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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李泰俊, 1883~1921)은 몽골에서 혁명운동에 참여한 인물로서 한국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대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이태준은 몽골국왕(Bogd Khan)으로부터 제1급 관리등급의 국가훈장인 ‘에르데니-인 오치르’(‘금강석’이란 뜻)를 수여받은 인물로 오늘날 한·몽 친선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태준은 또한 1921년 2월초 몽골을 침범하여 살육과 노략질로 공포와 광란의 폭압정치를 실시한 러시아 백위파 대장 운게른 스테른베르그(Roman von Ungern-Sternberg, 1885~1921) 부대에게 학살당한 비운의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러시아 역사학자인 쿠즈민(S.L. Kyz'min)의 『Baron Ungern v Dokumentakh i Memuarakh(Baron Ungern inDocuments and Memoirs)』(모스크바, 2004)에는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 부대가 고륜(庫倫, 몽골어로는 Hüree. 러시아인들은 Urga라고 불렀고, 혁명이후 ‘붉은 영웅의 도시’라는 뜻의 Ulaan Bataar로 개칭됨)을 점령한 직후, 이태준을 처형하게 되는 최후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록한 마케예프(A.S. Makeev)의 회상록이 수록되어 있다. 마케예프는 ‘아시아 기마사단(Asian Cavalry Division)’으로 불렸던 부대의 사령관 즉, 운게른의 부관을 지낸 인물이다.
이태준의 자(字)는 원일(元一)이고, 호는 대암(大岩)이다. 몽골정부의 공식문서에는 “고려국 국적민 의사 리다인”으로 나오는데 ‘다인’은 이태준의 호인 ‘대암’을 몽골어로 표기한 것이다. 당시 이태준이 본명 대신에 호인 ‘대암’을 사용했고, 몽골에서도 그렇게 통용되었다.
이태준은 1883년 11월 21일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이태준은 2형제의 장남으로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태준의 부인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사망하여 두 딸은 그의 동생인 이태식이 맡아 길렀다. 이태준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한성(서울)으로 올라오기 전에는 생가 근처 산 너머에 위치한 기독교 교회에 다녔던 것으로 보이며, 기독교 선교사를 통하여 의료선교사가 설립했던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태준은 24세인 1907년 10월 1일에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하였고, 약 3년 9개월만인 1911년 6월 21일에 졸업하였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이태준은 세브란스의학교 재학시절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의 권유로 비밀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담하였다. 안창호는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직후 이갑, 이종호, 김구, 김명제, 임치정 등 서북인사들과 함께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1910년 2월 20일경에 석방된 후 세브란스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때 안창호가 최남선에게 이태준을 추천하여 신민회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한말 애국계몽운동단체들 가운데 공화주의적 정치 이념을 취하고 있던 인사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였고, 그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 역시 진취적인 젊은 청년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세브란스의학교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하여 기독교와 서구적 사상을 접하게 된 이태준이 청년학우회에 참여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10년 8월 일본에 국권을 상실한 후 애국지사들은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다. 그리하여 많은 애국 청년들이 중국을 망명지로 선택하였다. 이들은 오랜 순치관계(脣齒關係)에 있는 중국의 혁명운동에 희생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중국혁명세력들로부터 후일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과 협조를 얻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태준과 함께 몽골로 가게 되는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이나, 1921년 가을 몽골을 방문하여 이태준의 묘를 찾게 되는 여운형(呂運亨, 1885~1947) 역시 신해혁명의 영향으로 중국을 망명지로 선택하였다. 망국의 아픔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던 한국청년들에게 중국의 신해혁명(1911)은 큰 자극을 주었으며, 특히 중국혁명의 영도자로 알려진 손중산(손문, 1866~1925)은 한국청년들의 동경하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애국지사들, 특히 의병운동 참가자들은 국경지대인 만주나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망명하였는데, 신해혁명 이후에는 상해, 남경, 광동 등 중국 관내지역으로 망명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태준은 중국의 남경에서 미국의 안창호에게 보낸 1912년 7월 16일자 편지에서 중국 망명을 결심하게 된 배경을 밝히고 있다. 이태준은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나, 날로 심화되는 일제의 침략과 탄압에 분개하던 차에 1911년 10월 10일 무창(武昌)봉기를 시작으로 전개된 중국의 신해혁명에 크게 감동받았다고 했다.
