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부록
임 춘 희
하늘이 파랗다. 또글또글 한 햇살과 함께 가을바람이 볼을 스치며 지나간다. 오래전 마음의 창고에다 깊숙하게 묻어 두었던 내 기억이 곰팡이라도 필까 염려스러운 듯 초가을 바람에 일렁인다. 아예 바람과 함께 멀리 날아가 버리면 좋을 텐데 가을만 되면 싸한 느낌으로 되살아난다. 이제 와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내 마음을 데리고 갈 작정인지.
모두가 잠들어 버린 시간, 공중전화부스가 있는 곳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헉헉거리는 숨을 가다듬고 메모지를 폈다. 급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써진 전화번호를 차례대로 눌렀다. 몇 번의 신호가 가더니 잠에 취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늦게 죄송합니다만 K스님 좀 바꿔주세요.”
한 참 후에 전파를 타고 온 건 오래전 듣던 목소리였다. 반가움에 고르지 못한 음성으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어느새 눈앞은 뿌연 안개가 낀 듯했다. 아이는 몇이나 두었느냐고 오빠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선뜻 답을 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아들만 둘이라고 했다.
이십 대 초반 무렵 동생들과 그 오빠 집에서 자취하게 되었다. 친오빠와 친구 사이니까 당연히 오빠라고 불렀다. 동생들 뒷바라지 해 주며 착실하게 산다고 나를 보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눈빛은 남달랐다. 그 사람 역시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에 나는 싫지가 않았다. 오랫동안 그 집에 살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정이 들었다. 하지만 결혼 같은 건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는데, 그의 자매들은 당연한 절차인 듯했다.
마당에는 큰 무화과나무가 있었고, 그 밑에는 항상 평상이 놓여있었다. 여름이 되면 오빠는 평상에 걸터앉아 기타를 쳤다.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 부끄러움에 얼른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마다 우리 방으로 들고 왔고, 자상한 마음 씀씀이가 나름대로 힘겨운 나의 삶에 버팀목이 되었다.
“야아 난 꼭 너 같은 사람을 며느리로 삼을 거데이.”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인 건 분명했다. 또한 집안의 여러 조건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기에 흘려들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10월 어느 날 퇴근길을 재촉해서 대문을 들어서니 집안은 온통 아수라장이다. 나를 예뻐해 주던 오빠가 정신적으로 이상이 왔단다. 어안이 벙벙하다. 지적이고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정신질환이 왔는지 모를 일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온 집안을 날뛰었다. 평소 다정하던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여동생과 얼싸안고 한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고, 화장실조차도 갈 수 없었다. 하루빨리 온전한 정신이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며칠 지나 퇴근해서 돌아와 보니 집안이 조용했다. 이웃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는 일이라며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아들을 데리고 S군에 있는 어느 사찰로 들어갔단다. 옆방에 사는 아주머니들이 하나같이 내가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날 이후로 미안한 생각이 날이 갈수록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마음은 아파 왔다. 동생들 뒷바라지도 해야 하고, 그 집과 가정 형편도 차이도 많이 나지 않는가. 다만 속내를 표현하지 않았을 뿐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날로 더해만 갔다.
몇 년이 흘렀다. 부모님의 성화로 몇 번의 선을 본 후, 결혼식 날짜는 잡혔고, 그전에 꼭 한 번만이라도 그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예비 신부가 무슨 고민이 그리 많아 잔뜩 그늘진 얼굴을 하고 있느냐며 걱정스러워했다. 자취방에 꽉 차 있는 혼숫감을 보면 눈물이 났다. 하기 싫은 결혼을 나이가 들었다고 해야 한다니. 바람 따라 길거리에 뒹구는 낙엽은 더욱 나를 슬픔의 나락으로 빠지게 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동생들은 내 마음이 아픈지도 모르고,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놀러 나가 버린 후 나는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대문 밖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아니, 오래전에 자주 들었던 목소리다.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오빠가 왔다. 4년 만에 스님만이 허용이 되는 가사 장삼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반가움에 덥석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자고 잡아당겼다. 평소에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고개를 들지 못 한체 울기만 했다. 내가 당장 처해 있는 상황을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는 나를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보고 싶어지면 편지하라며 주소를 적어 주었다. 하지만 편지를 써 보낼 입장이 못되었다. 보름 정도 지나면 결혼을 해야 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그 오빠는 방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혼수 감들이 꽉 차 있어서 결혼한다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때마침 결혼할 사람이 찾아왔다. 잠시 집안의 어색한 분위기는 꽃샘추위 같이 느껴졌다. 오빠는 자리를 서둘러 일어서서 문밖을 나섰다. 난 그 사람의 등 뒤에다 대고 애절한 목소리로 한마디 던졌다.
