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대통령
글쓴이 : 유인경 경향신문 부국장 겸 선임기자
출처 : 유인경의 수다의 힘 (2012.7.12)
“인경씨는 김진숙씨가 안 궁금해요?”
지난해 봄, 몇몇 사람들과 밥 먹는 자리에서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뜬금없이 물었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던 내 눈앞에 놓인 한끼 식사의 소중함에 감사하고 반찬에 탐닉하던 나는 할 말이 없어 머뭇거렸다.
“김진숙씨는 노동운동가 이전에 같은 여자잖아요. 여자 혼자 그 높은 곳에서 밥은 어떻게 먹고, 무슨 생각을 하며 24시간을 보내는지, 그리고 저렇게 오랜 시간 다른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 걸고 버티는 이유가 뭔지 노·사를 떠나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부산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 (경향신문DB)
그날 돌아와 김진숙씨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보수와 진보, 노와 사, 여성과 남성, 경상도와 전라도를 다 떠나 내 또래인 한 중년 여성의 생존이 인간적으로 궁금해졌다.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게 상식이고 인간애가 아닌가. 그래서 대학 시절에도 절대 데모 한 번 해보지 않은 내가 희망버스 대신에 희망기차를 타고 부산에 다녀오기도 했다. 직접 대화는 못하지만 멀리서라도 김진숙씨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상의 평온함에 빠져 주변의 아픔에 눈감아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난 그동안 정동영 고문에 대해 많은 오해를 했다. 아마도 정치인치고는 너무 수려한 얼굴(몸매는 아닌 것 같다), 카메라 앞에서 더 빛을 발하는 제스추어, 선동적인 연설, 하도 일정이 많고 여러 사람을 만나서 여기저기 기웃거린다는 인상을 주는 것 등등이 장점이면서도 얄미워 보였다.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는 물론 용산참사 유가족 모임, 온두라스에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고 억류된 한지수양 구명운동, 홍익대 청소부들과의 대화 등등도 매스컴에 등장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솔직히 나는 정치인들이 민생탐방을 한다며 수염 기르고 논이나 탄광에 가고, 서민 생활 체험한다며 시장에 가서 국밥 먹고 1만 원 정도 물건을 사는 행태가 참 역겹다. 민생은 날 잡아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닦고 세수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있어야지 수행원들 데리고 가서 사진 찍고 오는 게 무슨 민생탐방이며 국밥이나 떡볶이 먹는 게 무슨 서민 생활인가….란 편견이 심했다.
“아유, 쇼야 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자들이 정치인인 것 같아. 처음 본 시장 아주머니에게 마치 숙모 보듯 친근한 눈빛이 어떻게 나오냐고.”
(경향신문DB)
그런데 정동영의 ‘쇼쇼쇼’는 진짜 생활이 됐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 그는 영하 10~13도의 추운 날씨에도 매일 빠짐없이 집회에 참석했다. 모피코트는커녕 그 흔한 오리털 점퍼도 안 걸치고 여성들처럼 속바지나 거들도 입지 않고 종이 한 장 깔아둔 맨바닥에 앉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난 속으로 혹시 엉덩이에 감각이 잘 안 느껴지도록 보톡스 주사나 필러를 한 게 아닐까….란 민망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알고보니 몸이 시리고 저려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다녔단다).
홍대 청소부들, 한지수씨, 김진숙씨 사건들이 하나씩 해결되는 과정을 보면서 정치인의 힘이 참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다. 시민단체들이 1년 내내 목소리를 드높여도, 심지어 노조원이 자살해도 눈썹 하나 까딱 않던 권력층이 국회의원의 한마디에 타협점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꽂힌’ 일은 무엇이건 끝장을 보는 징그러운 사람이다.
‘소울드레서’ ‘쌍화차와 코코아’ ‘빨리빨리쿡’ 등 젊은 여성들이 주로 활약하는 인터넷 카페에서도 정동영의 진정성을 재확인했다며 응원의 글을 담아 책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혼자 성실하게 러브레터를 보내도 응답하지 않던 짝사랑 대상이 답신 러브레터를 보낸 것처럼 정 고문은 그 책을 보고 행복해했다.
정동영 고문은 지난 총선에는 고향을 떠나 서울 강남 을에 출마했다. 한명숙·이해찬 등 당권파들이 그에게 “전 대통령 후보답게 장렬히 전사하라, 혹시 살아오면 다행이고.”란 메시지를 보낸 것 같다. 미련하리만치 열심히 이집저집,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10평 남짓한 대치동 아파트에서 잠자며 마을 주민의 고충을 듣기도 했다. “어느 컴컴한 곳에서 살짝 ….”이라고 주장하던 김종훈 후보는 새누리당이란 깃발만 펄럭이면 그 뿐이었다. 아직도 그 동네에는 사람 냄새보다는 돈 냄새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았다.