이태준이 망명을 단행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 총독부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배일적(排日的)인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 때문이었다. ‘105인 사건’은 1910년 11월 일본 총독 테라우찌(寺內正毅) 암살음모사건 관련자 체포로 시작된 검거 선풍 이후 1912월 3월경까지 고문취조가 지속되었고, 1912년 6월 공판이 시작되어 10월 중순에 제1심 판결이 내려졌다.
이태준은 친구이자 선생이기도 한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 김필순(金弼淳, 1878~1919)과 함께 중국망명을 결심하였다. 당초 김필순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위기에 처해 있어서 먼저 국내를 탈출하고, 이태준은 좀 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 후에 결행하기로 하였다.
이태준에 앞서 김필순 역시 미국의 안창호에게 1912년 3월 8일자 편지를 보냈다. 김필순은 1911년 10월 발생한 중국의 신해혁명에 크게 감동하고 이 혁명운동에 위생대(衛生隊)로 참여하기 위하여 중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마침내 1911년 12월 31일, 김필순이 먼저 신의주의 세브란스분원에 출장 간다고 하고 경의선 열차에 올랐는데, 김필순의 망명에는 여동생인 김순애(金淳愛)가 동행하였다. 김순애는 후일 이태준과 몽골로 동행했던 김규식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김필순을 배웅하고 병원으로 돌아온 이태준은 뜻밖에도 자신과 김필순이 중국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병원 내에 퍼져 있는 사실을 알고 황급히 평양행 열차를 타고 부랴부랴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국내탈출에 성공한 이태준은 중국 남경(南京)으로 향했다. 이태준은 남경에서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에서 국내탈출 후 중국 남경에서의 근황과 심경을 비교적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태준은 남경으로 왔지만 여비가 끊어진데다가 언어장벽 때문에 “적막(寂寞)한 정형(情形)을 많이 지냈다”고 적었다. 그러다가 이태준은 가까스로 중국인 기독교도의 도움으로 기독회의원(基督會醫院) 의사로 취직하게 된다. 이태준은 기독회의원에서 “의원(醫員)의 직임(職任)을 착득(着得)하였사오나 5, 6삭 동안은 아주 자미 없이” 지냈다고 썼다.
편지를 쓸 무렵인 1912년 중반, 이태준은 중국의 혁명정당 인물들과 관계를 갖기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여섯 명의 한인유학생들도 만났다. 유학생들 가운데 김규극(金奎極), 권탁(權鐸), 홍윤명(洪允明) 등 세 명은 학생군(學生軍)에 가담하여 국민당의 북벌에도 참전하였고, 북벌 후에는 육군학당에 입학하여 각종 무예(武藝)를 연습하고 있었다. 당시 이태준은 김필순과의 연락을 간절히 원하여 안창호에게 연락처를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몽골로 간 이태준이 그 후 북만주의 치치하르(Chichihar)에 있던 김필순과 연락을 확보하거나 만났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현재로서 이를 확인할 수 없다. 이 무렵 이태준은 서간도의 한인자치단체 부민단(扶民團)이 설립한 군관양성학교인 신흥학교 졸업생들로 조직된 신흥교우단에 후원금(5角)을 보냈다.
1911년 12월 1일 몽골은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붕괴되자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몽골정부는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승인받지 못하고 1915년에 카흐타(Khiakhta)에서 러시아, 중국, 몽골 간에 체결된 삼국협정(三國協定)에서 자치를 승인받는데 머물렀다.
