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 리더를 위한 효과적인 리더십!
당신 스타일에 맞는 리더십을 계발하라
레잇 앤더슨 지음
1장 격세지감, 너무나 다른 시대
사울 왕이 물러나고 다윗 왕이 들어서는 시기에 B.C. 첫 천년의 전환기에 내란이 이스라엘을 갈라놓았다. 지파, 부족, 가족, 개인까지 어느 리더를 따를지 결정해야 했으며,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제를 위해 선택하신 리더와 내일을 위해 선택하신 리더 사이에 불가능해 보이는 결정을 해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적절한 선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 흥미롭지도 않은 이름들과 숫자들 속에 고대의 한 집단, 곧 잇사갈 사람들에 대한 희미한 진술이 숨겨져 있다.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두목이 이백 명이니 저희는 그 모든 형제를 관할하는 자이며”(대상12:32). 이들은 100만이 넘는 백성 중에 겨우 200명에 불과했으나 이들에게는 추종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이 변화를 일구어 낸 것은 이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장 리더의 역할이 왜 이렇게 힘들까?
사람처럼 교회도 늙고, 병들고, 죽는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교회는 12년 이상 되었으며, 이미 정체 단계에 들어섰거나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회를 이끄는 일은 정말 어렵다. 이러한 교회들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흔한 질병을 앓는다.
또한 교회가 사람들이 역기능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대신 역기능을 보상할 때 어려움이 찾아온다. 건강하지 못한 보상 체계를 가진 교회는 전체 교인을 갈등에 몰아넣고 그리스도인의 자비라는 미명 하에 소수가 교회를 장악하도록 허용하며 제 역할을 못하는 교인들을 각종 위원회 위원으로 지명하거나 교회 운영위원으로 선출함으로써 문제를 확대시킨다.
대결과 사랑의 징계가 있어야 할 곳에 용납과 지원이 자리할 때가 많다.
보상 체계가 오랫동안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영구화될 때 문제는 복잡해진다. 그 결과 교회에는 반대자가 끊이지 않으며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들을 다른 교회에 빼앗기고 만다.
리더의 역할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복잡하다. 모든 교회, 모든 사회, 모든 조직이 다르다. 매우 성공한 리더들이 자리를 옮긴 후에는 비참하게 실패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자신의 성공을 재현하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의 방법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때때로 가장 세밀한 연구와 분석도 똑같은 리더가 어떤 상황에서는 성공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비참하게 실패하는 이유를 밝히지 못한다.
수천 가지 변수가 있다. 우리 대부분은 모든 변수를 설명하기는커녕 열거할 수도 없다. 때문에 우리는 비난하거나 설명할 몇 가지 변수를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택한다.
리더십이 상황적이라는 사실은 리더의 역할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어떤 리더도 한 곳에서 아주 효과적인 것이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없다. 마틴 루터와 마틴루터 킹이 역사에서 자리를 맞바꾼다면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은 적절한 시대, 적절한 장소에 나타난 적절한 리더였다.
3장 리더십에 관한 신화들
*신화 1: 성공한 리더는 모든 자질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진실 : 자질이 리더십과 관계가 있고 리더십에 도움이 되지만 리더십에 필수적이지는 않다. 잠재적인 리더들은 타고나지만 성공적인 리더들은 첫째 기회, 둘째 계발, 셋째 경험의 결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 세 가지 요소를 갖추었다고 해서 위대한 리더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리더의 자질 |
예 외 |
말에 조리가 있어야 한다. |
모세는 말을 잘하지 못했다. |
리더가 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
모세는 사양했고, 요나는 도망쳤다. |
도덕적이어야 한다 |
다윗은 간음을 했고, 살인도 했다. |
지혜로워야 한다 |
솔로몬은 이방 아내들과 신들로 이스라엘을 더럽혔다 |
대인 관계가 원만해야 한다 |
바울은 바나바, 그리고 다른 사람과 원만치 못했다. |
비전이 있어야 한다. |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으며, 도착한 후에도 자신이 있는곳이 어딘지 알지 못했다. |
참을 줄 알아야 한다. |
마틴 루터는 농민들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참지 못했다. |
충성심을 유발할 수 있어야 한다. |
아브라함 링컨은 인기 투표에서 표를 얻지 못했다. |
자비로워야 한다. |
아돌프 히틀러와 이디 아민은 무자비했다. |
근면해야 한다. |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골프를 많이 쳤다.
케네디 대통령은 오후에 낮잠을 잤다. |
*신화 2: 리더십은 리더에 대한 것일 뿐이다.
*진실 : 엘리스톤은 이렇게 설명한다. “리더십은 어제나 세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가진다. 리더, 그를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상황이다. 산소, 연료, 열이 발화에 필수적이듯이 이러한 요소들은 리더십에 필수적이다.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리더십은 사라진다. 불은 꺼진다.”
나는 미네소타 주 에든 프라이어리에 있는 한 교회를 섬기고 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리더들이 성공하리라고 기대하며, 실패할 경우 깜짝 놀란다. 그러나 듣기로는 다른 교회 교인들은 리더들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하며 성공할 경우 깜짝 놀란다고 한다. 내가 우드데일교회에서 누린 성공적인 리더십의 상당부분은 나 자신보다 교회에 대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 교회는 사람들이 리더가 되도록 돕는 교회이다. 확신컨대 내가 외적인 성격이 비슷한 다른 교회를 담임한다면 나는 쫓겨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네소타의 한 교회는 연달아 담임목사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교인들은 연달아 세 번이나 실패자를 만난 것은 억세게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정반대다. 병든 교회가 10년도 안 되는 사이 연달아 3명의 목사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신화 3: 모든 리더는 영웅이다.
*진실 : 가장 성공적인 리더는 그가 살거나 섬기는 공동체 밖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거의 존경을 받지 않는다.
모든 훌륭한 리더는 다른 세대에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또는 현재 세대가 자신들의 훌륭한 리더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 링컨은 역사상 위대한 리더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나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에 심한 비판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이 그의 암살을 슬퍼하지 않았다.