“오빠, 지금 가면 언제 와요?”
십 년이 걸릴지 이십 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내 마음은 순간 세찬 바람에 날리는 모래 같았다. 가사 장삼 자락을 휘날리며 점점 멀어져 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바람 처럼 따라가고 싶었다. 12월의 초생달도 기약 없는 이별의 슬픔에 잠기고, 차가운 바람 역시 안타까운 듯 볼을 스쳐 지나갔다. 방으로 들어왔다. 결혼할 사람은 그 사람이 적어놓은 주소를 보고 화를 내면서 찢어 버리는 게 아닌가.
결혼생활은 내가 바라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칠 남매 맏며느리 역할은 가혹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병석에 누워 계시는 홀시아버지를 모셔야 했다. 더군다나 어린 시동생들을 공부시키는 일과 결혼까지 책임져야 했기에, 시댁의 생활 형편이 어려워 우선 적으로 경제적인 부분에 최선을 다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결혼생활, 열심히 산 덕택인지 보통사람들 형편처럼 생활하게 되었다. 마음 적 여유가 생겨서 좋았지만, 층층시하에 살면서도 그리움의 자리는 늘 깔려 있었다.
틈만 나면 내 마음은 가을바람처럼 흔들렸다. 열병으로 며칠을 앓았다. 어느 날 문득 고심 끝에 전화번호부를 갖다 놓고 S군에 있는 사찰을 모두 알아봤다. 전화하는 곳마다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전화번호를 차례대로 누르다가 맨 마지막 줄에 남은 번호를 눌렀다.
“81년도 10월쯤 모자간에 아들 요양하기 위해 들어갔는데.”
머뭇거리는 말을 맺기도 전에 스님이 말씀하셨다. 그 절에 오랜 기간을 머물렀다가 법명을 받고 다른 사찰로 떠났다는 것이다. 연락처는 알 수 없지만, 가끔 그곳에 들른다고 했다. 상세한 내용을 듣지 않아도 반가웠고, 내 연락처를 스님께 알려드렸다. 그 사람이 오면 꼭 전해 주라는 부탁을 거듭했다.
여러 해가 지났다. 늦은 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S군에 있는 사찰이었다. 스님께서 나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고 했다. 상황 설명을 침착하게 듣고 난 다음 연락처를 알려 주고 오빠는 떠났단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온몸이 후들거렸다. 나는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진열장 위에 놓여있는 돼지저금통의 배를 갈랐다. 주머니마다 동전을 가득 넣은 후 공중전화부스가 있는 곳으로 사정없이 달려갔다.
10년 만이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자신 있게 좋아했다고 해야지. 목소리가 떨렸다. 그 사람도 떨고 있었다. 공중전화부스 너머로 내려다보는 달은 수줍게 웃음을 보냈다. 다음날도 오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 마음은 손오공처럼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매일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했다. 며칠 지난 후 전화를 하니 오빠는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는 공양주의 말이었다. 그 말을 믿어야 할지, 한동안 말을 잃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먹먹한 가슴을 두드려보았다. 정말 떠난 것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서로가 처음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걸어왔지 않았는가. 차라리 주어진 운명대로 고이 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란 생각이 번쩍 들었다. 수없이 그에게 향하던 마음이 그날 이후로 멈추어 버렸다. 내 현실에 충실하기 위해 말이다. 그러나 가을만 되면 잠잠하던 내 가슴은 습관처럼 일렁인다. 또 바람이 분다.
