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에 다시 돌아왔다
이명자
배밭이 헐렸다
떠날 때 인사조차 못한
가로수 나무들도
제법 큰 어른이 되어있다
이방인들
뿌리째 뽑힌 배밭을 잊고
건조한 도시를
살아가고 있다
구부러진 길들은
찾기 힘들어졌다
어디선가
배꽃이 흩날릴 테지
아주 잠깐 꽃향기를 그리워할 테지
견고한 빌딩 사이로
낯선 고독이 몰려다닐 테지
나는 평택에 다시 돌아왔다
---현상연 외 {시원}(근간)에서
이 세상에는 수천 억 개의 별들이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는 수많은 별자리들 중 아주 평범한 별자리라고 할 수가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별은 어떤 별이고, 우리는 어느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태양도 아닐 것이고, 시리우스도 아닐 것이고, 북극성도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별은 우리 인간들이 창출해낸 ‘돈별’이며, 이 ‘돈별’의 크기는 수많은 별들과 우주 전체를 다 사고도 남을 것이다.
돈은 물이고 강이고, 돈은 호수이고 바다이다. 돈은 산이고 들이고, 돈은 우주이고 수천 억 개의 별들이다. 돈은 금이고 다이아몬드이고, 돈은 철광석이고 화석연료이다. 돈은 산소이고 공기이고, 돈은 한가함이고 우주여행이다. 돈은 행복이고 불행이고, 돈은 대저택이고 우주비행선이다. 돈은 수천 억 개의 얼굴을 가진 명품배우이며, 이 세상의 모든 희극과 비극을 다 주재하는 천지창조주라고 할 수가 있다.
돈은 자연재화가 아닌 인위적인 가공의 재화이지만, 우리 인간들은 이 돈별 이외에는 그 어떤 별에서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무소불위의 재화의 힘은 원자폭탄보다도 그 파괴력이 더 크고, 그 어떤 신들도 흉내낼 수 없는 천지창조를 연출해낸 것이다. 로마나 파리를 단번에 밀어버리고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도 다 해체하고 새로운 부자들의 성채를 만들 어낼 수도 있다. 돈의 위력은 모든 세계적인 전쟁을 다 연출해내고, 이제는 스페이스 X이든, 그 무엇이든지간에 유인 우주선을 타고 가 우주식민지를 개척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돈이 모든 권력을 다 장악하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노예로 거느리고 있는 이 시대에, 이제 고향이라는 말은 그 옛날의 보물선 속의 도자기 파편같은 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와, 언제, 어느 때나 정답고 그립던 이웃들과 일가 친척들이 살고 있었던 고향은, 그러나 그 자체로는 어떤 재화를 창출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돈과 탐욕의 힘으로 다 밀어버렸던 것이다. 돈은 탐욕이고, 탐욕은 정든 고향의 산과 들을 다 밀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채시장과 음주가무의 매춘굴을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사채업자들은 소수인데 반하여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팔고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떠돌아다니는 부랑자의 신세를 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부모형제도 없고, 이웃과 친구들도 없다. 민족과 종교도 없고, 고향과 조국도 없다. 돈의 노예가 된 우리 인간들은 돈독이 올랐고, 이 사납고도 호전적인 공격성으로 모든 인간들을 다 잡아 먹는다.
이명자 시인의 [평택에 다시 돌아왔다]는 금의환향이 아닌 고향상실의 아픔이 주조를 이루며, 현대사회의 비극의 진수는 ‘고독’이라는 사실을 압도적으로 인식시켜 준다. 배밭이 헐렸고, “떠날 때 인사조차 못한/ 가로수 나무들도/ 제법 큰 어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떠돌이- 나그네들인 이방인들은 “뿌리째 뽑힌 배밭을 잊고/ 건조한 도시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옛날의 곡선의 미학을 자랑하는 “구부러진 길들”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고, 크나큰 “빌딩 사이로/ 낯선 고독이 몰려”다니고 있었다. 아득한 고향같은 타향, 나는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평택에 다시 돌아왔지만, 산천도 바뀌고, 사람도 바뀌고, 그 모든 것이 다 바뀐 ‘돈별의 도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향산천의 훼손과 부모형제와 조국과 민족의 소멸은 인간의 죽음과 악마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오늘날 이 악마들이 펼치는 멋진 신세계는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기적 자체라고 할 수가 있다. 정답고 그리운 고향산천은 고리대금업의 사채시장과 음주가무의 매춘굴로 변모가 되고,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날이면 날마다 ‘고소-고발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네게 이로운 것은 내게 다 해롭고, 당신과 우리가 아닌, 내게 이로운 것은 다 좋은 것이다.
자연과학과 산업의 발전은 곧 모두가 다같이 만사형통의 투시경을 쓰고, 당신의 신상과 금고의 내용과 그리고 당신의 성기와 내장 속까지도 다 꿰뚫어보게 될 것이다.
모든 게 진실이고, 어느 것 하나 숨길 곳이 없다.
[평택에 다시 돌아왔다].
무섭고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