리더에 대한 갈망은 영웅에 대한 갈망일 때가 많다. 그러나 영웅적인 리더는 드물다. 리더십은 행동의 한 기능인 반면에 영웅은 환경과 기회의 산물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모든 영웅이 훌륭한 리더는 아니다.
대부분의 리더들은 조용히 일하며, 이들의 성공은 오랜 기간에 걸친 일련의 지혜로운 결정과 훌륭한 행동의 결과로 나타난다. 리더와 영웅이 함께 하는 경우가 드물 듯이 리더와 명성이 잘 어울리는 경우도 드문 것이다.
*신화 4: 목사들은 당연히 리더십의 은사를 갖추고 있다.
*진실 : 영적 은사들은 일차적으로 교회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리더의 역할은 부지런함으로 교회의 일을 위해 협력이 이뤄지게 하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4절부터 8절은 성경에서 리더십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단락이다. 그것을 통해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리더십은 많은 은사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더욱 큰 은사’는 아니다.
-로마서 12장의 강조점은 은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함으로’ 활용
하는 데 있다.
*교회 지도자의 자격
그렇다면 리더십에 있어 자격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디모데전서 3장 1절부터 7절을 보면 교회 지도자의 자격을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것이 행동에 기초한 자격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의 행적이 지도자의 자격을 결정한다.
리더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을 한다. 리더십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을 찾아내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4장 복잡함, 이제는 간단한 것이 없다
나는 복잡함을 ‘복합적인 변수를 갖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방을 생각해 보라. 당신이 편안하냐 그렇지 못하냐는 복합적인 변수들에 달려있다. 온도, 습도, 빛의 양, 공기의 흐름, 다른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소음, 의자의 크기와 디자인, 전날 밤의 수면 상태, 당신에게 이 책이 재미 있느냐 아니면 따분하냐 등.
내가 당신의 편안함은 방의 온도에 달려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온도를 올리거나 내리면, 어떤 차이가 생길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온도를 조금 올리면 편안한 기분이 들 것이다. 반면 어떤 경우는, 온도를 조금 올리면 의자가 너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서로 연결된 이 모든 변수가 당신이 어느 정도 편안하냐를 결정한다. 복잡함은 이 모든 변수와의 상호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있어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21세기는 어느 세대보다 많은 변수를 가진 역사의 한 장이다.
앞선 세대가 중요한 리더를 선택할 때 천 개의 변수를 다루었다면 지금 우리는 만개의 변수를 다루고 있다. 사회의 복잡함이 교회와 종교 단체를 둘러싸고 그 속으로 파고든다. 이혼, 재혼, 혼합가정(각기 자녀를 데리고 재혼하여 이룬 가정) 등. 특히 혼합가정의 증가는 아이들이 번갈아 가며 주말을 다른 곳에서 다른 부모와 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일학교 교사들로 하여금 아이들이 주일마다 나와 연속적인 종교교육을 받을 수 없게 만든다. 주일마다 수업은 독립적이어야 하고 어떤 경우 아이들은 번갈아 가며 주말마다 서로 모순되는 교리를 배울 수 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교육을 담당하는 리더들은 복잡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저런 변수들과 마주치게 된다. 교회의 성공과 실패는 교리, 교단, 위치, 목사, 평신도 리더, 음악 스타일, 인종적 사회경제적 구성, 설교의 적절성, 교인들의 영적 수용성을 포함한 변수들의 거의 무한한 결합에 달려있다. 예배 시간, 문화적 적절성, 재정, 주차장의 크기를 포함한 더 많은 흔한 변수들도 있다.
이 모든 복잡함 속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하나의 간단한 해결책을 쓰는 것이다.
“더 많이 기도하라”
“책임자를 바꿔라”
“말씀을 가르쳐라”
“프로그램을 개발하라”
“남성 사역을 시작하라”
“강단에서 복음에의 초대를 하라”
“화해를 도모하라”
등등..
그러나 이런 유일한 해결책은 재난과 환멸을 가져올 때가 더 많다.
너무나 많은 교회 지도자가 적절치 못한 하나의 단순한 해결책에서 똑같이 부적절한 다른 해결책으로 옮겨다닌다. 이러한 많은 해결책은 아무런 변화도 낳지 못한다. 어떤 것들은 많은 해를 끼친다.
북미 사람들은 알약 하나가 모든 병을 낫게 해 줄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 생활은 훨씬 더 복잡하다. 간단한 해결책들이 21세기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리더들의 전략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몇몇 변수에 대한 이해
리더들이 21세기에 다룰 모든 것을 알려주기에 충분한 변수목록이 혹이라도 있는 척 한다면, 이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일단 리더십 문제의 복잡함을 알게 되었다면 많은 변수를 숙지하고 분석하며 우선 순위를 매기는 기술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 갱신
교회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영적 갱신이 없다면 목사를 바꾸거나, 새 간판을 걸거나, 매력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일이 큰 유익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여러 해 전에 미국의 한 교단의 대표가 내게 그의 교단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그 교단은 분명히 교회수, 교인수, 재정 수입이 줄어들고 도덕성도 떨어지고 있었다. 교단 지도자들은 유명한 컨설턴트를 고용해서 교단의 상황을 연구하여 쇠퇴를 막고 갱신을 가져올 방책을 찾게 했다. 광범위한 연구 끝에, 컨설턴트는 교단 리더들과 마주했다.
“제가 모든 것을 살펴본 후 발견한 것은 이 교단이 너무나 어려운 시기를 맞았기 때문에 어떤 반전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몇 년 후면 여러분은 파산할 것입니다. 도움이 될만한 방책이 전혀 없습니다.”
점심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 때문에 그는 교단 지도자들에게 정회를 선포했지만 사람들은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침묵을 깼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습니까?”
그러자 컨설턴트가 대답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뿐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컨설턴트가 할만한 조언은 아니다!)
그는 회의실을 나갔다.
더 많은 침묵이 흘렀다. 그때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나오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옆 사람도 그렇게 했다.
마침내 모든 리더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들은 점심을 걸렀다.