이태준은 1914년 무렵 남경을 떠나 몽골의 고륜으로 갔다. 이태준이 몽골로 가게 된 계기는 김규식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김필순이 김규식의 오랜 친구였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태준과 김규식은 국내에서부터 이미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내를 탈출한 김규식이 중국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13년 4월 중순경이었다. 김규식이 1913년 8월 12일자로 미국에 있던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규식은 자신이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8월 27일경 몽골로 갈 계획임을 알리고 있다.
김규식이 몽골에서 수행할 임무라 한 것은 몽골지방에 비밀군관학교 설립 계획을 말한다. 김규식과 이태준의 몽골 행에는 후일 비행사가 되는 서왈보(徐曰甫)라는 애국청년이 동행했다. 김규식, 이태준, 서왈보의 계획은 한국의 지하조직에서 약속한 자금이 도착하지 않아 포기하여야 했다. 결국 1914년 가을 김규식은 서양인 상사들에게 피혁을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고, 이태준은 고륜에 동의의국(同義醫局)1)이라는 병원을 개업했다.
김규식은 1918년 5월경 앤더슨 마이어(AndersonMyer) 회사의 지점 개설을 위해 고륜으로 오게 되는데, 이태준은 김규식을 따라 온 그의 사촌여동생 김은식(金恩植)과 결혼하게 된다. 라마교의 영향이 커서 병에 걸리면 기도나 드리고 주문이나 외우고 미신적인 치료법만을 알고 있던 몽골인들에게 근대적 의술을 펼친 이태준의 성가는 매우 높았다. 이태준은 몽골왕궁에 출입하게 되었고 몽골 활불(活佛), 즉 보그드 칸(Bogd Khan)의 어의(御醫)가 되는 등 몽골왕족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태준이 피살된 지 9개월 후인 1921년 11월 고륜을 방문했던 여운형은 『중앙』에 기고한「몽고사막여행기」(1936년 5월)에서, 몽골인들의 7, 8할이 감염되었던 화류병(花柳病)의 절멸에 지대한 공헌을 함으로써, ‘까우리(高麗)의사’ 이태준은 고륜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몽골인들의 이태준에 대한 존경심은 ‘신인(神人)’이나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을 대하듯 했다고 한다. 한편, 이태준은 당시 몽골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 사령관 세 명 가운데 하나인 가오 시린(Gao Silin)의 주치의로도 활약했다.
1919년 7월 몽골국왕인 보그드 칸(Bogd Khan)은 이태준에게 국가훈장을 수여하였다. 이 국가훈장은 ‘귀중한 금강석’이란 뜻을 가진 ‘에르데니-인 오치르’라는 명칭의 훈장으로써 제1등급에 해당하는 훈장이었다.
이는 몽골정부가 근대의술을 몽골인들에게 널리 베푼 이태준의 “박시제중(博施濟衆)한 위공(偉功)”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이태준이 훈장을 받은 사실은 이태준이 상해에 머물고 있던 당시 1919년 11월 11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보도됨으로써 한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근대적 의술을 베풀면서 몽골사회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은 이태준은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주요한 비밀 항일활동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특히, 장가구(張家口)에 십전의원(十全醫院)을 개업한 김현국(金賢國, 1916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과 긴밀히 연락을 하면서 장가구와 고륜 사이를 오가는 애국지사들에게 숙식과 교통을 비롯한 온갖 편의를 제공하였다. 또한 이태준은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도 2천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19년 9월 23일자 『독립신문』에는 “感荷義捐 ... 李大岩 銀十元”이라고 보도하여 이태준이 은(銀) 10원을 의연한데 대해 감사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이씨 족보에는 이태준이 상해임시정부의 군의관(軍醫官) 감무(監務)로 활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태준의 활동 가운데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한인사회당이 소비에트정부로부터 확보한 이른바 코민테른 자금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운송에 깊숙이 관여한 일이다. 