사회문제에 헐버트가 직간접으로 관여하게 된 첫 사건이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이다. 춘생문사건은 1895년 11월 28일(음 10월 12일) 미명에 친미적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계 인사들과 일부 서양인들이 연계하여 고종임금을 궁성 밖으로 옮길 목적으로 삼청동 편에 있는 춘생문의 담을 넘어가 입궐하여 고종임금을 미국인공사관으로 옮기려다가 사전누설로 실패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일본측은 일종의 ‘국왕탈취미수사건’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가담했다는 ‘일부 서양인’으로 지목된 인물이 헐버트를 비롯한 애비슨, 제너럴 다이 등 미국인들이었다. ‘춘생문사건’에 가담했다는 인물들은 크게 분류해보면 첫째 현직관리 및 친위대 군인, 둘째 친로.친미파로 불리운 이른바 정동파(貞洞派) 인사, 셋째 미국인 선교사들과 교관 및 구미외교관 등이었다. 일본측은 춘생문사건이 터지자 이 미수사건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있기 40일전에 있었던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당시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국제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일본에게 춘생문사건은 다시없는 좋은 기회였다. 따라서 이 사건을 국내외에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한편 미우라(三浦吾樓) 등 명성황후시해사건의 범인들을 증거불충분이란 이유로 전원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춘생문사건은 청일전쟁과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한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미묘한 관계를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특히 이같이 예민한 정치적 문제에 선교사들이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어떠한 연유에서 이와 같은 정치적사건에 헐버트 등 선교사들이 관계되었던 것일까. 고종임금은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언제 자기도 명성황후와 같이 시해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식음을 전폐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미국인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의 보호를 요청했던 것이다. 이때 부름을 받은 외국인이 선교사 존스(G.H.Johns), 게일(J.S.Gale), 언더우드, 에비슨(Avison) 그리고 헐버트였다. 이들은 매일 밤 교대로 고종을 호위하였다. 그리고 이들 미국인들이 해오는 음식만을 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종임금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시기 한국을 다녀간 비숍(Isabella Bishop)은 “미국 선교사들은 왕을 지키느라고 매일 밤 2명씩 교대로 불침범을 섰다”, “이것이 불행한 통치자의 유일한 방패였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고종임금이 처했던 어려움을 잘 시사해 준다 하겠다.
그러나 진작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던 헐버트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임금을 호위한 것은 시인하면서도 그를 궁궐 밖 다른 곳으로 옮기려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였다. 오히려 국왕을 탈취하려는 세력을 저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그날 고종을 호위하고 있을 때 한 대신들이 고종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려는 것을 국왕의 신변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완력으로 막았다.”고 헐버트는 훗날 술회하였다. 이 부분에 관해 맥켄지(F.A.Mckenzie)도 “처음부터 선교사들은 이 사건에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전후 상황으로 보아 춘생문사건이 사전에 모의된 것은 사실로 보이며, 여기에 헐버트 등 일부 선교사가 관계된 것도 사실로 추정된다. 또한 1905년 외교권이 일본에 강제되는 위기의 시기 고종황제의 밀사로 워싱턴에 파견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개연성을 엿볼 수 있다. 결국 헐버트는 국운이 스러져가는 조선의 마지막 왕실의 비운의 정치문제에까지 개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2) 황성기독청년회(YMCA) 창설 활동
고종황제의 밀사로의 정치활동을 소개하기에 앞서 사회활동으로 주목할만한 황성기독청년회(YMCA)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헐버트는 한국 YMCA의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YMCA의 태동은 1899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에 의해서 추진되었으나, 본격적인 창설 작업은 다음해 6월 라이언(D.W.Lyon)이 내한하여 약 4개월간 머무르는 동안에 구체화되었다. 라이언은 내한 즉시 재한미국인 선교사들과 접촉을 통하여 한국 YMCA창립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이때 접촉한 인사 중 한 사람이 헐버트였는데, 그는 “YMCA가 서울에 설립되면 서울장안의 청년들에게 대단한 인기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책임자로 있는 한성사범학교의 학생들이 적극 참여할 것이다. (중략) 우리는 매일 거리를 쏘다니는 수백명의 청년들을 본다. 그들은 다 유망한 청년들이다. 구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자극만 있다면 일본에서 과거 30년간에 있었던 것 같은 가장 유능한 청년들이 될 것이다”며 설립의 필요성을 적극 피력했다.