기도회는 자발적이고 초자연적이었다. 기도회는 오랜 시간 계속 되었고 그 일이 있은 지 3년 후, 교단은 영적 갱신을 경험했고,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교단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영적으로 갱신된 교회라도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을 수 있다. 1세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보라.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과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6:1~7)
이 사건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에 심각한 위기를 안겨다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인종적 라이벌 사이의 분열 위기 때문에 교회의 기능이 위험에 처했다. 지혜로운 리더는 말씀 사역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재정과 인종적 차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경우 전체 교회가 분열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사역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구제비를 관리할 일곱 집사를 결정했다.
선택된 일곱 집사들의 이름은 모두 헬라식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은 구제비에서 자신들의 몫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불평했던 교회 내 인종 소수에서 선택되었다.
이것은 영적 해결책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계에 대한 인식에 기초를 둔 조직적인 해결책이었다.
그렇다. 최우선 순위는 영적인 것이지만 그것만이 유일하게 우선 순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진리의 하나님이시듯 복합적인 방법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크기
한 단체의 크기는 무엇보다 중요한 변수이다.
대규모 교회와 단체가 더 복잡한 것은 사람이 더 많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구성이 더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기의 변화에 따라 핵심 변수도 달라진다. 그러나 교회의 크기와 운영의 어려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복잡한 조직을 이끄는 것과 소규모 조직을 이끄는 데 소모되는 노력과 수고는 비슷할 수 있지만 그 방법과 기술은 전혀 다르다.
조직 이론은 한 유기체 또는 조직의 모든 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당신이 전체를 바꿀 때 모든 부분이 영향을 받는다. 당신이 어느 한 부분을 바꿀 때 마찬가지로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리더는 결정과 변화가 전체 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
또한 21세기 리더는 중요한 부분을 바꾸기 위해서는 전체 사역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모든 리더의 지원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리가 멀고 관계가 없어 보이는 조직의 부분들이 각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 희생이 요구될 것이다. 복잡함과 조직이론은 모든 조직의 변화에서 함께 간다. 리더는 변화의 과정의 매니저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결정하고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한다.
리더의 변화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충고를 하고 싶다.
1)리더의 근본적인 변화는 잠재적으로 조직과 그가 이끄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리더의 변화를 다른 사람들의 변화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치며 완전히 새로운 리더가 들어서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2)너무 자주 바꾸지 말라.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거나 계속해서 변하는 것은 잠재적으로는 단체를 무너뜨릴 것이다.
3)따르는 사람들에게 따라잡을 시간을 주라. 리더는 자신의 새로운 접근을 완전히 소화해 낼 수 있다고 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리더와 같은 속도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들은 듣고, 배우고, 소화한 다음 최종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할 필요가 있다.
한 미래학자가 2,000년대에는 인간의 지식이 17일마다 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복잡함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삶과 리더십은 우리가 21세기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더 복잡해질 것이다.
5장 바쁨, 시간이 없다
시간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하루는 24시간, 일주일은 168시간, 1년은 8,760시간이다.
이 숫자는 언제나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이 우리가 교회를 이끄는 방법을 크게 바꿔놓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다.
60년대 미래학자들은 계속 줄어드는 노동시간 때문에 레저가 국가 주요 산업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그것은 크게 빗나가고 있다.
지난 20년 간의 변화를 생각해 보라.
내 용 |
1977년 |
1997년 |
맞벌이 부부 |
66% |
49% |
맞벌이 부부와 18세 이하의 자녀 |
49% |
67% |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회사일을 집에 가져오는 사람 |
23% |
33% |
직장과 아내가 있는 아버지가 매일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
1.8시간 |
2.3시간 |
직장과 남편이 있는 어머니가 매일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
3.3시간 |
3.0시간 |
직장과 아내가 있는 남자가 주중 하루평균 개인활동에 쓰는 시간 |
2.2시간 |
1.6시간 |
직장과 남편이 있는 아내가 주중 하루평균 개인활동에 쓰는 시간 |
1.7시간 |
1.3시간 |
이 통계 조사에서 직장 생활이 얼마나 힘든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일이 “매우 힘들다” 88%
일이 “매우 빠르다” 68%
아직도 일을 제대로 못한다 60%
대처하기가 어렵다 13%
탈진할 것 같다 71%
이 조사는 “노동자들이 과거보다 더 많이 지쳐있고 불안정하며 일과 가정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주일의 시간은 그대로인데 노동시간이 늘어난다면 어디서 그 차이를 메우는가?
그들은 더 적게 자고 더 많이 일하며 늘 바쁘다. 바쁘다는 것이 능력 있다는 증거이자 성공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런 바쁨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과 일련의 교회 변화를 이미 찾아내었는가?
*주일 저녁 예배 참석 인원은 물론이고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 교회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주일저녁은 다음날 등교 준비와 새로운 한 주간의 직장 생활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다.
*단기 봉사가 장기 봉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여름 성경학교가 예전의 2주에서 5일 정도로 줄었다. 성가대도 매주일 서는 대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선다. 당회원들은 단기 임기를 선택한다.
*준비 시간이 줄고 있다. 주일학교 교재와 그 밖의 자료 선택 기준 중에 하나는 쉽고 준비 기간이 짧아야 한다는 것이 되었다.
*교회 활동에 한정된 숫자만 참여한다. 주일학교 소풍은 잔디를 깎거나 가족끼리 행사에 자리를 내어줄 확률이 많아졌다.
*주일이 밀린 일을 하는 날이 되었다. 부모와 자녀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지쳐서 집에 돌아온다. 개인, 가족, 그리고 집안의 허드렛일은 주말로 미뤄진다. 그 결과 토요일과 일요일은 집안을 손보고,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고, 쇼핑을 하며, 공과금을 내고, 목욕탕을 가거나 부족했던 운동을 하고, 노부모님을 방문하는 등 밀린 일을 하는 날이 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수면 부족이 누적되고 결국 다음 주를 위해 밀린 잠을 자야할 필요를 느낀다.
