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전 당시의 사진
젊은시절 좋은 경험 (2)
(구두가 없어졌어.!?)
“발이 없어진 것 같에...” 기억나십니까? ...ㅎㅎㅎ
발이 아프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댄스는 할 수 있나보다.
내 경험으로도 체육관에서 경기대회를 하는 것은 처음 인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초 였으니..)
처음으로 개최하는 대회였지만 홍보가 아주 잘 되어서 객석은 초만원으로 시끌벅적했다.
거기에다 우리 댄스 문화에서 체육관 경기의 시초가 되는 행사라,
전국의 수많은 선수들과 저명한 댄스 관계자까지 한 자리에 모두 모였다.
또한 이 대회는 세계대회 출전 선발 대회로써 댄서들에게는 세계 무대로 나갈 수 있는 큰 기회였다.
당시의 댄스스포츠 경기대회는 지금의 스탠다드(모던) / 라틴 두 개 종목이 아니라,
스탠다드 경기대회만 있었고 5종목 경기대회인데
3종목이나 4종목 밖에 못하는 선수들도 대거 참가를 했다.
선수들은 약 30여 커플이 출전하였으며
심사는 일본의 국제 심사위원인 시모스마(지금은 작고)씨를 초청해서
단독 심사를 부탁해 가히 국제전을 방불케 했다.
(당시 일본은 댄스스포츠가 굉장히 활성화 되어있으며
영화 쉘 위 댄스(Shall we Dance?) 로도 유명하다)
파트너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예선전은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이제 준결승(Semi Final)이 시작되는데 우리 파트너께서 큰 일이 나셨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과에서 외과수술을 받게 만든 그 발이 또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아.. 댄서가 발이 아프다면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그 많은 스탭을 성한 발로도 다 하기 힘든데,
아픈 발로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하지만, 여기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힘들게 준결승까지 왔는데.. 굳은 결의를 하고 준결승에 임했다.
극심한 통증에서도 우리는 준결승도 무난히 통과했다.
이제 결승(Final)...
이 결승전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물론 예선부터 준결승에 이르기까지 쉬운 적은 없었지만,
결승전은 정말 힘들었다.
통증에 시달리는 파트너를 모시고 결승 시작.
Waltz, Tango, Quickstep, Foxtrot, Viennese Waltz 5종목.
그 때 Foxtrot은 결승전에서만 추게 되었다.
결승에 진출한 6커플이 마지막 Foxtrot를 추는데 처음 훠드스탭, 리버스턴, 쓰리스탭, 내추럴턴...
한 스탭, 한 스탭 잘 진행이 되고 있는데, 갑자기 파트너의 스탭이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무언가 낌세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무렵 파트너가 또 걸작스러운 한 마디를 나에게 던졌다.
“ 어떻게.. 구두가 없어졌어..! ”
띵~!!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어지러웠다.
신발이 두 쪽 다 벗어졌더라면 그나마 균형이라도 잡힌다.
그런데 이건 한 쪽 신발만 벗겨졌으니... 춤은 끄덕끄덕 이상한 Foxtrot...
춤을 추다가 플로어를 보니 저만큼 벗어진 구두가 보인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더 이상의 방법은 없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마저 벗어버리라고 말했다....ㅎㅎㅎ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하나..
파트너와 함께 지금 하는 댄스에 집중하는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신발은 없지만,
댄스에 대한 모든 정열과 힘을 실어 추는 수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As time goes by..)
댄스를 마친 뒤 터져나오는 그 우레와 같은 박수...
그렇게 많은 박수는 우리나라 댄스스포츠 역사상 처음인 것 같다.
이제 끝났다.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들어가야지.
그런데 그 신발이 저쪽 마루 끝에 있다.
얼른 가서 구두를 주워오라고 파트너에게 말했다.
한 손에 한짝의 구두를 들고 조용조용 걸어가더니
터져나오는 박수소리에 놀라 쏜살같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이쿠~! 양손에 구두를 들고 스타킹을 신은 발로 뛰다보니
그만 큰 大자로 벌러덩~! 넘어지면서 두 다리가 위로 치켜 올려졌다...ㅎㅎㅎ
아무튼 그 발 때문에 고생한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픈다리는 어떻하고 넘어져...
하지만 댄스를 시작한 이래 그렇게 큰 박수를 받기는 또한 처음이었다.... ㅎㅎㅎ
아무튼 경기대회 순서를 모두 마치고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파트너의 부상 때문에 제대로 춤을 출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그나마 결승전에 진출 한 것도 다행..
아니, 경기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아니 그런데 내가 잘못 들었나?
1위를 발표하는 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건 바로 나와 내 파트너의 이름이었다.!!
이럴 수가?! 심사위원님이 무언가 잘못 보신 건 아닌가?... ㅎㅎㅎ
나는 난생 처음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였다.
하지만 이 우승이 남다른 것은 정말 댄서에게 치명적인 발의 부상 속에서도,
신발이 벗겨진 어이없었던 악조건 속에서도 이루어낸 것이었다.
정말 댄스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동료들과 전국에서 온 다른 많은 선수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으며
대회도 성황리에 잘 마무리 되었다.
그때 당시 나와 함께 결승에서 댄스를 했던 선수들은 모두 나의 선후배님들이었으며
지금은 모두 이름난 댄스의 지도자들이다.
시상식을 끝으로 대회는 끝이 났고 모든 사람들은 돌아갔다.
나는 홀로 남아 후로와를 둘러보았다.
그 뜨거운 열기는 이제 식고 쓸쓸히 아무도 없는 후로와에 서있는데,
내가 누구를 위해 춤을 추었나.. 하는 약간의 허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 대회에서 나는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선배를 처음으로 이기고 우승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 선배에게 미안한 마음이 한구석에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 선배는 그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선수생활을 마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다 털어버리고 나는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동경 세계대회 선발전 이었던 그 대회는 나의 댄스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던 대회였다.
그러나 나는 세계대회를 출전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가난했고 그 당시 댄스는 사회적으로 아직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댄스스포츠를 국내 최고의 생활체육으로 만들어
누구나 댄스를 즐길 수 있도록 하여 활성화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햇살이 나타날 무렵의 봄날..
나의 젊은 시절의 한 페이지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젊은 시절의 좋은 경험 (2) : 끝
(글쓴이 : B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