이러한 헐버트의 적극적인 인식은 평소부터 당시 설립된 교회들이 상류층의 유능한 청년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초기 교회 신자들의 출신은 대부분 서민층과 하층민으로 구성되어 있어 상류층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헐버트는 이러한 문제점에 주목하고 교회로 흡수할 수 없는 상류층 청년들을 위한 YMCA.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헐버트가 구상하고 있던 한국에서의 YMCA.운동의 방향은 순수한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하려한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랐던 점도 한 이유였다 할 수 있다. 그는 YMCA를 통해 한국 상류층 청년들에게 근대적인 사회개혁의식을 고취시키며,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헐버트의 입장은 초기 YMCA의 창설을 서둘렀던 동료 선교사 언더우드의 순수 신앙운동과는 달랐다. 헐버트는 당시 한국의 청년들에게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상과 근대지식을 교육시키면 일본과 다를 바 없이 근대적인 개혁의 변화가 한국에서도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YMCA운동은 한국 청년들에게 사회의식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교육 계몽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헐버트가 당시 많은 미국인 선교사 .목사 중 초대 YMCA의 회장을 맡게 된 것도 이러한 한국현실에 문제의식과 YMCA의 사회운동 정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YMCA창설과 초대회장을 역임하면서 헐버트는 한국의 젊은이들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한국의 정치.외교 문제에까지 개입하게 되었다.
4. 막후 외교관으로서의 활동 (1905.11.~1907.6.)
헐버트가 한국 정치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노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앞서 본 춘생문사건과 Y.M.C.A.와 관계를 맺으면서 한국의 정치, 사회문제에 참여한 바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정치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한제국의 존립이 위기에 처해진 노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노일전쟁이 종전에 접어들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실체가 가시화되면서 그의 대 일본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노일전쟁 발발 직후까지만 하여도 한국과 일본을 공동운명체로 보았다. 즉 “러시아의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일본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덜 굴욕적이라 믿는다. (중략) 러시아인들의 입에서는 개혁이라는 말이 나온 적이 없으나 일본은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이타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한국의 번영이 일본과 똑같은 조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만큼 일본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노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국 보호통치 문제가 표면화되고, 특히 전쟁 와중에 대거 이주해 온 일본인들의 몰지각하고 무분별한 행동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의 대일본인식이 급선회하였다. 일본과 한국을 동일한 선상에서 파악했던 과거 자신의 판단이 크게 잘못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위험부담이 있는 워싱턴 밀사파견 제의를 받아들인 것도 이러한 그의 과거 잘못된 판단에 대한 자기반성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1) 워싱턴 밀사활동
청일전쟁 후 러시아 측이 주도한 삼국간섭(러․독․프)의 위협으로 한국에서의 우위권을 상실하였던 일본은 노일전쟁을 계기로 다시 한국에서의 위상을 강화시켜 나갔다. 가쓰라.태프트밀약(1905. 7.), 제2차 영일동맹(1905. 8.), 포츠머트조약(1905. 9.)으로 한국에서의 정치.경제.군사상의 우월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은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 방법을 획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 황실은 이같은 국제적 역학관계의 변화, 특히 미일간에 한반도를 비롯한 아세아 지역의 세력 분할문제를 놓고 밀약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미국을 굳게 믿고 있었다. 1904년 1월 군부대신 이용익(李容翊)은 당시 한국의 위기를 염려하는 외국인 기자들에게 “우리는 미국의 약속을 얻은 바 있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은 우리 편이 되어줄 것이요”라고 했다. 당시 미국 대리공사였던 알렌(H.N.Allen)이 본국 국무성에 보낸 편지에서도 당시의 위기 타개를 미국에 의존하려고 한 황실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한국 황실이 미국의 도움을 확신한 근거는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내용을 믿었기 때문이다. “제3국으로부터 불공경모(不公輕侮)를 당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거중조정(居中調停, good of offices)을 함으로써 원만한 협의를 이룩하고 그 우의를 표시한다”는 조약 문구를 그대로 믿고 있었다.