*교회도 경쟁을 해야한다. 시간은 금이고, 개인적 성경 공부나 영적시간, 기독교 단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교회 밖의 초교파적 수련회 등에서 똑같거나 더 큰 가치를 얻을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최소한의 시간으로 가장 큰 영적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해 자신을 투자한다.
바쁜 사람들의 리더
바쁜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들이 배워야 할 몇 가지 교훈이 있다. 이해하기와 가르치기, 동기부여, 본보이기 등이 그것이다.
바쁘다는 사실과 헌신의 수준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추정하지 말라. 단지 어느 부부가 너무 바빠 주일 저녁 예배 참석이나 주일학교 교사 활동이나 교회의 어느 부서에서 봉사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들이 결함있는 그리스도인이거나 이들에게 앞선 세대의 헌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비교해 보라.
어제의 우선 순위들 오늘의 우선 순위들
조직(단체) 개인
교회 가족
의무 기회
출석 의미
성실성 효율성
이것은 1950년대 성인들이 가족을 덜 보살피거나 덜 효율적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성인들이 교회나 성실성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 것과 같다. 차이는 우선순위에 있다.
오늘날의 부모는 주일 저녁을 집에서 자녀들과 함께 보내고 등교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하는 것이 주일에 다시 교회에 가서 두 번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결정할 수 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어머니는 자녀들이 기독교 사립학교에서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일학교 교사 활동을 5년간 쉬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같은 가정의 아버지는 화요일 밤은 교회 부서 회의에 참석하는 것보다 노부모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릴 수 도 있다.
솔직히 자녀와 부모에게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비난하기 어렵다.
본으로 보여주는 리더십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리더의 본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리더가 우선순위를 잘못 정하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리더가 바쁜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적어도 하루 동안은 쉬면서 바쁘지 않게 지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면 그 많은 일을 다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새삼스러운 질문이 아니다. 히브리 농부들은 3천년 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자주 던졌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7년마다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추수하지 않으면 가족을 어떻게 먹여 살립니까?”
영적인 대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7일 동안 하는 일을 당신은 6일 동안 할 수 있다고 믿는데는 큰 신뢰가 필요하다. 우리가 계속해서 바쁘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개인적이며 공적인 증거라는 것을 인정하자.
우선 순위, 스케줄, 그리고 안식일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외적인 증거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눈으로 봐야 믿는다. 리더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여주는 사람이다.
필요가 커지고 사용가능한 시간이 줄었다면 선택은 많지 않다.
첫째, 더 많이 일한다.
둘째, 더 적게 일한다.
셋째,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이 일한다.
교회야말로 20/80현상을 빈번히 보여주는 좋은 예다. 20%의 사람들이 80%의 일을 한다. 20%의 사람들이 일을 더 적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일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거나 80%사람 가운데 자원봉사자가 그 일을 할 것이다. 리더들은 많은 사람이 자원하거나 참여하지도 않는 것은 항상 모든 일을 해왔으며 앞으로도 모든 일을 잘 하고 싶어하는(모든 일을 자신이 해야하는 데 대해 투덜거리면서도) 충성스런 소수의 사역에 밀려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더 적은 것을 가지고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지 않을까?
지금 운영되고 있는 모든 일들 가운데 어느 것이 본질적이고 어느 것이 그렇지 않은지 결정하라. 미국인들에게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이룬 창의적인 예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속도로 정화 운동이었다.
수십년 동안 정부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
다시 말해, 고속도로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처음에는 25달러 벌금의 경고판을 도로변에 세웠으나 효과가 없자 벌금을 1,000달러까지 올렸다. 그러나 역시 효과가 없었다.)
그 때 한 창의적인 텍사스 주민이 멋진 의견을 내놓았다.
자원봉사자를 모집하여 한 사람이 1년에 두차례 2마일 간격으로 고속도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 그 대신 도로변 표지판에 경고 문구를 자원봉사자의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대성공을 거두어 유럽까지 확산되었는데, 결과는 대단했다. 첫째, 고속도로 관리국의 임금이 수억 달러나 절감되었다. 둘째, 도로변이 한결 깨끗해졌다. 셋째, 자원봉사자들이 쓰레기를 덜 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도록 독려하게 되었다. 넷째, 자원봉사자들이 주인의식과 만족감과 성취감을 얻었다.
더 적은 돈과 사람으로 더 많은 일이 이루어졌다.
교회 사역은 감독이 아니라 권한 부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 내에 교육 위원회를 운영하는 대신에 교사들이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학생회 후원자들이 학생회 사역을 이끌어간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에게 수표를 건네는 기부자들을 생각하지 우리가 그들에게 건네야 할 수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쁜 사람들은 모든 시간을 귀중하게 여긴다. 이들이 한 주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많이 ‘지불하는’ 곳에 그 시간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이 예배라면 예배에 참석할 것이다. 그것이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여기서 지불되는 것은 현금이 아니다. 이것은 도전, 성장, 평안, 위로, 정보, 하나님과의 만남, 우정, 의미, 만족,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외의 모든 중요한 것들이다.
21세기 리더는 따르는 자들에게 매우 잘 지불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따르지 않을 것이다. 허비할 시간이 없다. 선택할 다른 항목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성공적인 리더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녀의 필요가 충족되도록 내가 우리 교회를 통해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6장 선택, 카달로그 문화
선택은 포장도로, 실내 화장실, 읽기와 쓰기만큼이나 현대 문화의 한 부분이 되었다. 선택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우리는 선택을 당연히 여기며 없으면 이상하게 보인다.
쇼핑몰에 가서 운동화 코너에 들렀다고 생각해 보라.
매우 상냥한 젊은 직원이 인사를 하며 뭘 찾는지 묻는다. 당신은 운동화가 낡아 새걸 하나 사신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당신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뒤쪽으로 가서 신발 케이스를 하나 가지고 나오더니 운동화를 꺼내서 보여준다. 사이즈가 270인 농구화로 가격은 99달러이다.
그것을 본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멋진데요, 하지만 제 사이즈는 275이고, 제가 원하는 건 농구화가 아니라 목이 짧은 런닝화예요. 그리고 세금 포함해서 75달러가 넘지 않는거면 좋겠는데요.” 그러자 직원은 웃으면서 응수한다.