첫댓글 위에 글은 오래전에 쓴 글입니다.
그래서 년도에 이해 하면서 읽으시면 감사 합니다.
단편소설
한 편 읽은듯요.
그 오빠는 단디 좀 물어보시지.
'내는 니가 좋다.니는 내를 우찌 생각하노?'이렇게요.
참 아름다운 추억이라기엔
애틋합니다.그 분 지금도 기별되시나요?
불공 드리러 자주 가보시소.
아뇨. 그 분은 그때 통화 몇 번 하고는 연락이 안됩니다.
그 오빠는 저랑 결혼 하고 싶었지요. 그런데 우리집이 너무 가난하다 보니 집안 형편이 어느 정도 맞아야 생각했지요. 제가 계속 거절했어요. 속으로는 좋으면서요.
@(혜원)임춘희 바부 임 작가님
바부
@숙 온 ( 서해숙) 히~~~잉~~~
내 친정 오빠와 동창이었어요.
@(혜원)임춘희 좀 용기내시지.
아까운 남의 오빠!
@숙 온 ( 서해숙) 그 오빠와 결혼했다면 제가 공양주 되었을까요?
아님, 미국으로 건너가 못다한 꿈 이루며 살지?
모르겠습니다.
@(혜원)임춘희 네,어디서든
씩씩하고 멋지게
살았을 임 작가세요.호호.
애틋합니다.잘 풀어 쓰셨네요.
애틋한 추억입니다. 그래도 아름다워요. 가슴이 먹먹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담담해 지더군요.^*^
떠나간 기차가 더 아름답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좋은 추억은 오래 가슴에 남지요.
오랜만에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들려주셨네요.
조경숙 선생님은 편안하고 순리대로 펼처진 인생이셨지요?
자기 속내를 이렇게 진솔하게 드러낸 작가가 없었는데 문심의 강단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마음의 부록이 아니고 가슴 저 밑바닥에 담아둔 진짜 속내 입니다. "주어진 운명대로 고이 가는 것이" 불심입니다. 가난한 시댁과 친정을 일으켜 세우라는 업장을 지고 태어난 여장부! 그 업장을 거부하지 않고 싸워서 소멸시킨 위대한 짜라투스트라! 감동입니다.
"순정은 애수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돌아 갈 수 없는 길을 뒤돌아보는 아름다움이 짙게 녹아 있는 작품입니다.
항상 좋게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솔직하지 않으면 글 쓰나마나 란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임춘희 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것 인데요 뭐~~~^♡^
@(혜원)임춘희 문장의 생명은 진솔함 바로 그 자체입니다. 문장의 구성, 전개, 표현력과 집중력, 은유와 상징, 단순한 러브스토리의 차원을 넘어서 삶을 성찰하게 하는 글을 풀어가는 능력 모두가 아름답고 좋습니다. 그 힘은 작가가 자기 내면에 깊숙이 숨겨 두었던 것을 진솔하게 드러낸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작가는 이미 글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임춘희 선생님의 작품이 크게 기대 됩니다.
자신의 내면 세계를 진솔하게 묘사한 글은 살아있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진정 그토록 사랑했다면 혼인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읽으면서 안타깝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마음을 울컥하게 하는 좋은 작품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 제 글로서 마음을 울컥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 당시는 동생들 공부도 시켜야 했고 집안형편이 어려워 감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 집과 혼사를 치룬다면 제가 염치 없다는 생각에~~~ 주재를 알아야지 하면서 제 자신을 나무랐습니다.
@(혜원)임춘희 그 집안과 혼인 했다면 장담하건 데 임춘희답게 살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답게" 이 말이 정말 중요하면서도 좋은 말입니다. 작가 임춘희의 글 속에는 "답게" 정신이 가득차 있습니다. 내가 나 답게 사는 바로 그 길이 자유 입니다. 자유!