그러면 당시 한국 황실은 어떤 이유와 배경에서 이토록 조약문을 문자 그대로 믿으려했던 것일까? 우선 고종황제의 매우 긍정적인 미국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은 1882년 서구국가 중 제일 먼저 한국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약체결이후 다른 어느 열강들과 달리 한국내정에 간섭하기보다 병원과 학교 및 교회를 설립하는 등 매우 좋은 일만하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나라’(美國)로 비추어져 있었다. 바로 이 점이 고종에게 미국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었다 할 것이다. 다음으로 고종의 미국인관(선교사)을 들 수 있는데 고종의 미국인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평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에 대한 좋은 인상을 바로 미국정부와 동일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종을 비롯한 황실 관리들은 한국이 위기에 처하면 미국이 틀림없이 ‘居中調停’을 해줄 것으로 믿었으며, 그 시기가 ‘현재’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미국에 대한 ‘순진한 신뢰’에서 헐버트를 황제 밀사로 워싱턴에 파견하게 되었고 헐버트 역시 이러한 조약문을 믿고 밀사로 갔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보듯 미국 측의 ‘거중조정’에 대한 해석은 단순한 외교적 용어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과 이미 밀약이 맺어져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다음으로, 헐버트를 밀사로 파견하게 된 배경과 경위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부분에 대해 헐버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 한국 황실이 공식적인 채널을 통하여 미국에 공문을 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한국 외무는 철저하게 일본의 ‘소매 속에 놀아나는’(in the sleeve) 한 사람에 의하여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은 방법은 ‘개인적이고도 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만 거중조정해 줄 것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재한 미국인 여러 사람 가운데 왜 헐버트를 밀사로 지목했는가 하는 점이다. ‘개인밀사’에 헐버트가 선임된 이유로 “다년간 한국에 체류하였으며 반일적인 입장에서 한국을 도와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만족스러운 답이 될 수 없다. 당시 재한 미국인(선교사)의 활동과 헐버트의 활동을 비교함으로써 좀 더 명백해진다.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매우 불안해하고 있던 고종임금은 외국인 특히 미국인들에게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이때 고종을 호위한 미국인 중 다이(Dye)를 제외하고는 모두 재한 선교사들이었다. 그런데 이른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 이후 헐버트를 제외한 재한 선교사들은 모두 종교활동 이외의 일에서 손을 떼었다. 예컨대 대표적인 재한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춘생문사건 이후부터는 선교간행물인 <그리스도인 회보>와 <조선그리스도 신문>을 발간하는 등 종교사업에만 전념하였다. 즉 춘생문사건에 관계되었던 선교사들은 이 사건 이후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일체 관계하지 않았다. 왜 그랬던 것일까? 여기에는 본국 즉 미국정부의 강력한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춘생문사건 이후 일본은 미국정부에 재한 선교사들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 항의문을 보냈고, 이에 미국정부는 재한 미국선교사들에게 “주재국의 내정에 관하여 어떤 일에도 개입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만약 이 충고를 위배할 때 생기는 일에 대해서는 보호받을 수 없다”는 강한 경고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이같은 본국의 경고에 따라 재한 선교사 대부분은 정치적 활동에서 일체 손을 떼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독 헐버트만은 다른 동료 선교사들과 달리 The Korean Repository 와 The Korea Review지를 통해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에 한국을 옹호하는 논설을 게재하는 등 정치적 문제에 관해 글을 써서 한국의 어려운 입장을 세계에 호소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활동’에 주목한 고종황제가 그를 밀사로 선임, 미국에 급파하게 된 연유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고종황제의 밀사로 헐버트가 선정된 것은 그의 남다른 한국에 대한 애정과 활발한 활동이 주요인이었던 것이다.
한편 헐버트가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이같은 모험에 뛰어든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노일전쟁 후 일본의 배신행위에 분노하고 있었다. 초기 그의 판단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한국은 일본의 영향권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노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을 자국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려는 저의를 인식하면서 이에 분노하여 위험이 따르는 밀사의 모험에 뛰어들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파악한 일본 당국은 알렌의 후임으로 부임한 몰간(Edwin V. Morgan) 신임공사를 통해 헐버트의 밀사정보를 사전 입수하자, 그가 떠나기 전날 밤 그를 찾아가 “도미를 포기하라. 이 요청을 받아들이면 막대한 재정적 혜택을 주겠다”는 유혹과 협박을 하였다. 그러나 헐버트는 이를 물리치고 1905년 10월 중순 고종황제의 친서를 휴대하고 가족과 함께 배편으로 워싱턴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가 고종으로부터 받은 친서 내용은 전통적인 한미우호관계를 강조하는 한편, 당시 심각한 한일관계를 설명하면서 일본의 침략행위와 그 부당성을 밝혀 미국의 도움을 요청한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친서의 영문작성을 헐버트가 한 것으로 보인다. 친서 작성 당시 헐버트는 고종에게 한국이 자진하여 미국 등 여러 서구국가들의 공동 보호 하에 있으면 한국의 독립이 보장될 수 있다고 진언하였다 한다.
