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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이야기
알폰스 무하 <슬라브 서사시>
살랑살랑 가을바람이 불 때가 나들이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죠. 아르누보의 거장, 체코 국민화가이자 현대 ...
<슬라브 서사시>는 호모 루덴스였던 알폰스 무하가 일생을 바친 “장엄한 놀이”로, 인문학과 인간의 존재적 근원에 대한 경의를 시각예술로 구현한 걸작이다.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 창작을 즐기며 거의 20년간 열정을 쏟아 부었다. <슬라브 서사시>의 스펙터클한 장면들은 고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훑으며 시간을 거슬러 가는 기나긴 여행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는 스무 점에 달하는 이 연작의 절반을 체코 민족의 역사에 헌정했고, 슬라브 민족의 화합과 평화를 그리는 심포니를 화폭에 연주해 갔다. 무하는 1919년에 프라하에서 <슬라브 서사시> 중 우선 완성된 열한 점을 전시한다. 그는 이 연작을 1928년에 완성하였고, 후원자 크레인과 뜻을 모아 전 작품을 프라하 시를 통해 체코 민족에 기증했다.
본향의 슬라브인들
No.1.The Slavs in Their Original HomeLand,1912, Tempera on canvas, 610 X810cm, 체코프라하
‘투르크 채찍과 고트식 검’은 슬라브족들의 평화로운 마을을 무력으로 헤집는 이방의 침입자를 상징한다.
별이 총총한 검푸른 밤에 유목민 집단이 약탈한 고대 슬라브 마을이 불타고 있다. 유목민들은 나이 들고 힘없는 마을 주민들에게 무력을 행사하며 이들을 한꺼번에 몰아내고 있고, 젊은 사람들을 흑해 북쪽의 항구 오데사(odessa)에 서는 노예 시장으로 데려가려고 옷을 벗기고 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남녀 한 쌍이 앞에서 웅크리고 있다. 이 잔혹한 밤에 유일하게 붙잡히지 않고 목숨을 건졌지만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공포와 전율이 가득하다.
두 사람을 땅에 바싹 엎드리게 만든 두려움 속으로 증오와 복수심 그리고 평온히 살고픈 바람이 뒤섞여 스며들고 있다. 이들의 간절함은 침략으로 고통 받는 종족에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도록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고대 민간신앙 속 사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제의 오른팔을 부축하고 있는 붉은 옷의 전사는 전쟁을 상징하며, 나뭇잎관을 머리에 쓰고흰옷을 입은 처자는 평화를 상징한다.
루야나 섬의 스반토빗 제전
No.2. The Celebration of Svantovit in Rugen, 1912, 캠버스에 템페라 610 X 810cm, 체코프라하
그림의 신전에서 특사들과 화관을 쓴 대사제가 나오고 있다. 제물로 바쳐질 힘의 상징인 황소를 몰고 가는 모습도 보인다. 그림 중앙 상단에는 슬라브의 마지막 전사가 숨이 다해 가며 신성한 백마 위에서 스반토빗 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게르만 민족을 상징하는 떡갈나무가 있지만, 스반토빗 신의 손에는 심장 모양의 잎이 달린 보리수나무 가지가 새롭게 자라나고 있다. 보리수나무는 슬라브 민족을 상징한다.
해변에 면한 가파른 벼랑 밑에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에 모든 사람들이 흥에 겨워 노래하며 춤추고 있다. 그림 중앙 아랫부분에 아이를 안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의 표정은 그녀의 종족에게 얼마나 애달픈 미래가 닥쳐올지 예감하고 있는 듯 음울해 보인다.
무하가 오늘날 독일 영토에 속하는 루야나 섬에서의 스반토빗 숭배를 작품으로 그려 낸 것은 슬라브족이 누렸던 과거의 영광과 초민족적인 영향력을 되살리고자 하는 자긍심의 발현이다
대모라비아 왕국에서의 슬라브 예배의식 도입
No.3 Introduction of the Slavonic Liturgy in Great Morvia,1912,
Tempera on canvas, 610 X 810cm, 체코프라하
이 그림은 대모라비아 왕국의 수도 벨리그라트를 배경으로, 모국어 예배의 시작을 기리는 작품이다.
정 안마당의 높은 자리에 측근들로 에워싸인 스바토플록 왕(svatopluk, ?-894)이 앉아 있고 그 앞에 주교와 귀족들이 있다.
스바토플록은 로스티슬라프 왕의 아들이다. 부사제는 교황이 메토디우스를 대주교로 임명하고 스라브어 미사 집전을 허용하는 교서(Industriac Tuac),'그대의 열망‘이라는 뜻을 읽고 있다. 상단의 가장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프랑크족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의무적으로 확산됨을 상징한다.
그 아래 모자가 달린 흰옷을 입고 머리 주변에 후광을 두른 사람은 형 메토디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천상에서 대모라비아 왕국을 수호하는 찌릴콘스탄틴이다.