“이건 정말 좋은 운동화입니다. 우리 조사에 따르면 이건 가장 많이 신는 사이즈에다 가장 있기 있는 디자인입니다. 값도 아주 적당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틀림없이 그 농구화를 사지 않고 나올 것이다. 당신은 그곳을 나오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직원도 잘 생겼고 가게도 멋지지만 나한테는 관심이 없어. 저들은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도 없어. 저들은 자신들이 팔고 싶은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
교회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방문자들은 목회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계획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이 우리와 말이 다르거나, 우리와 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거나, 우리의 음악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거나, 우리의 기도나 신조를 모르거나, 성경을 제대로 못 찾거나, 우리에게 편리한 시간에 오지 않으면,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처럼 바꾸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당신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바뀌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방문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가?
“이들은 내게 관심이 없어.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관심도 없어. 이들이 원하는 건 이미 자신들이 하고 있는 방식 뿐이야.”
선택이 주어지지 않을 때, 실제로 누구 하나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예배 시간, 장소, 스타일에 대해 다양한 선택을 제공하는 것은 종교가 현대인들의 이기적인 소비주의를 받아들인 최악의 예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스케줄을 접고 교회에 맞추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을 신약 복음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에 비추어 보자. 신약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복음서가 있다.
우리는 마태를 읽고 마가를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아주 익숙해, 마치 최근에 읽은 거 같아.”
이것은 마가복음의 95%가 마태복음에도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누가복음을 읽으면 또 마태나 마가복음과 많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좀 다르지만 요한 복음이 있다.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가 아닐까? 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전기가 넷이나 필요한가?
그것은 각각의 복음서가 서로 다른 청중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히브리인 청중을 위해 기록되었는데, 이들은 구약과 유대 전통을 잘 알고 있었다. 마가는 이방인 청중을 위해 기록했는데, 이들은 구약 성경과 유대 전통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몰랐다. 마가복음은 기본적 내용은 마태복음과 같지만 길이가 짧은데다 유대인과 관련된 부분들은 대부분 건너뛴다. 누가복음은 다른 접근을 한다. 누가복음의 첫부분은 신약 성경의 다른 부분보다 고전적인 스타일의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그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주제별로 나열한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없는 것을 제시하며 보다 직접적인 전도 스타일로 기록되었다. 사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기술의 목적을 이렇게 말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분명히 하나님과 신약성경 저자들은 서로 다른 청중에게 서로 다른 선택을 제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서로 다른 시대의 청중에게 서로 다른 스타일의 예배를 제공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들에게 충족되어야 할 다양한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리더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사람들이 선택의 문화에 익숙한 지금에 특히 그렇다.
찍찍이(단추 대신 사용하는 접착 테이프)를 아는가? 그것은 수백 개의 작은 후크를 통해서 양쪽이 서로 붙어있게 한다. 후크가 많을수록 접착력은 강하다. 교회에서 다중 선택은 찍찍이와 같다. 선택이 많을수록, 교회와 교인들 사이의 결합력이 강해지고 결합은 더 오래갈 것이다.
다음 질문들에 세 가지씩 답을 해보라.
*교회가 가장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가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인가를 그만두어야 한다면 어떤 것을 그만두어야 하는가?
*우리가 하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하고있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우선순위를 정하고 새로운 선택을 하라. 그리고 새로운 선택들을 재정적으로 어떻게 지원할지 결정하라. 리더가 가장 많이하는 일반적인 실수 가운데 하나는 자원의 강점보다 약점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이다.
많은 단체들이 자신들이 잘할 수 없는 것에 자원을 쏟아 붓고 자신들이 잘 하는 것은 이용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7장 경쟁, 마라톤처럼
아이러니컬하게도 보다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신화 가운데 하나는, “교회는 비즈니스가 아니며 따라서 비즈니스처럼 운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물론 교회는 기업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재정이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지출과 수입이 반드시 기록되어야 하고, 각종 공과금을 납부해야 하며, 원천 소득세를 떼어 납부해야 하고, 지출이 수입보다 많아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비즈니스이다. 교회는 또한 돈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는 면에서 비즈니스이다.
사실 모든 교회의 기부자(헌금자)들은 다른 종교 단체나 자선 단체들로부터도 기부하라는 간청을 받는다. 개개인은 자신들을 위해 자신들의 돈을 어떻게 배분해서 단체에 헌금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재 교회가 의식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이미 수없이 많은 사회 환경과 경쟁자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독교 및 교회는 크게 다르기 때문에 경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경쟁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직하고 성경적이도록 하자.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이 있을 때 모세는 바로의 술사들과 경쟁했다. 그리고 그는 이겼다. 그는 리더였으며 리더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은 신들 사이의 경쟁이었다. 여호와는 가나안의 어떤 신과도 경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민족과 민족이 맞붙고 신과 하나님이 맞붙었으며, 이스라엘과 여호와가 이겼다. 엘리야와 바알 제사장들과의 공개 경쟁은 놀라울 정도로 분명한 승리를 보여주었다.
경쟁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경쟁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의 일차적인 책임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경쟁에 직면해서 바른 선택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싸움터에서든 기도의 골방에서든 간에 리더는 바르고 그른 것 사이에서 선택할 줄 알고 더 좋은 것과 최고 좋은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8장 기대, 규범이 변하고 있다
21세기 교회 지도자들이 열거한 변화의 목록 가운데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 것은 ‘기대’ 였다. 그들은 한 세대 전보다 지금에 와서는 리더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리더에 대한 기대가 커졌으며 이것은 사람들이 리더가 되기보다는 리더를 비판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기술과 문화, 과학의 발전은 모든 면에서 탁월함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 탁월함의 유행병은 교회나 종교 단체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교회 음악이 최신 CD만큼 좋을 것을, 교회 주보가 광고지처럼 멋질 것을, 교회 건물이 회사의 최신 빌딩처럼 잘 관리될 것을, 교회 재정이 은행처럼 잘 관리, 보고 될 것을, 교회 사무원이 뮤추얼 펀드 서비스 직원처럼 친절하게 전화받을 것을, 교회 분위기가 월마트처럼 편안할 것을, 교회 음향이 콘서트홀처럼 뛰어날 것을, 그리고 주일학교가 놀이동산만큼 재미있을 것을 기대한다.