한편 일본 측은 헐버트가 워싱턴을 향해 출발했음이 확인되자,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 작업을 서둘렀다. 즉 1905년 11월 9일 카스라(桂太郞) 내각은 이토(伊藤博文)를 한국에 급파, 외교권 박탈작업을 급진전시켜 동년 11월 18일 새벽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 늑결시켰다. 바로 이날 헐버트는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워싱턴에 도착한 헐버트는 즉시 백악관으로 직행하여 고종황제의 친서를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문제는 국가간의 외교문제이므로 친서를 국무성에 전달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국무성을 찾아갔으나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장관이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백악관을 찾아 사정의 중요성을 말하고 대통령 면회를 간청하자 비서는 “헐버트씨! 우리는 이미 그 친서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소. 당신은 이미 국무성에 가보라는 지시를 받았으므로 여기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소”라는 말만 듣고 돌아서야 했다. 훗날 헐버트는 미 상원에 제출한 한 진술서에서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나는 대통령이 그(고종황제)의 친서를 환영할 줄 알았다. (중략) 이렇게 회피하는 데는 미리 계획된 흑막이 있었던 것으로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중략) 나는 여기에 단순한 부주의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개입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11월 18일) 헐버트는 친구인 스태포드(W.P.Stafford) 대법원 판사를 통해 국무장관 면회를 재차 시도했다. 그러나 역시 바쁘다는 이유로 면담이 거절되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미국무성은 일본정부로부터 한일간에 ‘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전문을 접수받았다. 즉 한국황제가 한국의 외교권 일체를 일본에 ‘양여’ 했다는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전문을 일본정부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전문을 받은 미국무성은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측에게 그 전문내용의 사실 확인 절차도 없이 즉각적으로 주한 미국공사관의 철수를 지시하였다. 훗날 헐버트는 이러한 미국의 경솔한 처사에 대해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에게 한 마디 문의도 없이, 또한 한국 황제에게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일본측의 일방적인 통보만을 받아들여 여러 주한 외국공사관 중 제일 먼저 철수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국가 간의 외교적 절차와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어떻게 이러한 비상식적인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무엇보다 1905년 을사조약의 늑결을 전후한 이 시기 밀착되어있던 미일간의 외교관계에 반해 한미관계는 상대적으로 매우 소외되었던 점을 주 요인으로 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고종의 친서가 미국무성에 공식접수가 허락된 것은 을사조약이 늑결된지 이틀 뒤인 11월 20일이었다. 이때 친서를 받은 국무장관 루트(Elihm Root)는 격한 어조로 “헐버트씨, 당신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마찰이 있기를 바랍니까?”라고 했는가 하면 11월 25일 친서에 대한 국무성의 답서에 “그것(친서)을 귀하에게 위탁한 후 (고종) 황제는 일본과 새로운 조약을 맺음으로써 이 친서에서 언급한 모든 문제를 처리했다고 하니 이 친서에 의해 어뗜 조치을 취한다는 것은 실행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고 황제친서를 무위로 돌렸던 것이다.
말하자면 친서가 작성된 지 한 달 후인 11월 18일에 한일간에 새로운 협약이 체결되었으므로 친서의 효력은 자연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정부의 입장을 확인한 헐버트는 즉시 고종황제에게 이 사실을 타전하였으며, 그 다음날 고종황제로부터 “짐이 최근 일본과 체결하였다는 보호조약은 일본의 협박에 의해 강제적으로 맺어진 것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거기에 동의한 일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미국정부에 이 사실을 전하라”라는 답전을 받았다.
이에 헐버트는 다음날(11월 27일) 국무차관 베이컨(Robert Bacon)에게 이 전문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미국무성측은 이에 대한 아무 응답도 없었다. 이로써 헐버트가 워싱턴을 찾은 일은 아무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단지 몇 사람의 미 상원의원만이 개인적으로 헐버트의 활동에 동정을 표했을 뿐이었다. 훗날 헐버트는 미국정부의 이상과 같은 행위를 가리켜 “미국은 굳바이 한 마디없이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한국민족을 배신했다”고 아래와 같이 강하게 비난하였다.