이태준은 당시 한인사회당 연락을 담당한 비밀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모스크바자금의 운송에 참여했다. 1920년 여름 모스크바의 레닌정부는 상해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을 지원 약속했고, 이 가운데 1차로 40만 루블의 금괴가 한인사회당 코민테른 파견대표 박진순(朴鎭順)과 상해임정특사 한형권(韓馨權)에게 지급되었다. 박진순과 한형권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이용해 밤낮으로 금괴상자 위에서 교대로 자면서 베르흐네 우진스크(Verkhne-Udinsk, 현재의 Ulan Ude)까지 금괴를 무사히 운송하였다. 40만 루블의 금괴를 모두 잃어버리지 않도록 두 경로로 나누어 운반하였다. 6만 루블은 모스크바로 귀환하는 한형권에게 외교활동자금으로 줬고, 나머지 34만 루블 가운데 김립이 12만 루블을 몽골을 통해서, 그리고 박진순이 나머지 22만 루블을 만주리를 통해서 상해로 운반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고륜에서 북경까지의 험난한 코스의 운송은 이태준과 조응순(趙應順) 등 한인사회당의 비밀연락원들이 책임졌다. 김립이 책임진 12만 루블이 고륜에 도착하자, 당시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의 몽골침입에 따른 혼란상황에 대비하여 이를 다시 나누어 운송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김립이 8만 루블, 이태준이 4만 루블의 금괴를 나누어 차례로 북경으로 운송하기로 했다. 우선적으로 1차분 8만 루블은 김립이 이태준의 도움을 받아 고륜, 장가구, 북경을 거쳐 1920년 초겨울 상해로 성공적으로 운반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2차분 4만 루블은 이태준이 후일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일당에게 잡혀 피살되면서 분실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이태준은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그 비밀활동을 지원하였다. 모스크바 자금 가운데 김립이 책임졌던 12만 루블의 1차분 8만 루블의 운송을 성공적으로 마친 직후 북경에서 이태준은 의열단 단장인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당시 의열단 단원들이 사용한 폭탄은 질이 좋지 않아 불발되거나 단원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등 손실이 컸기 때문에 의열단은 우수한 폭탄제조자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이태준은 우수한 폭탄제조기술자인 ‘마쟈르’를 의열단에 소개하기로 하고 고륜으로 돌아갔다.
이태준이 몽골 고륜으로 돌아갈 때 장가구까지 이극로(李克魯, 1893~1978)가 동행하였다. 이극로는 당시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하기 위하여 몽골사막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이태준과 이극로는 1920년 10월 북경을 떠나 장가구까지 갔다. 그러나 “백당의 난리로 고륜으로 가는 자동차길이 막혀 여러 날을 기다리다가 안정될 희망”이 없어 이극로는 북경으로 되돌아오고, 이태준은 며칠을 기다려 고륜으로 들어갔다가 참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극로가 말한 “백당의 난리”는 바로 1920년 10월 운게른 부대가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고륜을 공략한 사실을 말한다.
마쟈르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가 된 헝가리인으로 이태준의 자동차 운전수로 고륜에 머물고 있었다. 마쟈르는 이태준을 도와 장가구-고륜 간을 왕래하던 애국지사들의 편의를 제공했다. 1920년 가을 상해의 한인공산당에서 모스크바로 파견된 김립과 계봉우 역시 장가구에서 고륜에 이르는 여행에서 마쟈르가 운전한 차량을 이용하였다.
소설가 박태원(朴泰遠)은 『약산과 의열단』에서 고륜으로 돌아간 이태준이 끝내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 부대에 잡혀 피살된 후 마쟈르가 홀로 북경으로 와서 김원봉을 찾게 되는 감동적인 과정을 매우 극적인 필치로 서술하여 놓았다. 마침내 마쟈르가 질이 우수한 각종 폭탄을 성공적으로 제조하게 됨으로써 의열단은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에 착수하게 된다. 마쟈르는 의열단의 폭탄운반에도 참여하였으며, 그의 도움으로 제조된 폭탄들은 황옥경부(黃鈺警部) 사건, 김시현(金始顯) 사건을 비롯한 의열단의 파괴공작에 활용되었다.