핵심은 수백만의 교인들이 이런 기대가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패에 대한 비난은 성공에 대한 찬사보다 더 보편적이 되었다. 이것은 한 사람의 가치를 은혜가 아니라 행위에 두는 신학적 결함이 있는 행위 문화에 기여하는가? 그렇다. 이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은혜와 탁월함 사이에 반드시 갈등이 존재할 필요는 없다. 탁월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 생겨난 기대들을 살펴보자.
옛 규범 |
새 규범 |
비고 |
성실이면 충분하다. |
효율성이 기대된다. |
오늘날의 리더는 얼굴을 보일 뿐 아니라 리더로 있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도 분명히 알것이라는 기대다. |
경건은 추정되는 것이다. |
경건은 요구되는 것이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사라면 경건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목사라고 해서 당연히 경건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
목사들은 목회에
준비되어 있다. |
목사들은 평생 배우는
사람들이다. |
옛 규범에는 학위, 과거 경력 등이 성공에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시되지 않는다. |
이성이 관계보다
중요하다. |
관계가 이성보다
중요하다. |
오늘날 리더는 지적인 신뢰성보다 대인관계의 기술이 뛰어나야 한다. |
영향력의 중심은 교단과 신학교이다. |
영향력의 중심은 대교회와 세미나이다. |
교회 지도자들은 점차 교회를 이끄는 본보기를 교단 내의 대교에서 찾는다. 이런 교회들은 알려지고 연구되며 설교부터 음악, 프로그램까지 주도자가 된다. |
설교가 더 중요하고
프로그램은 덜 중요하다. |
프로그램이 더 중요하고
설교는 덜 중요하다. |
이것은 설교의 중요성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중요성이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
사역은 리더에게 달렸다 |
사역은 팀에게 달렸다. |
개척을 위한 현대의 보다 전략적인 접근은 전임 목회자와 행정 담당자, 음악 담당자, 아동 목회 담당자를 포함한 사역팀을 만들어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다. |
성공은 좁은 비교에
의해 규정된다. |
성공은 넓은 비교에
의해 규정된다. |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는 수 백명의 전세계 다른 교회 지도자들과 비교된다. |
자격증이 매우 중요하다 |
실무가 매우 중요하다 |
교회가 목회자들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과 상관없이 당신이 일을 잘하면 자격증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따른다. 당신이 일을 잘 못하면 자격증에 상관없이 따르던 사람들이 떠나 버린다. |
규범이 바뀔 때, 많은 사람이 저항하며 옛 규범 아래서 성공하려고 더욱 열심히 노력한다. 이것은 당신이 일광절약 시간(써머타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시계를 그대로 두는 것에 비교된다.
우리는 나이가 많고 성공이 클수록 변화를 덜 좋아하며, 내일보다는 어제를 좋아하고, 옛 규범 아래에서 성공하려고 더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리더십의 현실 가운데 하나는 새천년의 변화는 리더에 대한 기대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9장 관계, 당신이 아는 사람들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해리스 폴(여론조사기관)의 질문에 대한 미국인들의 답변을 생각해 보라.
*관계(56%)
*종교적 믿음(21%)
*더 나은 세상 만들기(12%)
*성취를 가져다 주는 직장(5%)
*돈(5%)
점점 더 많은 근로자가 개인적인 관계와 가족관계를 크게 파괴한다는 이유로 전출이나 승진을 거부하고 있다. 갱들이 강한 것은 그들이 제공하는 관계 때문이라는 데에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하나의 갱은 소속된 집단이며, 의지하는 ‘가족’이며, 정체성의 발견하는 장소다. 똑같은 수준의 가시적인 관계집단이 대치되지 않는 한 갱들을 해체시키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잘 알려진 종교 지도자와 나눈 대화에서 나는 관계가 전도, 교회, 사역의 일차적인 출입구라는 확신을 점차 강하게 갖게 된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문을 두드릴 때는 1,000번에 한 명이 회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1:1,000의 비율이다. 하지만 믿는 사람의 가정에서 환대를 받은 이웃들은 둘 중 하나가 회심한다고 한다. 1:2의 비율이다.
또한 인상적인 것은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신념이 회심의 결정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친구를 사귀면, 회심자를 얻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최고의 관계를 세우는 사람이 회심자를 얻을 확률이 가장 높다.
그런데 다수의 미국인들은 관계는 원하면서도 어디에도 소속되기를 원치 않는다. 정치적 관심은 커졌으나 정당 당원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함께 살기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결혼은 하지 않는다. 그러한 경향은 교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우리가 새천년에 어떻게 전도를 해야할지에 대해 깊은 암시를 준다.
우리는 사람들이 교회에 온 다음 친구를 사귀던 옛 방식에서 사람들이 친구를 사귄 다음 교회에 오는 새로운 방식으로 옮겨왔다. 그렇다면 모든 교인이 서로 친구지만 외부인들과는 친구가 아닌 교회들은 어떻게 되는가?
내부인들이 모든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야 할 정도로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대답은 분명하다. 이런 교회들은 스스로를 섬길 뿐, 외부인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따라서 성장하지 않는다.
모든 교회 리더는 관계와 관계 구조가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모든 교회가 똑같으며 관계도 장소에 따라 세대에 따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리더에게 있어 자살 행위와 같다.
사교적인 사람을 교회 건물에서 끌어내어 지역 사회 속에 투입시켜라. 관계의 대중성과 중요성을 이용하라. 리더는 그룹마다 그들이 어떻게 구성되고 조직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그룹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알아야 한다.