“한국인들이 치를 떨고 고위관리들이 자결까지 하며 망국의 설움을 잊으려 하고 있을 때 한국 주재 미국공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한 민족의 멸망을 축하하는 축배를 일본인들과 들고 있었다. (중략) 미국은 과거 30년간 성조기를 공의와 정의의 상징으로 이기적인 것에 관계없이, 다만 정의 편에서 힘껏 밀어주겠노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난처해지자 우리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느나는 듯이 굿바이 한 마디 없이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한 민족을 배신하는 데 앞장섰다. (중략) 후세의 사가들이 오늘의 이 일을 되돌아보면 미국정부가 한민족의 운명이 달려있는 중대한 문제에 얼마나 모욕적이고도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였던가를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요컨대 당시 전후사정으로 보아 헐버트의 밀사활동은 처음부터 성과없이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우리는 그 요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당시 미행정부 내에는 한국에 관한 정책을 객관적으로 수행할 만큼 한국의 사정을 바르게 파악할 만한 외교전문가가 없었다는 점이다. 한 예로, 헐버트의 황제친서 제출 후 반응이 없어 한 국제법학자를 통하여 조미수호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 조문을 국무장관에게 제출하자 국무장관 루트는 “나는 조약문에 그러한 내용이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고 한다. 알면서도 정치적 제스추어로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아무튼 이 사실에서 우리는 당시 미행정부가 한국에 관해 얼마나 무지하고 무관심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당시 미국관리들의 선교사에 대한 편견이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미국 관리들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자국 선교사들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귀찮은 존재로 보고 있었다. 한때 필립핀 총독을 지낸 라이트(Luke E. Wright)는 “동양에 오기 전에는 선교사들이란 본국에서 할 일이 없어 여기까지 온 쓸 데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선교사 신분인 헐버트가 백악관과 국무성 관리들로부터 냉대받은 이면에는 이러한 당시 미국 관리들의 편협적인 부정적인 선교사 인식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요인은 당시 국제적인 역학관계와, 특히 대통령 데오도드 루즈벨트가 지나치게 친일적으로 경도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대외정책의 기조가 중립외교정책(Mono Doctrine)을 표방해 온 미국이 루즈벨트 집권이후 대외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특히 필리핀 총독출신인 루즈벨트가 집권하면서 극동지역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는데 루즈벨트는 일본을 미국의 대리국으로 생각할 만큼 일본을 중시했다. 노일전쟁 때 미국이 무기지원 등 재정적으로 일본을 크게 지원한 것도 이러한 배경과 인식에서였다. 국무성으로부터 고종황제의 친서를 받은 루즈벨트는 “우리는 일본의 의사를 거슬려 가면서까지 한국문제에 관계하고 싶지 않다. 한국인은 자체의 방위를 위하여 일격을 가할 능력도 없다.”고 말할만큼 당시 한국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인 식하고 있었다. 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던 1900년 주미 독일대사 쉬테른베르크(Sternberg)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루즈벨트는 한국의 일본소유를 희망할 만큼 부정적이었다.
“나는 일본의 한국소유를 희망한다. 왜냐하면, 일본은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할 것이고, 지금까 지의 일본의 행적으로 보아 일본은 능히 러시아 세력견제 역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노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일본의 아세아지역에서의 지나친 세력확대를 우려하게 되어, 루즈벨트는 육군장관 태프트(W.H.Taft)를 일본에 보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자유행동권’(free-hand)을 인정하는 소위 가쓰라.태프트협정(Taft-Katsura Agreement)을 1905년 7월 29일에 비밀리에 체결하였다. 요컨대 한국 황실이 그토록 믿었던 미국은 1901년 이후 루즈벨트에 의해서 이른바‘극동에서의 공평정책’의 원칙과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의 독립과 존립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따라서 헐버트의 외교활동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 헤이그 밀사파견과 헐버트의 배후활동
헐버트는 워싱턴 밀사활동이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한국을 찾았다. 3차 내한 이유는 The Korea Review(韓國評論)지의 계속적인 발간과 자신의 <교육총서>(Herbert's Educational Series)의 편찬계획 그리고 한국인을 계속 도울 뜻에서 1906년 6월 8일 다시 내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 자신의 명의로 위탁되어 있던 토지, 가옥 등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또한 한국을 다시 찾게된 한 이유였다. 노일전쟁을 전후해서 일본인들 가운데는 한국인들의 재산과 이권을 불법적으로 탈취하는 사례가 빈번히 자행되었다. 따라서 일부 한인들은 자신의 재산과 권리보호를 위해 외국인 선교사들 명의로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이명(移名)시키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러한 특수한 현상으로 당시 한국인 사이에 남달리 신뢰를 받고 있던 헐버트는 적지 않은 토지, 가옥 등의 상당한 재산소유자였다. 따라서 그는 이를 보호하는 것이 곧 한인들을 돕는 길이라 판단, 이 일에 적극 참여했던 것이다. 앞서 일본측이 밀사파견 저지 조건으로 ‘막대한 재정적 혜택’을 주겠다고 회유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러나 헐버트는 일본측의 제의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한국을 찾아 이상과 같은 한인들의 재산권 보호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따라서 통감부측은 그에 대한 감시의 손길을 더욱 강화하였다.