원형 건물인 로툰다 맞은 편에 있는 제자 행렬의 선두에는 메토디우스가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부축하는 부사제들을 양 옆에 두고 서 있다.
공중에 비잔틴미술의 이콘처럼 묘사된 네 사람은 9세기 중엽에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제1차 불가리아제국(681-1018)의 보리스 1세 부부와 9세기에 키예프 러시아를 세운 이고르1세 왕 부부이다.
작은 배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앙 상단의 두 인물은 988년 키예프 공국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성 블라지미르의 아들 글렙과 보리스로, 이들은 선원들의 수호신이자 상인들의 보호자로서 슬라브 민족 사이에 그리스도교가 닻을 내리게 됨을 상징한다.
앞에서 오른손에 원을 들고 왼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는 젊은이는 슬라브 민족이 바라 마지 않는 힘과 화합의 상징이다.
불가리아제국의 황제 시메온
NO.4. Tsar SimeonⅠof Blgaria, 1923, Tempera on canvas, 405 X 480cm, 체코 프라하
이 작품을 통해 무하는 시메온 황제의 계몽적 통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배경은 발칸 반도 북부에 있는 시메온 황제의 도시 벨키 프레스라프이다. 이 그림은 비잔틴 양식으로 장식된 황궁의 모습을 훌륭히 재현했다.
황실의 서기들은 비잔틴 문헌들의 주옥 같은 사상을 모아서 기록하거나 연장자들의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과거로부터 전해 오는 삶의 지혜를 받아 적고 있고 수도사들은 문학작품을 손수 베껴 쓴다.
시메온 황제는 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이들의 의제를 주관하며 조언을 건넨다. 스승과 책을 찾아 도래하는 다른 나라의 특사들도 맞이 하고 있다.
보헤미아 왕 프르제미슬 오타카르 2세
No.5. King Premisl OtakarⅡof Bohemia, 1924, Tempera on canvas, 405 X 480cm,체코 프라하
프레미슬 오타카르Ⅱ는 1253년 부터 1278년까지 보헤미라를 통치했다. 그는 또한 군사적으로 철의 왕으로 알려졌고 쿠트나 호라(Kutna Hora)의 은광에 재산을 축적해 '황금왕'으로 불린다.
그는 보헤미안 후손들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13세기 슬라브 군주들사이에 긴밀한 연계를 구축할 책임을 맡았다.브란덴부르크의 조카 쿤 후타가 항가리의 벨라 4세의 아들과 결혼한 것을 계기로 오타카르 Ⅰ는 참석자 전원과 지속적인 동맹 맺기 위하여 슬라브 통치자들을 초대하였다.
이 작품은 13세기 보헤미아 왕국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모라바 강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를 걸쳐 흐른다) 과 다뉴브 강(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헝가리를 걸쳐 흐른다)이 합류하는 곳에 세워진 도시에 나와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 속 채플은 프르제미슬 왕가에 귀속되는 곳으로, 벽면에는 왕가의 문장, 즉 날개를 펼친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 프르제미슬 오타카르2세는 그림 한가운데에 결혼식이 거행되는 휘장 안에서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주변에는 귀족들이 서 있다. 헝가리의 벨라4세도 가족과 함께 참석했다
세르비아 왕 슈테판 두샨과 그의 대관식
No.6. The Coronation of the Serbian Tsar Stefan Uros Dusan as East Roman Emperor,1926,
Tempera on canvas, 405 X 480cm, 체코 프라하
슈테판 두샨은 1346년 부활절에 오늘날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세르비아 황제로 즉위하는 대관식을 치렀고, 이로써 고대 로마를 계승하고 있음을 선포했다. 이 작품은 대관식 직후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투구, 허리띠 그리고 검을 받쳐 든 유력자들이 행렬의 선두에 서고 행정관은 국새를 들고 있다.
호화로운 대관식 가운을 입은 황제는 손에 권력의 징표인 곤봉 모양의 비잔틱식 권표(權標)를 들고 있다.
황제와 황후가 가는 길에 꽃잎이 달린 잔가지를 손에 든 처자들이 꽃을 뿌린다. 황제의 아들이 그 뒤를 따르고 바로 뒤에는 대관식을 거행한 세르비아 정교회 장로가 따르고 있다.
성직자, 유럽 황실의 특사들, 귀족과 하객들이 행렬 후미에 있다. 호화롭게 차려 입은 귀부인들이 높은 연단에서 새로운 황제를 환영한다. 성당 앞쪽에 나란히 선 기사들도 황제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행렬 속에는 보헤미아 왕국의 통치자 카렐 4세의 특사도 있다. 카렐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했고 슈테판 두샨은 동로마제국을 계승한 황제였다.
무하는 신성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의 영광이 슬라브인들의 손에 있었던 시대를 이 작품에서 넌지시 내비치고 있다.