이태준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 것은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 군대가 고륜을 점령한 2월 이후의 어느 때이다.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미친 남작(Mad Baron)’ 운게른은 세묘노프(Grigorii Semyonov, 1890~1946) 휘하의 지휘관이었으나, 1920년 10월 치타(Chita)가 러시아혁명군에 의하여 함락되고 세묘노프가 만주로 도피하자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1920년 10월 26일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고륜 점령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운게른 부대는 대포 3문, 기관총 50정을 소지한 약 3천명의 군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1천명은 몽골인이었다. 운게른은 철저한 반볼쉐비키적인 반유태주의자이자 열렬한 군주제 옹호론자이며, 대륙의 제 민족들로 구성되는 중앙제국(Central Empire)을 꿈꾸던 자로 매우 잔혹한 인물이었다.
운게른의 고륜 공략은 보그드 칸이 이끄는 몽골정부의 호응을 받았다. 당시 몽골인들은 중국의 몽골자치 취소와 청대(淸代) 책봉체제로의 회귀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즉, 중국은 1919년 10월 이후 1915년 캬흐타에서의 삼국협정에서 러시아와 합의한 몽골의 자치를 취소하였다. 1919년 10월 29일에는 서수정(徐樹錚, Xu Shuzeng)이 3개 보병사단을 이끌고 고륜을 점령하였고, 1920년 1월에는 몽골자치 철회 의식인 ‘책봉활불전례(冊封活佛典禮)’를 거행하여 몽골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마침내 운게른 부대는 몽골국왕 보고드 칸과 봉건귀족들의 협력을 받아 1921년 2월 3일 고륜을 점령하고 있던 중국군벌을 분쇄하였다. 중국군대는 2월 3일 아침 고륜이 함락되자 퇴각을 시작하였다. 운게른 군대는 2월 4일 중국군이 철수한 고륜을 완전 점령하였다. 고륜을 점령한 운게른 군대는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러시아인, 부리야트인을 강제로 병졸로 편입시켰다. 뿐만 아니라 운게른 군대는 대대적인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운게른 군대의 고륜공격에는 일본인 의용병 43명과 조선인 7명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만주 봉천(奉天)에서 모집된 49명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는데, 1920년 7, 8월경 세묘노프군대에 들어가 원동공화국(Far Eastern Republic)의 수도 베르흐네우진스크 공략에 참여한 바 있었다. 이들은 세묘노프가 만주로 도피한 후 운게른군에 가담하여 고륜공략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들 일본인들은 운게른 군대의 중국은행 약탈에도 참가하였다. 이태준의 병원 역시 백위파 군대에 의하여 약탈당했다.
운게른 군대에 소속된 일본인과 한인은 고륜 점령 시 사망자가 발생하여 3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들 일본인들은 무뢰배로서 무절제하였는데, 운게른은 이들을 우대하여 자신은 중국가옥에 거주하고 이들에게는 구(舊) 러시아관사를 제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일본인들은 약탈을 자행하여 중국 상인들의 반감이 매우 심하였다.
