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지 수요 시마당> 389
▢ 카프카즈 일기 36 / 즈바리 패스 Jvari Pass
바람소리 바람에도 높이가 있다 낮은 바람은 땅에 엎드려 푸성귀가 되고 높은 바람은 창공으로 솟아올라 별이 된다 어떤 바람은 골짜기로 스며들어 양들을 보살피고 어떤 바람은 초원으로 나가 아득한 그리움이 된다 그대가 보라 그대 어깨에 떨어진 바람소리와 나의 발등에 내리는 바람소리는 서로 섞여 고원의 물소리를 이루고 봄이면 대지의 가슴을 어루만져 별처럼 반짝이는 야생화를 불러낸다 |
36. 즈바리 패스 Jvari Pass
고원은 어디나 바람 투성이다
바람은 산정을 두루 넘나들며
성스러운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설산의 아침은 평화롭다
햇살은 기슭을 따라 반짝이고
살아있는 존재들은 무엇이나 눈부신 아침
새벽부터 힘겹게 산정을 오르는
저 숱한 화물차들은 무엇을 실어 나를까
끝없이 화창한 날씨
간밤엔 바람소리 스산하더니
아침에는 기슭을 흘러내리는 물소리 청랑하다
대기는 가슴이 시릴 만큼 차갑다
시냇물은 정겹다
차량이 달리는 양안의 협곡은 웅대하고 장엄하다
카즈베키Kazbeki 가는 길
카즈베키는 ‘얼음산’의 뜻
우리는 ‘얼음산’을 만날 때까지
분주히 고도를 높여야 한다
벼랑길은 많다
햇살에 반짝이는 설원雪原은 흔하다
골짜기를 흐르는 강폭은 넓어지고
드문드문 드러난 강마을은 아늑하다
양들은 어디라도 흔하다
이따금씩 도로 위에서 쉬는 소떼들은 노상에 앉아
여행자에게 도로를 비킬 생각이 없어
한가로이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자작나무의 길과
포플러나무의 길을 가까스로 지나니
흙은 깎여 나가고 바위만 남은 암산岩山의 행렬
그러나 강물은 마침내 노도가 된다
대자연이여
내 몸이 살아서 사는 동안은
나를 발견하고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다른 생령들이 누구인지 알게 하라
엄숙한 시간과
신성한 공간과
수많은 계절과
보는 것마다 나의 노래요
듣는 것마다 나의 춤이니
인간의 희로를 자연에 맡기고
대자연의 서사시에 머리를 숙이니
오, 내가 누구인지 부디 알게 하라
아스라한 벼랑길을 끝없이 굽어 도는 고원의 길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위험의 끝에 있을까
모든 것이 적막에 휩싸여 숭엄하다
드높은 고독은 본래 말이 없는 걸까
멈추어 서면 장엄하고
골짜기를 따라 스며들수록 물소리 우람하다
계곡 사이에 기댄 집들은 외롭다
거대 적막만을 마주한 저 인간의 집들
무엇 때문에 저들은 이토록 깊은 오지에 살까
눈에 보는 것은 벼랑과 눈 덮인 산정
귀에 듣는 거라곤 물소리 바람소리뿐
강 건너 봄이 와도 봄이 오는 줄 어떻게 알까
삶이란 외로움을 뛰어넘는 것일까
대자연의 위용 앞에
나는 보리쌀 한 톨 만큼 작다
인구밀도가 낮은 탓일까
눈앞에 나타나는 연봉들은 과묵하다
자연의 침묵 앞에서 인간의 언어는 초라하다
그래도 봄은 오고
여름날은 와서 문을 두드리고
가을날은 와서 산빛을 물들이고
겨울은 와서 추위를 퍼뜨린다
대답할 건 메아리들뿐인데
무슨 까닭으로 인간은 고독과 대면하고 사는 걸까
드문드문 나타나는 인간의 마을
자연에 기댄 모습이 아스라하다
삶이란 어느 산정에도 기대어 산다
어느 초원이라도 만나서 붐빈다
인간의 발길 닿을 수 없는 곳에
집을 만들고
전야田野를 이루고
따뜻한 둥지를 틀어 낙원을 꿈꾼다
모순이 아름답다
초원에도, 들판에도, 기슭에도, 산정에도
눈과 얼음의 벽 사이에서도
인간은 위험을 뛰어넘어 생의 폭을 넓힌다
카프카즈 사람들은 왜 이런 대협곡을
저들의 삶의 둥지로 선택했을까 하고 묻는 일은
우스꽝스런 물음이 될지도 모르겠다
생명은 어디라도 번식한다
누군가는 산다
살아서 산을 지키고 하늘을 섬긴다
삶처럼 뜨거운 게 어디 있으랴
외로운 길마다 오지까지 걸어가서
마침내는 자연의 거대한 침묵 속에 스스로 묻혀 버린다
나는 다만 침묵한다
말은 없이 내 무릎 위에 놓인 메모지에
나는 대자연이 들려주는 귀엣말을 묵묵히 받아 적는다
자연을 어찌 모두 옮겨 놓을 수 있으랴만
필부의 가슴을 적어 하늘에 보여준다
이방의 창공은 내 고향의 창공과 다르지 않다
모든 창공은 따로 고향을 두지 않는다
이방의 하늘이 곧 나의 하늘이다
찬연한 햇살
서늘한 구름
양떼들은 고원을 좋아하는 것일까
웬 양들이 저리 많을까
이방 땅의 거대 침묵들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뭉게구름이 드높을수록 내 마음은 고요하다
햇살이 천지를 뒤덮는다
구다우리Gudauri와 파사나우리Pasanauri 사이 어디쯤일까
그때 누군가 말한다
All place is viewpoint
우리가 달리는 공간은
지난 시절에는 실크로드의 일부구간이라 했다
한때는 러시아 군용도로Military highway로도 사용되던 구간
러시아 정부는 이 즈바리 패스가
흑해의 부동항에 연결되기를 희망했었다
즈바리 패스는 수많은 군용도로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을 달리는 길
테르기Tergi 계곡은 심연처럼 깊고
아라그비 강Aragvi River의 수량은 풍성하다
모든 전경前景은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녹색의 향연
모든 후경後景은 등 뒤로 사라지는 것들의 아쉬움
산정의 설경은 숭엄하다
협곡은 두렵다
강물은 유장하다
산정은 우아하다
설산은 한가롭다
카즈베키는 트빌리시 북쪽
157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
카프카즈 산맥의 비호를 받는 신성한 산맥들 즐비하다
이른바 ‘신들의 산’은 장엄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게르게티 마을
그루지아와 러시아 국경 부근의 조용한 시골마을
마을 입구에 ‘카즈베키Kazbeki’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5047미터의 준령인 카즈베크 산Kazbek Mountain은
이곳에서 태어난 19세기 러시아 작가인
알렉산더 카즈베키에서 유래한 이름
그루지아가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얻은 이후
본래 이곳에 은둔해 살던 수도사
게르게티 스테판 츠민다Stephan Tsminda의 이름을 따라
스테판 츠민다로 이름이 고쳐졌다 하나
관례를 따라 아직까지는
카즈베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 시인 푸쉬킨도
삼 년 간 이곳에 머문 적이 있는 곳
구름은 높고
산맥은 웅대하고
설산은 신성하다
여기가 카프카즈 산맥의 심장이다
한때 그루지아의 새로운 새벽이 태어나던 자리다
(이어짐)
첫댓글 설산과 녹음 초원이 너무 멋져요. 좋은 시경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