고참 교인들을 이끄는 것은 그들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전통에 대한 존경이다. 새신자를 이끄는 것은 그들의 필요에 대한 존중과 그들이 교회에 온 이유에 대한 이해다. 전문가들을 이끄는 것은 음악, 선교, 사회활동, 탁아, 스포츠 등 그들의 특별한 관심 분야에 대한 이해와 관계다. 비활동적인 교인을 이끄는 것은 연결되었다는 느낌없이 소속감만 가지려는 그들의 바람에 대한 이해다. 설립자들을 이끄는 것은 그들의 첫 비전에 대한 경청과 그 비전을 현재와 미래의 목표로 전환하려는 노력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그룹들은 교회라는 사회적, 영적 구조를 이루는 복잡하고 중복되는 관계의 거미줄을 통해 교회에 연결된다. 교회 내의 관계 지도를 이해하고 사용하지 못하는 리더는 지도 없이 낯선 도시에서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여행자와 같다.
관계가 현대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교회가 전통적인 정치 구조에서 벗어나 사역팀으로 옮겨가고 있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전통적인 구조에서는 교단이 교회를 감독하며, 교회가 당회를, 당회가 위원회를, 위원회가 자원 봉사자를 감독한다. 많은 면에서 이것은 신뢰가 결핍된 체제이며, 모두가 감시되고, 감독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한 체계다. 감독을 받는 사람들이 감독하는 사람보다 사역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많은 새로운 교회가 사역팀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이들은 교회 전체의 규범과 구조에 맞추어 스스로 결정을 내리며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해 나간다. 이들이 조직된 것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팀원들은 공통의 목표를 중심으로 친구가 되며, 일과 관계의 융합은 기력을 소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이들이 교회에 연결되어 있는 것은 감독을 위해서가 아니라 힘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리더십의 은사가 사용되는 목적이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하는 에베소서 4장 12절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자원봉사자의 모집과 유지
리더들은 모집자일 때가 많다. 자원 봉사자를 모집하고 유지하기 위한 관계적 규범을 이해하고 따를 때, 교회와 그 밖의 단체에서 리더십 효과는 배가된다. 다음은 리더가 알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관계규범이다.
규범1)사람들에게서 시작하라.
대부분의 새로운 자원봉사자들은 조직이나 일에 크게 헌신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와 필요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원 봉사자를 모집하는 많은 사람은 자신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말이 있다. “아마추어는 ‘제가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반면 전문가는 ‘제 청중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다.”
상대방에게서 시작한다는 것은 항상 말하기 전에 듣고, 당신이 필요한 것을 말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찾아내는 것을 뜻한다. 최고의 리더는 이러한 관심을 숨길 필요가 없다.
규범2)요청하라.
사람들이 봉사에 참여하는 첫 번째 이유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청을 할때 어떻게 동기부여를 할 것인가? 감사와 만족이다. 그들의 봉사로 인해 감사하게 될 사람들과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일을 상기시키라. 그로인한 만족감을 제시하라.
규범3)높은 기대와 강력한 지원을 결합하라.
기대를 적게 받는 자원봉사자는 최소한의 기여를 하고 곧 그만둔다. 많은 것을 기대하면 그 댓가로 많은 것을 받는다. 그러나 높은 기대만으로는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누구도 실패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고의 단체들은 높은 기대에 맞는 강한 지원과 힘을 실어준다. 자원 봉사자가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데 동의하고 그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을 때, 그는 자신을 모집한 리더, 단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게 된다.
규범4)자원봉사자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들은 금전적 보상은 없으나 매우 실제적인 보상을 받는다. 현장 훈련, 도전적 기회, 만족스런 경험 등이다. 이것은 거의 모든 자원 봉사자의 인터뷰와 신문기사에서 볼 수 있다. “제가 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라는 자원봉사자의 말을 자주 보지 않았는가?
자원봉사자는 자신이 받는 만족이 자신이 한 봉사나 기부금보다 더 크다는 것을 항상 느껴야 한다.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도 그들의 봉사자들이 보상을 얼마나 받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강한 충성심을 보여주며 중요한 기여를 하는 당회나 이사회를 가진 교회는 그들에게 대가를 잘 지불하고 있을 것이다. 당회원이나 이사,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자주 바뀌고 회의가 무산되고, 임명이 거절되고 있다면 구성원들이 대가를 적게 받거나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해 전에 우드데일 교회 장로회 회장이 모든 회원과 그 직계 가족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나눠 준 적이 있었다. 그는 장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사람의 눈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매일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 당신의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나머지 사람들도 서로 같은 약속을 하도록 요구했다. 한 사람씩, 우리는 장로와 그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매일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장로회는 놀라운 유대감과 높은 출석률과 오랜 헌신과 하나되는 마음의 효율성을 경험하였다. 다른 어디에서 이런 약속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다른 어디서 이런 수준의 개인적 지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다른 어디서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정말 제대로 대가를 받았다.
10장 스트레스, 우리를 짓누르는 무게
많은 리더들이 책임감과 많은 업무량, 빈곤한 재정과 여러 개인적인 문제들로 압박감에 시달린다. 스트레스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신 우리는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는 있다.
리더의 스트레스 관리의 열쇠는 개인적인 책임을 갖는 것이다.
이 말은 리더가 자신의 모든 스트레스에 책임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그 스트레스에 대해 취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 반응-환경을 바꿔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쪽을 택하라, 맞서 싸워라, 사임하라, 긍정적 결과를 얻기 위해 상황을 활용하라-은 리더의 결정이다.
당신은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자원봉사자와 스탭으로 구성된 팀을 만들어 훈련시켜 당신의 계획을 이루게 하라. 그들의 성공을 즐겨라. 그들이 당신이 직접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스케줄을 관리하라. 당신이 자신을 다른 사람의 스케줄에 맞추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스케줄에 맞추게 한다고 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개인적 스케줄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리더의 생활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통제될 때 그 리더는 무능하고, 존경받지 못하며, 아마도 소진될 것이다.
쉬는 시간을 가져라. 과도하게 일하면서 쉬는 시간 갖기를 거부하는 리더는 순교자가 아니라 바보다. 하나님께서도 하루를 쉬셨다.