현재까지 이태준의 비극적 최후와 관련한 기록은 이태준이 피살된 지 8개월 후인 1921년 10월 16일 이동휘와 박진순이 소비에트정부의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나타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운게른 부대가 우르가(고륜)를 점령할 때 이태준은 기적적으로 자기 집에 두었던 금괴를 운게른 정권의 가택수색으로부터 보호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북경의 새로운 정권이 발행한 비자(통행권)을 서둘러 얻은 후, 이태준은 상해로 떠났지만, 불행히도 도중에 우르가로부터 시달된 명령에 따라 억류되어 우르가로 송치되어 운게른 도당에게 총살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동휘와 박진순의 보고서에 기록된 이태준의 최후는 이태준의 부인 김은식이 미국인 친지로부터 받은 편지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중국군대가 고륜을 철수하고 운게른 부대가 고륜을 점령한 직후 이태준을 만난 것으로 짐작되는 러시아인 보리스 볼코프(Boris Volkov)에 의하면, 운게른(Ungern)이 우르가를 점령한 후 중국군 사령관 가오 시린의 주치의였던 한인 의사 리(Li)가 그의 붕대 감은 손을 보여주며, “자기가 우르가를 떠나기를 거부하는데 격분한 가오 시린이 그의 손을 쳤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태준은 무슨 이유로 보다 안전할 수 있는 가오 시린의 동행요구를 거부하면서까지 고륜에 남기로 한 것일까? 이태준은 분명 앞에서 언급한 바, 자기에게 부과된 두 가지 혁명임무, 즉 모스크바 자금 4만 루블의 운송 책임, 그리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마쟈르를 소개하기로 한 약속을 완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륜으로 압송된 이태준은 운게른 군대의 고륜 위수사령관 시파일로프(Sipailov)의 특별감시 대상으로 가택연금에 처해지게 된다. 이태준은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히 협력했다는 혐의로 유죄가 인정된 상태였다.
‘아시아 기마사단(Asian Cavalry Division)’으로 불렸던 부대의 사령관 즉, 운게른의 부관을 지낸 마케예프(A.S.Makeev)의 회상록에 따르면, 이태준은 운게른의 부하들에 의하여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운게른의 살인조(사형집행조)에 의하여 잔인하게 처형(교살)되었다고 한다. 이태준의 집에는 11개월 된 딸아이가 있었는데 이미 사망하여 관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그 집에서 일하던 러시아 여자 하인들 역시 운게른의 부하들에 의해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한편 상해파 고려공산당 중앙집행위 재무담당인 김철수가 소비에트정부에 제출한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의 재정보고에서 이태준의 부인 김은식에게 1921년 6월 9일 위로금 500루블을 지급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태준의 부인 김은식은 운게른 군대의 침공 당시 고륜에 있지 않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운게른 부대에 소속되었던 백위파 장교 토르노프스키(M.G. Tornovkski) 역시 이태준이 볼쉐비키들과 관련된 혐의로 처형되었지만 어떤 근거였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는 이태준이 고륜의 볼쉐비키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들었으며, 단지 이들과 다정하게 지냈을 뿐이라고 회상했다. 아울러 토르노프스키는 이태준이 부자(富者)였기 때문에 살해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운게른 부대가 이태준의 재산을 탈취하고자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다. 결국 몽골인들에게 근대의술을 베풀며 존경받던 이태준은 자신의 애국적 항일활동 특히 모스크바자금의 운송 등 친볼쉐비키적 활동으로 인하여 이국땅 몽골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에 불과했다.
이태준이 운게른 군대에 의해서 피살된 이유는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히 협력했다는 혐의였다. 이태준이 한인사회당의 비밀연락원으로서 40만 루블의 운송에 관여했던 사실이 누설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운게른 군대에 참여했던 백위파 장교들의 회상록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운게른 군대 위수사령관인 시파일로프에게 이태준이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히 협력했다는 정보를 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아 있다.
앞에서 인용한 「이동휘·박진순 보고서」에도 이 의문이 해명되어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앞에서 인용했던 보리스 볼코프는 운게른 군대 내의 일본군장교 24명이 이태준을 체포하여 처형케 한 장본인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운게른 군대의 고륜 공격에 참가했던 일본인, 한인 의용병 50명 가운데 생존해 있던 자들이다. 이들은 1920년 7, 8월 봉천(奉天)에서 모집된 37명의 일본인 자원병(傭兵)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은 세묘노프군대에 들어가 원동공화국(Far Eastern Republic) 수도 베르흐네우진스크 공략에 참여하였고, 세묘노프군대가 자바이칼의 치타에서 철수하여 만주로 도피한 후 운게른군에 가담하여 고륜 공략에 참여한 자들이다.
