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나무가 자라는 여름(외 2편)
박승민
끝난 것 같은데
끝나지 않은 사람
서는 대신 누워버린 사람
누워서 종일을 걷는 사람
아무리 걸어도 빨간불인 사람
그곳에 떨어진 동전의 힘으로 사는 건지
모르는 사람
아직 지지 않은 사람
지치지 않는 사람
몸과 고무가 하나지만 여름에는
고무다리가 옥수수 잎처럼 더 자라는 사람
동서울터미널 앞에서
해남이나 속초행 버스의 등을
밀어 보내기만 하는 사람
순환선처럼 강변역을 돌고 돌아
늘 동서울터미널 앞인 사람
배달 오토바이처럼 한번씩
바닥에 뒤집혔다가도
끝내, 끝내지 않는 사람
상자에 던져진 눈
눈은 고공(高空)의 공포로 휘청거렸다
말문이 막힌 채
상경하는 기차에서 몸을 던지듯
무작정 공단 앞에 뛰어내렸다
생각할 틈도 없이
뒤에서 떠미는 물량에 치여
상자에 내던져진다
아, 그런데 이 벼랑은
어느 날엔가 와본 듯해
누군가와 살아본 듯해
몸이 더 잘 얼 수 있도록
상자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재고가 쌓이는 겨울까지는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닫힌 공장을 나서는 언니도
겨울옷을 입고 봄 속에서 녹아가겠지
겨울이 흘린 흔적을 찾느라
꽃밭의 눈들은 발갛게 부어가겠지
분노 뒤에 오는 것
—가자 지구
아빠가 늘어진 아이의 목과 발바닥을 세워서
흔들며 마을 사람에게 울부짖는다
폭격이 지나간 얼굴은 검게 탔다
기저귀 위로 시멘트 가루가 수의처럼 뿌옇다
자신이 삼켜지기 전에 세상을 먼저 삼켜버리겠다는 눈
이스라엘과 그들의 신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분노
울분과 자책과 기도와 땀으로 범벅이 된 검은 곱슬머리
분노가 가시고 난 뒤
시멘트 파편이 된 요람을 나서는 그가 보인다
한 접시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슬픔이어서
다른 접시에는 더 이상 없는 미래를 담아
그는 버렸던 신을 또 찾아간다
자신도 죽여달라고
가자보다 더한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더 이상 커지지 않는 작은 눈을 뜨고서
밤마다 부서진 신에게 매달린다
―시집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 2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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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민 / 1964년 경북 영주 출생.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 『끝은 끝으로 이어진』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