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늘푸른아카시아 송년모임 스케치
김완
어제 내린 눈으로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다. 토요일 오후 4시 30분 쯤 배고픈 다리 근처 약속장소로 가기위해 등산화 끈을 졸라매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부터 걸어서 가기로 맘을 먹었다. 자주 만나지 못해 어혈이든 이들 만나러 가는 길. 눈이 드문드문 쌓인 응달진 곳이 꽤 미끄러웠다.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답게 옷깃을 파고드는 칼바람이 몸을 웅크리게 하였다. 봉선동으로 넘어가는 순환도로 밑 굴다리를 지나 제석산을 왼쪽에 끼고 지원동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걸었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나이 든 분에게 이 도로가 지원동으로 연결된다는 걸 확인하고, 천천히 주위를 살피면서 걸었다. 차들이 양 방향으로 지나가다가 공사로 인해 좁아진 도로에서는 한쪽으로만 통과하곤 하였다. 도로는 듬성듬성 공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공사판이 으레 그러하듯 공사에 사용된 장비들이 이곳저곳에 방치되어 어수선하였다. 오랜만에 겨울 날씨답게 하늘은 청명하였다.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맑고 깊은 선비의 얼굴이 거기 겨울 하늘에 있었다. 저 멀리 솔개 한 마리 지상의 먹이를 노리고 용산터널로 진입하기 전 작은 저수지 위 하늘을 배회하고 있다. 저수지의 수면이 은빛 겨울 빛으로 반짝인다. 차로 스치듯 지나쳤던 길들이 살아서 숨을 쉰다. 빠르면 주변을 살피지도 생각도 하지 못한다. 얼마쯤 걸어왔을까? 입에서 더운 김이 나고 목주위에 땀이 조금 비칠 때, 왼쪽으로 광주희망원이 나왔다. 조금 지나자 하얀 팻말에 검정 글씨로 이곳은 625전쟁 때 이곳 주민들, 당시는 지산면 주민이 대량 학살 후 매장된 지역이므로 당국의 승인 없이 훼손 시에는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625발발 60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625전쟁의 흔적이 내가 사는 도심근처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죽었다 하여 연일 뉴스 첫 머리에 그에 대한 소식들이 보도되고 있는데……. 조문을 둘러싼 협량한 정부당국의 태도가 영 마음에 차지 않아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그래도 희망은 있는 건가? 마을 개울물(=또랑)이 얼음장으로 덮어있고 그 밑을 흐르는 물소리가 제법 운치가 있다. 기독정신요양원을 지나자 걷고 있는 이 길이 여러 갈래에서 연결되는 도로임을 처음 알았다. 생각들도 갈래갈래 연결되는 중심이 있을 것 같은데. ‘문학도 이미 권력이 되어있다’ 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가지의 구조,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인데……. 가장 권력과는 거리가 멀어야 할 문학에도 이미 문학권력이 고착화되었다니? 안과 밖, 중심과 주변, 중심에 설수록 빠르게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천박함에 현기증이 난다. 권력인 사람과 권력을 비판하고 질시하는 사람들. 나도 이미 누군가의 권력이 되어 남을 가슴 아프게 하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본다. 한 시간 쯤 걸었나보다. 눈에 익은 광주천변에 이르렀다. 큰 길로 나가기위해 낯선 동네의 골목길을 굽이굽이 거쳐 지나가게 되었다. 좁은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층집들. 주차장이 따로 없어 길거리 한쪽에 낡은 트럭이며 소형차들이 낮게 웅크리고 있는 동네. 작은 동네 슈퍼에 몸을 웅크리고 들락거리는 마을 주민들. 이 추운 날씨에 이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용달차에 짐을 부리고 있는, 이 추운 겨울에 어디로 옮겨가는 것인지? 한동안 잊고 살았구나. 내 어릴 적 가난을, 가난하게 살았던 그 시절을, 그 이웃들을, 다 잊고 살고 있었구나. 어릴 적 새끼줄에 연탄 두 장을 양 손에 들고 골목길을 올라오던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큰 길로 나와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여 배고픈 다리에 도착할 무렵 시간을 보니 6시 10분전 쯤 되었다. 중앙수산 횟집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재방이 형(22회)을 만났다. 형근이(25회)에게 전화를 하고 약속장소에 들어가니 식당전체가 손님들로 만원이다. 조금 있자 형근이와 석구형(23회)이 도착하였다. 우리 이름을 말하고 방을 달라고 했으나 손님들이 꽉 차서 방에는 들어갈 수 없고 겨우 한쪽 구석에 두 상을 만들어준다. 크리스마스이브라서 그런지, 그 식당만 그런지 사람들로 와글와글하다. 백성우(26회), 김민휴(28회), 이상열(21회)형, 신용식(21회)형이 도착하였고 마지막으로 26회인 이철원 변호사가 도착하여 ‘다들 내년 한 해도 건강 하라’ 는 회장인 용식이 형의 건배로 송년 모임이 시작되었다.