이태준의 짧고 극적인 일대기는 일제시기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것 같다. 여운형은 1921년 가을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러시아로 가던 중 고륜에 체류하게 되었다. 이 때 몽골인들이 성산(聖山)으로 부르던 고륜의 남산(南山) 건너편 구릉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던 이태준의 묘를 찾았다. 여운형은 앞서 소개한 「몽고사막 여행기」에서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야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라고 이태준을 애도했다. 여운형의 여행기는 이태준의 묘가 있었던 사실과 그 위치를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또한, 해방 후 귀국한 김규식, 조소앙도 이태준에 관한 회상을 남겼다. 1949년 7월 5일 김규식은 자기 집을 방문한 이태준의 문중 친척인 이인섭(李仁燮)에게 이태준의 이야기를 전하였다. 함안 조씨인 조소앙 역시 함안 군북면을 찾아와 마을사람들 앞에서 이태준에 관한 얘기를 전했다고 한다.
이태준의 묘는 현재 몽골 여행객들의 단골 코스인 자이승전망대, 즉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물이 있는 구릉의 서북쪽 경사지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자이승전망대로 올라가는 도로건설 과정에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운형의 여행기에서 “간소한 [이태준의] 묘지”가 위치했던 “벌거벗은 산비탈을 빈약한 왜림(倭林)이 이곳저곳을 덮고 있는 경사지의 한복판”이라고 묘사한 그곳이다. 몽골정부는 이태준의 묘를 찾기 위해 정부기록보존소를 뒤지고, TV광고 등을 대대적을 전개하였으나 아직까지 묘를 찾지 못하였다.
여운형이 몽골을 방문했던 시기는 운게른의 러시아백위군이 러시아적군과 몽골혁명군의 연합군에 의하여 붕괴되고(운게른은 러시아적위파에 의하여 1921년 8월 15일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이미 몽골인민혁명정권이 수립되어 있을 때이다. 따라서 여운형이 이태준의 묘지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이태준의 피살 직후 또는 운게른 군대의 퇴각 후 이태준을 존경해마지 않던 몽골주민 또는 몽골혁명정권이 이태준의 시신을 수습하여 묘지를 단장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태준의 묘가 자리한 곳은 바로 자이승 전망대가 위치한 구릉의 서북 경사지 일대로서 이곳은 바로 과거 몽골 왕족과 귀족(라마승려)들의 묘지 터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2001년 7월 이태준 기념공원의 준공이 거행되었다. 기념공원 역시 바로 자이승 전망대가 위치한 구릉에서 울란바토르 시내방향의 왼쪽 평지에 위치해 있다. 또한, 이 지점은 자이승 전망대와 몽골국왕 보그드 칸의 고궁 사이의 요지에 위치해 있다. 이태준 기념공원은 연세대 의대 의사학과와 몽골연세친선병원, 그리고 한국주재 몽골대사관의 끈질긴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우선 기념공원의 조성을 위해 몽골정부가 부지 2천 2백 평을 제공하였고, 연세대 의대동창회가 비용을 조달하였다. 2010년에는 몽골대사관(대사 정일)의 주도로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몽골정부, 현지 한인회, 한국대사관측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이태준 기념공원 보존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곳은 몽골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의 단골코스가 되었다. 이를 통해 조국광복을 위해 항일운동의 최전선에 활동하였던 이태준이 한․몽친선의 상징적 인물로서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고난에 찬 노력이 아시아 깊숙한 내륙지방 몽골까지 미쳤으며, 아시아대륙에서의 역동적인 역사적 격류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 추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과거의 독립운동이 단순한 일본에 대한 항일운동의 차원에서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는 보편적 인간 사랑을 실천하고 국제친선에 성공했던 국제화의 선구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