주변에서는 “강남이야 철옹성이지만 그래도 많은 국민이 진정성을 평가해주니 이번에 다시 도전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야 민주통합당 경선도 흥행의 재미를 보장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는 지난 9일 불출마를 선택했다.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 (경향신문DB)
“제가 가고자 하는 새로운 길은 그동안 추구해왔던 가치와 정책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정권교체를 이루는 데 저를 바치는 것입니다. 5년 전 대선 패배로 많은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 드린 바 있습니다. 저는 오늘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합니다, 조금 더 멀고 길고 험한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권교체의 길을 가겠습니다”
정 고문은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자들을 향해서도 “많은 서민이 살기 어려워 절규하고 있고 여전히 반칙과 특권이 난무하고 있다”며 “우리는 하나가 돼서 경제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길로 가야 한다, 후보 여러분이 더 치열하게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가치와 정책을 준비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날 그를 아끼는 많은 이들이 함께했고 트위터나 메시지를 통해 의견을 남겼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역사학자)
정동영 후보도 자신이 그동안 추구했던 길이 패배의 길이었고, 이것이 대중의 신뢰도를 받지 못하는 길이었구나를 깨닫고 그다음부터 정말 밑바닥으로,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서 그는 다른 세상을 발견했습니다. ‘아, 거기 또 다른 세상이 있구나.’ 그 속에서 그가 길을 열었었던 남북 교류의 기제였던 고성이나 속초 상점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걸 보면서 그는 자책했고, 용산 어머니들의 눈물을 보면서 그는 다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줄기차게 한진과 쌍용과 기륭 현장을 찾았습니다.
저는 이 노선이, 비록 그가 대선 출마의 길을 접었습니다만 민주당의 남은 대선주자들이 이 가치를 신뢰하는 길에 동참해줄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촉구하는 바입니다. (대한문 앞 기자회견장 멘토단 발언)
서해성 (소설가·역사학자)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날이 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유종일 한홍구 이해영 최태욱 우석훈 선대인과 대한문 앞에 섰다. 용산 한진 한미FTA 등에서 서로 발등을 밟으면서 가까워졌던 정동영이 대선을 향한 발길을 멈췄다. 또 발등이 뜨거웠다.
정동영 의장이 추구해 왔던 일은 지난 3, 4년 동안 해 왔던 일은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정동영이란 정치인이 어떤 길을 가는가, 그 과정에서 동지가 된 것입니다. 그때 그는 정말로 땅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하늘로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걸 봤습니다. 그분이 온몸으로 하는 걸 봤습니다.
제가 가장 감동했던 것은 어떤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 겨울에 추우므로, 집회에 나가야 해서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집회에 참석하는 걸 제가 봤습니다. 열기를 다른 방법으로 채울 수 없기 때문이죠.
이런 사람이 정치한다면, 정말 이런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하는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다른 대선후보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땅에 있는 스카이들이 땅의 스카이가 정말 하늘의 스카이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려면, 정동영이 걸어왔던 것처럼 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한문 앞 기자회견장 멘토단 발언)
정혜신 (심리치료 전문 의사·마인드프리즘 대표)
어제 대한문 쌍차 분향소 앞에서 불출마 선언을 한 정동영 전 의원.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힘 없는 이들 곁을 한결같이 지켰던 그에게, 새롭고 설레는 기대감과 깊고 깊은 합장을 보낸다. 두 손 모아….
전재숙 (용산참사 유가족)
우리 의원님! 이 자리가 대선 출마하는 자리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왜 이렇게 눈물이 자꾸 나오려고 하네요. 우리 의원님 많은 희생을 하셨습니다. 저희 없는 사람들, 또 용산의 저희 같은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서 발로 뛰고 온몸을 던지셨던 이 분이 정말 대선에 나온다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 의원님은 없는 사람들, 가난한 서민을 위해서 사시는 분이라서 많은 걸 버리고 이 정권 바뀌는 데 공신을 하실 거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정권에는 꼭 대선에 나오셔서 승리해서 저희와 함께 그 때까지 열심히 함께 하고 기다려 나갈 겁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자마자 러브콜이 쏟아진단다.
지난 총선 무렵엔 전화도 받지 않던 정치인들이 “만나자” “나를 도와달라” “훌륭하다” 등등 찬사와 더불어 자신의 손을 들어주거나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도우라고 부탁한단다. 왜 자신들이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고 진정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업혀 가려는 것일까.
결단을 내리고 진짜 정치인으로 거듭난 정동영 고문에게 박수를 보내고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사람들은 그가 청와대가 아닌 길거리 대통령이 됐다고 한다. 어쩌면 청와대 대통령이 되어 온갖 비난을 받는 것보다 길 위의 서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정치인이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정치란 권력의 월계관을 쓰는 게 아니라 아픈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