헐버트는 이러한 일본측의 감시하에서도 다시 한번 한국정부를 위한 활동의 기회를 포착하였다. 헤이그 밀사사건에 관계한 것이 그것이었다. 1907년 6월에 제 2차 세계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고 내한한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 곧 이 정보를 고종황제와 Y.M.C.A. 관계인사들에게 전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의 증언에 의하면 헤이그 밀사사건은 당시 애국청년들이 집합되어 있던 상동교회 전덕기(全德基) 목사의 사랑방에서 처음 논의되었는데, 이때 모인 인물들은 주로 관서.관북의 청년으로 이준, 이동휘, 이갑, 김구 등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정보를 이들에게 알린 사람이 바로 헐버트였다는 것이다. 윔즈(Weems)에 의하면, 고종은 1906년 6월 22일 헐버트를 일본을 제외한 모든 조약국가의 특명전권대사에 임명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헐버트는 단지 조언자로만 활동할 뜻을 밝히면서 대안으로 평화회의에 파송할 한국인을 선정할 것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1907년 4월 헐버트는 가족과 귀국한다는 명목으로 스위스를 거쳐 베를린에 건너가, 취재차 온 기자 스테드(W.T.Stead)를 만나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였다. 밀사 임명을 받은 이상설(李相卨) 등 3인도 6월 24일에 헤이그에 도착 합류하였다. 도착 즉시 그들은 일본을 제외한 각국 대표에게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는 호소문(a plea for Korea)을 배부하였다. 이 호소문은 헐버트에 의하여 사전에 불어로 번역되었다. 호소문은 동년 6월 30일자 꼬리어(Courrier)지에 전문이 게재되었으며, 이어 각국 신문을 통해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 일 역시 헐버트가 막후에서 활동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의 항의와 압력을 받은 대회 의장인 닐리도프(M.Nelidov)는 처음의 뜻을 바꾸어, 현재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므로 외교권이 상실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참가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이로써 헐버트의 헤이그 밀사 막후활동 또한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헐버트의 한국에서의 활동이 1907년 6월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는 1909년 8월에 4차 내한하였다. 다시 한국을 찾은 헐버트에게 고종황제는 상해 독일은행에 예치해 둔 25만 달러에 상당하는 예금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때 딸 매덜린(Medeleine)이 중태라는 전보를 받자 서둘러 귀국하게 되어 성사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귀국한 후에도 그는 한국문제에 늘 관심을 가지고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활동의 하나로 1916년 3월 5일자 뉴욕타임즈에 <한국과 벨지움에서의 미국정책>(American Policy in the Case of Korea and Belgium)이란 제하의 글을 기고한 예를 들 수 있다. 그는 이 기고문을 통해 10여 년 전 루즈벨트의 대한정책의 잘못을 신날하게 비판하였다. 이밖에도 3.1운동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에 의해서 간행되고 있던 The Korea Review지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활동은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맺음말
광복 후 1949년 7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국빈자격으로 헐버트가 노구의 몸으로 독립된 대한민국을 찾게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러나 그때 그의 나이가 86세의 고령이었다. 장시간의 여행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해방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일념에서 국빈자격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헐버트는 내한한 지 일주일만인 1949년 8월 5일 오후 12시 15분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영면하였다. 눈을 감기 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합니다”(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Westminster Abbey)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동년 8월 11일 사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하여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23세 약관의 젊은 나이에 한국을 찾아 86세의 노구를 마다않고 독립된 한국을 다시 찾아 한국 땅에 묻힌 그의 전 생애는 한마디로 ‘한국인보다 더욱 한국을 사랑한 한국의 영원한 벗’의 삶이었다 할 것이다. 이러한 한국과 한국인이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될 역사적 ‘은인’인 헐버트 탄생 150주년을 맞는 2013년 이해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그를 기리게 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아닐 수 없다. 삼가 호머 비 헐버트 박사 영전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첫댓글 서양인 중에도 큰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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