피로는 나쁜 결정, 사람들 사이의 갈등, 울분, 심지어 죽음으로 이어진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결정하라. 그리고 이것들을 우선 순위라고 불러라. 경계를 가지라. 가치관이라고 불러라. 전략이라고 불러라.
11장 희망, 우리의 전진을 가능케 하는 것
희망은 목회와 교회 리더십에서 중요한 문제다.
리더의 근시안만큼 희망을 무너뜨리고 사역을 왜곡시키는 것은 없다. 항상 한 구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전체를 보라. 힘겨운 리더십의 전투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잃고 염세적이 되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 쉽다.
그럴 때는 오늘날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희망의 상징들
*1900년에 한국에는 개신 교회가 하나도 없었으나 지금은
서울에만 교회가 7,000개가 넘는다.
*1980년 이후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란의 모슬렘들이 그 이전 1,000년 동안보다 많다. 최근에는 심한 박해에도 그 수는 15,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중국에서는 매일 28,000명이 신자가 된다. 지금 중국에는 6천만명 이상의 신자들이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20,000명이 신자가 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너무 높아 정부가 통계를 발표하지 않는다. 1979년 공식 발표에 따르면 200만 명이 넘는 모슬렘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70년에 걸친 소련 정부의 박해가 지나간 지금, 그리스도인의 수는 약 1억에 이른다. 이것은 절정기의 공산당원의 수보다 다섯 배가 더 많은 것이다.
*파파뉴기니 정부는 모든 학교에서 성경교육을 의무화시켰다.
*평신도 사역이 성장하고 있다.
*남성들이 교회로 돌아오고 있다. 현재는 남성만으로 이뤄진 교회도 있다.
*20대 젊은이들이 교회로 오고 있다. 미국 전형적인 주말예배에서 70~79세인 참석자 100명에 대해 20~29세 참석자는 160~220명이다.
절망에 빠지고 희망이 꺼져 갈때면 나는 나보다 훨씬 더 크고 내가 한 부분인 하나님 나라를 되새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해 있으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의 작은 모퉁이가 아니라 온 세계에 퍼지는 하나님 나라를 볼 때, 엄청난 용기와 희망이 솟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희망은 환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 구약 역사 전체에서 히브리인들은 문제가 아니라 성공을 기억하라는 훈계를 정기적으로 받았다. 이들은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강을 건넜을 때, 기적을 체험했을 때, 잊지 않기 위해 돌무더기를 쌓았다. 이들이 투덜거리고 불평할 때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출애굽과 이들이 받은 복을 상기시켜 주셨다. 이들은 추수때마다 장막절을 지키며 유월절마다 애굽의 기적과 해방의 사건을 재연한다.
우리는 모든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의 축복과 우리의 성공이라는 배경에서 봐야 한다. 비록 불평이 좌절의 절망에서 일시적으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준다고 하지만 그것은 마침내 스스로에게 독이 된다. 모든 리더에게 내가 주는 조언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두신 곳에서 이루어지길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그 일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리더십이라면 당신에게은사가 있든 없든 간에 리더의 역할을 하라. 그것이 환상이라면 당신이 환상가가 아니더라고 환상을 주라. 그것이 전도라면, 당신에게 전도의 은사가 없더라도 전도를 하라.
12장 행동, 리더가 취할 수 있는 것
스탠포드 경영 대학원 졸업식 축사 중 연사가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떻게 비즈니스 학교가 아직 생기지도 않은 조직들을 운영할 리더들을 준비시킵니까?”
20세기 중반의 신학교들이 지금은 거대교회라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현상을 위해 리더들을 어떻게 훈련시킬 수 있었는가?
대답은 정말 간단하다.
학생들에게 평생 배우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라. 많은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한 가지 방식을 배운 후에 마치 자신의 삶이 그 일을 항상 같은 방식으로 하는데 달려있기라도 하듯이 그 방법을 고집하며 싸운다. 역사는 비즈니스, 교회, 직업, 기술로, 그리고 계속해서 배우고 변화하길 거부하는 사람들로 뒤덮여 있다.
평생 배운다는 것은 정말 마음의 문제다.
스스로가 어떻게 배우는 사람인지 파악하라. 독서, 영화감상, 듣기, 말하기, 공적인 교실 수업참여 등 당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배우기에 참여하라.
질문을 하라. 귀기울여 들어라. 다른 단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책을 읽어라. 잡지를 읽어라. 실수를 연구하라. 당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어보라. 기도하라. 진지한 관심을 가지라.
당신의 멘토를 선택하라. 얼라이드 스트래터지의 최고 경영자 래리 보시디는 “마지막에 전략이 아니라 사람에게 배팅하라”고 말한다.
여러 명의 멘토를 갖는 것을 필수적이다. 한 사람의 멘토가 지나치게 당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위험하다.
당신의 칩을 쌓아라.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포커게임에 참여하는 것과도 같다. 포커게임에는 각자가 제한된 수의 칩을 가지고 시작하며 이기기 위해서는 칩을 전략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목회자는 상과 벌에 대한 칩을 쌓아두어야 한다.
한 친구가 젊은 사람들은 미래를 많이 말하는 반면에 나이든 사람들은 과거를 많이 말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장 많이 가진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다.
리더는 언제나 자신이 성취할 수 없는 꿈과 자신의 재임 기간을 훨씬 넘어 지속될 비전을 가져야 한다. 이럴 때 단체는 리더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다. 이럴 때 리더 자신보다 사명이 더 중요하다. 이럴 때 다른 리더가 오더라도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럴 때 역사만이 아니라 희망이 있다. 비극은 인생에서 가장 큰 리더십의 기회를 제공한다. 비극이 위협할 때 리더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
리더에게 중요한 것은 또한 언제 그만 둘지를 아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 그만둘지 아는 데는 어떤 공식도 없다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리더들은 질병, 정년, 그밖의 외적인 요인들이 닥치지 않는 한 결정하는 데 애를 먹는다. 당신은 마무리를 잘 하기 바란다. 마지막에 예수께서 당신에게 칭찬하시는 그런 리더가 되도록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