임춘희 작가님께 제가 한가지만 조언 하고 마치겠습니다.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한 댓글에 일일이 답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작가는 이미 그런 격식에 벗어난 초월자이기 때문입니다. 꼭 하시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거던 메일이나 편지로 하세요.
@정임표 아~~정임표 회장님 말씀 듣고 보니 위안이 됩니다.
맞습니다. 저는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는데 내 능력이 되지 않는데 남한테 얹혀 사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리고 낮이 간지러워 상대방 얼굴을 똑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어떻게든 제 손으로 허브두드려서 일궈 내야 떳떳하거든요.
@(혜원)임춘희 인사가 늦었는데 2023년도 <대구문학 9.10월호: 189호> "내가 머무는 곳" 작품도 빼어난 수작입니다. 우리 인간 속에는 내 안의 어느 한 구석에 "성장하지 않고 오도카니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있지요. 그 아이가 순수한 마음의 아이 일 때도 있고, 잔뜩 기분이 상한 아이 일 경우도 있지요. 작가의 시선과 의식이 거기까지 가있다면 이제 더 이상 세상을 의식 할 필요가 없으니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마음 놓고 쓰십시요.
보기 드문 작가의 출현을 축하 드립니다.
@정임표 어머? 그랬군요.
어찌 그런일이~~~저는 그 글 쓸때 마음적으로 엄청 힘들었답니다. 모두 모두 고맙고 감사합니다. 저는 턱없이 글이 부족한데요.
@(혜원)임춘희 진솔하게 쓰겠다는 작가 정신이 그걸 가능하게 했을 것입니다.
자기 내면을 객관화 시켜서 글의 소재로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이 아무에게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는 늘 자신을 객관화 시켜서 자기가 남겨서 전하고 싶은 글을 쓰는 것입니다. 실재로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성장하지 않고 오도카니 버티는 어린 아이 하나씩은 다 품고 살아 간답니다. 상처 받은 아이 일 수도 있고 순수했던 아이 일 수도 있습니다. 그 아이를 불러내어서 화해를 하는 순간 우리는 정말 진정한 자기를 만나고 대견 했던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행이란 말이나, 깨우침이란 말이나, 파랑새라는 말이나, 심우도의 그림 이야기나 그 모든 귀착 점은 내 안에 존재하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입니다. 이걸 통해서 한 인생이, 나아가서는 모든 이들의 삶이 정확하게 이해되고,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임선생께서는 그런 축복을 받은 분이니 그 깨우침을 잘 보듬어서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기시길 바랍니다.
@정임표 우리 정임표 회장님 덕분에 글 공부 도 했네요.
너무너무 감사 합니다.
삽시간에 본문과 댓글을 다 읽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글이 이리 재미있다면 눈이 과로하여 큰일을 내겠지요
본문의 너무 안타까운 실체
그 스님이 찾아오신걸로 끝이었다면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이어야 겠지요
일생을 두고 맘속에 아름답게 회상해 볼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넘 아름답고 애절한 스토리인듯 합니다
< 이브 몽땅 > 젊어서는 이노래가 싫었다고 합니다 "고엽 "
나이 듦에 이노래의 의미가 아름답게 느껴져 좋아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문숙 선생님께서 달아주신 댓글을 읽으며 또 다시 감사 하다는 인사 올립니다. 남들이 언뜩 생각하기에는 당연 하잘것 없다는 말을 할 내용인데~~ 저는 이런 사연을 토해 내지 않으면 숱한 날들이 아쉬움과 아픔으로 남을 것아 속을 끄집어 낸것 뿐입니다. 선생님께서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혜원)임춘희 재미있게 읽어...라는 표현속에는 저 나름의 이해가 있었슴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 합니다
@김문숙 예. 선생님~~ 선생님 나름의 이해가 있으셨다는 점 저도 당연히 알다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