석구 형이 무등수필문학회 동인집<도심의 나루터>를 가지고와 한권씩 서명을 한 후 나누어주었다. 회비는 삼만 원씩 걷었다. 이런 저런 얘기들을 돌아가면서 하였다. 동하 형(22회)의 췌장암 소식은 우리를 숙연하게 하였다. 엊그제 만난듯한데 그 사이에 그 무서운 병과 투병하고 있다니. 직접 전화 통화가 안 되어 추후 연락이 되면 어떻게 할 건인가? 고민하기로 하였다. 철원이는 남구에 내년 총선 예비후보로 등록은 했단다. 정치보다는 변호사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용식이 형의 시 ‘남원 식칼’ 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무딘 남원식칼로 이 시대의 문학권력을 베어버리라고. 시는 많이 읽지만 써놓은 것은 없다는 용식이형의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듯하였다. 성우의 배고픈 다리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배고픈 다리’ 라는 소설을 전남일보에 연재하고 원고료를 못 받다가 사장에게 등기로 사연을 적어 부쳤더니 다음날 원고료가 입금되었다는 사연. 작고 동문인 백공기(22회), 김주함(25회) 시인에 대한 여러 숨겨진 이야기들, 이야기들, 양신섭(20회) 형님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문학의 밤 행사 끝내고 시내 학생회관에서 무등산 4수원지 까지 걸어갔던 이야기. 등단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24회 서울 선배들(조봉익, 오명현, 임채우)이 요즘 카페 활동을 열심히 한다는 말도 나왔다. 우리 모임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들, 글은 자유롭게 쓰고 강요하지는 말자는 재방이형 이야기. 문학을 끈으로 만난 모임이니 어떤 글이든 카페에 올려주라는 말도 하였다. 재방이형에게 창작방을 만들어주겠으니 산 이야기든 무엇이든 올려 주십사 하는 카페운영자로서 내 말도 하였다. 승윤이 형은 내년부터는 나오기로 했다는 말. 종영이형은 해외에 있다는 상열이 형의 전언이 있었다. 거푸 마신 소주와 소맥 폭탄주에 다들 얼큰해졌다. ‘밥이 최고의 안주다’ 라는 말을 끝으로 그 식당에서 나와 바로 앞 호프집에서 한잔씩 더하기로 하였다.
사진사인 내가 사진기를 챙기지 못하여 인증 샷은 모두 아이 폰으로 찍었다. 카페 행사사진에 올리니 즐겁게 감상하시기 바란다. 술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여 화면 상태가 좋지 않음을 양해해주시면 고맙겠다. 9시 30분경 이차를 끝내고 걸어 나오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상열이형, 철원이, 성우, 재방이형은 먼저가고, 기분이 좋은지 김민휴 시인이 학생회관까지 걸어가기로 주장하여 걸었다. 회장인 용식이형이 갈듯하다가 끝까지 남아 밤을 새웠다. 걸어가는 도중에 눈에 띄는 소주 집에 들러 한잔씩 더하였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라 그런지 모처럼 나온 충장로 학생회관 뒷골목은 젊은 연인들, 외로운 사람들로 가득했고 포장마차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기다리다 지쳐 손금과 내년운세를 보는 집에 들러 운세를 보기도하였다. 겨우 형근이 단골 포장마차에서 자리 잡고 한 잔하다가, 결국에는 광주공원 포장마차까지 가서 한잔씩 더하고 헤어졌다.
눈 내리는 밤길에서 고향마을 대숲바람 소리 문득 귀청을 울리고 간다. 눈발 흩날리는 사이사이로..., 어떤 주제에 대하여 혹은 각자의 문제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야기도 못하고 엄벙덤벙 술만 마시고 헤어진듯하여 가슴 한편이 허전하였다. 다음날 깨어보니 머리는 깨질듯하고 가슴이 쓰리고 텅빈듯하다. 왜 우리의 일상은 반복되는 걸까? 올해의 송년 시로 무엇을 올릴까 고민하다가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긋고 최근 작고한 김규동(1925-2011)시인의 시 『나비와 광장』을 올린다. 이는 현대문명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헤매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시로서, 송년모임 눈 오는 밤에 거리를 헤매는 우리들의 모습과 우연히도 겹치기 때문이다.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 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流域)-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나비와 광장』전문
첫댓글 그 술을 마시고도 어찌 그 모든 풍경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천상 너는 시인이다.
사랑한다.
보지 않아도 선합니다.
봉익이 형, 카페에 좋은 글, 자료 많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진년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다들 즐거웠겠습니다.
완 시인이 걸었던 길을 나도 걷고 싶도록 잘 쓰셨네.
언제나 형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언제 한번 광주에 안오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