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크리스텐덤, 이원론
메타버스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상의 차원을 뜻하는 이 단어는 간단히 설명하면 여러 사람이 온라인에 접속해 함께 경험하는 가상현실 서비스이다. 게임과의 차이가 있다면 사회, 문화적 활동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풀어보자면, 각자 접속한 사람들이 가상의 공간에서 다 같이 들판을 달리고, 공연을 보고, 게임도 하기도 하고, 또 친구를 만나고 대화를 하는 등의 활동도 할 수 있다. 기존의 가상현실은 "진짜같은 게임" 이었다면 메타버스는 "진짜같은 세상"이다. 온라인이기에 현실과 분리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도 현실과 분리된 또 다른 세상이 있는 셈이다.
코로나 기간동안 온라인 교회에 대한 논의들이 가속되면서 메타버스 교회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엄청나게 현실감 있는 메타버스라면 기존의 온라인 교회에서 염려되던 부분들이 상당부분 해소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사실 아직 현실의 교회를 대체하거나 그 기능의 일부를 넘겨받을 수 있을 정도의 서비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정말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서비스, 혹은 아이에서 노인까지 전국민이 당연스레 사용하는 서비스가 생긴다면 교회가 이를 이용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카카오톡이 젊은 친구들만의 서비스였다가 어느 새 교회 권사님들의 단톡방이 자연스럽듯 말이다. 코로나가 지나가고 나니 그 뜨겁던 메타버스의 열기는 식고, 저 먼 미래를 준비하는 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게 자연스럽다 코로나 이전부터 한국교회의 어려움은 지속되어 왔다. 그 원인 중에 교회와 세상사이의 단절을 꼽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아닌 교회 속에서만 지내게 되는 이러한 교회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혹자는 '크리스텐덤' 즉 옛 기독교 왕국을 뜻하던 단어를 되살리기도 하였다.
크리스텐덤, 과거 기독교 왕국 시대, 기독교 세계 안에서 태어나면 기독교인이고, 비기독교인은 저 국경 밖에 존재하는 무서운 존재로 이해하며 살았던 시대의 용어이다. 이를 현대 대형교회에서 자라난 이들에게 빗대면 제법 맞다. 교회 안에서 모태신앙으로 나고 자라고, 교회 바깥의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단절된 이해를 가진 현대 교회의 문화. 지독히도 이원론적이라는 면에서 닮았다. 이것 아니면 저것, 모 아니면 도, 완전한 단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른 점도 있다. 두 가지의 크리스텐덤은 '단절'이라는 면에서는 닮았지만 현대의 크리스텐덤(이원론적 교회)는 과거의 크리스텐덤(국경으로 분리된 기독교 국가)와는 다르다. 분명 주중에는 그 단절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현대의 이원론적 교회를 설명하기에 크리스텐덤은 적절한 비유가 아니다.
그래서 메타버스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향유하였던 교회문화는 주말마다 접속하는 메타버스였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치이면서 주말이 오면 빨리 접속해서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는 가상세계 말이다. 물론 온라인은 아니었지만, 마치 온라인 세계가 현실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접속자에게는 분명 경험되는 세계이듯, 주말의 교회경험은 주중의 세상과는 무관한 메타버스였던 셈이다. 온라인인지 아닌지가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단절되어 살아가는 것을 말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이러한 이원론적 교회에서 발생됐던 많은 것들이 설명된다. 예를 들어, 골동품같은 단어인 선데이 크리스천. 오래됐지만 그 의미는 유효하다. 주말에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지만, 주중에는 권위적인 직장상사, 폭력적인 가장이 되는 이들. 이 용어에는 왜 주일에만 크리스천이고 주중에는 아니냐는 합당한 고민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시각을 바꾸어 이분들이 교회를 주말 또는 주중에 시간 날 때마다 접속하는 메타버스처럼 현실에서 동떨어진 곳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교회에서만 신령한 이들의 모습이 그리 신기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메타버스에서 생성된 캐릭터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내가 되고 싶어하는 가상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분노 가득한 사람이지만, 교회라는 메타버스에 접속했을 때만이라도 제법 좋은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은 마음까자 뭐라 할수야 없을테니. 또한 그 많던 교회 프로그램의 문제역시 쉽게 이해가 된다. 메타버스 같은 서비스로 성공하려면 이용자들이 최대한 가상공간에 오래 머물면서 그 세계에 빠져드는 이른바 ‘몰입경험’을 만들어 내야 한다. 심지어 현실보다 메타버스 세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서비스는 성공적이다. 온라인 서비스에 사람들을 붙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온라인 서비스나 게임에서 매번 접속할 때마다 조금 컨텐츠를 이용하고 나면 할 게 없으면 체류시간이 줄어든다. 그러다보면 점차로 접속을 그만두게 된다. 그래서 게임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할 거리, 컨텐츠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를 그만두면 곧 접속률 하락으로 이어진다. 메타버스는 아니지만 온라인 게임의 상당수들은 지속적으로 접속하는 이들에게 보상을 준다. 때로는 반복적으로 작업을 하고 심지어 지겨움을 느끼는 소위 '노가다'를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다보면 아이템이 늘거나, 새로운 캐릭터를 받거나, 레벨업을 하는 등의 보상이 생긴다. 그러면 거기서 현실세계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재미와 유능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몰입경험을 한다.
교회이야기로 돌아와서, 자주들 이야기하는 교회 봉사를 하면 신앙이 늘어난다는 관점도 이 흐름에서 이해가 된다. 클리어해야 할 컨텐츠가 늘어나면 체류기간, 충성도가 증가하고 몰입경험이 늘어난다. 그렇게 신앙성장과 교회활동몰입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 진다. 교회 봉사에 대해서 너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주님의 마음으로 사역하는 교회 봉사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마치 온라인 서비스 경험하듯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교회'만'을 위한 신앙이 유도되는 위험성을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메타버스’형’ 교회들의 문제는 역시 단절이고, 단절의 문제는 선한 영향력의 감소이다. 마치 메타버스 안에서 자신이 아무리 대단한 캐릭터라 할지라도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것처럼, 교회 안에서 우리가 아무리 멋지고 다정하고 거룩하고 신령할 지라도 현실로 로그아웃한 상황에서의 내가 진짜 나이다. 사실, 교회가 성도들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방법이 그래왔다. 성도들이 주말동안 교회에서 경험한 마음을 간직하고 현실로 돌아가는 것 말이다. 주말동안 메타버스와 온라인 게임 경험을 하고 그 마음을 간직하고 돌아가는 모델 말이다. 교회에서의 내가 현실에서의 나의 연장선상에 있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게이머나 메타버스 이용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연장선가지고는 부족하다. 열정을 가지고 일상을 잘 살도록 돕기보다 열정을 가지고 교회봉사를 하게 만드는 교회경험을 하는 성도들을 떠올려 보자. 이번에는 우리 입장 말고 세상 입장에서 말이다. 세상 입장에서는 교회 이용자들과 종교 메타버스 이용자들이 얼마나 다를까. 자신들은 알 수 없는 콘텐츠를 즐기고 좋아하고 재밌어 하면서 이따금씩 로그아웃해서 너도 해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궁금증을 가져다 줄까. 나는 좋아하지 않는 종류의 게임을 엄청 좋아하는 친구쯤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메타버스라는 비유를 통해 이원화 되버린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이원론적 교회경험을 메타버스 서비스로 이해해 보는 것은 신앙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치 메타버스 서비스 경험처럼 되어버린 우리의 이원화된 신앙을 극복하고 현실 속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은 무엇이 필요한가? 이야기해 나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