크로믄네르지즈 출신의 얀 밀리츠
No.7. Milic of Kromeriz, 1916, Tempera on canvas, 620 X 405cm, 체코 프라하
크르모지치의 밀리치는 촬스 4세의 교회와 궁정에서 책임있는 위치를 찾이하고 있는 학식있는 신학자였다.면죄부와 성직자의 부도덕에을 혐오하고 도시의 빈민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교회의 위반에 대하여 설교하고자 사임하였다.
이 작품은 매음굴의 흔적과 거리에서 구경하는 군중들을 묘사하고 있다. 안식처가 들어서는 공사현장의 발판 앞부분에서 얀밀리츠가 거리의 여자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다.
여자들은 그의 말에 감화를 받아 몸에서 장신구를 떼고 참회한다. 천으로 입을 막고 앉아 있는 여자는 참회와 남모르게 베푸는 선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공생하는 삶 속에서 고통 받는 타인을 돕는 인간의 미덕을 표사했다. <슬라브 서사시>속에서 기린 얀 밀리츠의 명예는 사회적 지위가 아닌 그의 인간애로부터 왔다.
그룬발트 전투 이후
No. 8. After THe Battle of Grunewald,1923, Tempera on canvas, 405 X 620cm,체코 프라하
피비린내 나는 격전 이튿날 동이 틀 무렵을 묘사하고 있다. 교황과 프로이센 황제의 지지를 등에 업고 광대한 영토까지 소유하고 있던 독일기사단의 대병력은 결국 참패했고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2세는 격전지의 승리를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위해 행차했다.
그는 이 엄청난 광경에 말을 잃은 채 얼어붙은 듯 언덕위에 서 있다. 언덕 밑에는 독일기사단의 총지휘관 융긴겐이 가슴에 십자가를 올려놓은 채 숨이 끊어져 있고, 그 주변으로 시신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검은 십자가가 표시된 흰옷의 독일기 사단은 초토화되었지만,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연합군 병사들의 시신도 브와디스와프 2세의 눈에 들어아 슬픔이 차오른다. 흰 두건을 쓴 성직자는 전투의 선봉에 섰던 병사들을 비롯해 모든 전사자들에게 축복을 내린다.
폴란드와 발트 해 연안의 리투아니아는 이렇게 독일기사단의 세력을 저지시켜 슬라브의 영토을 확보했다. 이 작품은 슬라브 연합군의 승전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자성이자 평화적 공생에 대한 무하의 절절한 호소이다.
얀 후스의 베들레헴 예배당 설교
No.9. Master Jan Hus Preaching at the Bethlehem Chapel :
Truth Prevails, 1916, Tempera on canvas, 610 X 810cm, 체코 프라하
무하는 이 작품에서 후스가 일반 대중이 알아듣기 쉽도록 모국어인 체코어로 설교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곳으로 스며든 빛은 체코 민족을 위한 희망과 진리처럼 예배당을 환하게 비춰 주고 있다. 당시 프라하의 베들레헴 예배당은 백성에게 체코어로 설교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다양한 계층 사람들이 후스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연단 밑에서는 학생들이 경청하며 필기를 하고 있다. 왼쪽 예배당 벽 근처에 모자를 쓰고 흰 옷을 입은 사람은 후스주의 전쟁에서 수훈을 세운 얀 지슈카 장군이다. 천개(天蓋) 밑에서 조피에 왕비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후스는 왕비의 고해를 들어 주는 성직자였고, 그녀는 후스를 대신해 남편 바쯜라프4세에게 의견을 피력해 주었다. 바쯜라프 4세는 후스의 사상을 초기에는 지지했지만,1412년에 면죄부를 공식적으로 옹호하면서 후스와는 사이가 멀어졌다.
오른쪽 성수반 곁에서 두건을 쓰고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는 인물은 후스의 설교 내용을 파악하려는 가톨릭 교단의 밀사이다.
크르지슈키에서의 집회
No.10. The Meeting at Krizky , 1916, Tempera on canvas, 620 X 405cm, 체코 프라하
후스주의 전쟁 초기를 모티프로 하는 이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후스의 영향을 받은 이종배찬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종배찬을 지지하던 설교자 바쯜라프 코란다(Vaclav Koranda,?-1453)가 후스가 죽은 후 보헤미아 왕국 내 종교개혁가들의 선봉에 섰다.
그림 오른쪽에 보이는 코란다는 오두막집 위에 임시로 만든 발판을 딛고 서 있다. 실지로 1419년 9월30일에 북보헤미아의 크르지슈키(Krizky) 마을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그가 후스주의자들에게 설교했던 장면이 표사되어 있다.
그는 후스주의 신앙을 지키려면 무장도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킨다. 게다가 당시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무장을 하고 왔다.
비트코프에서의 전투 이후
No.11. After The Battle of Vitkov, 1916, Tempera on canvas, 405 X480cm, 체코 프라하
이 작품은 지슈카 장군이 혁혁한 승리를 거둔 후에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비트코프에서 내려온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야외 제단 옆에 후스주의 성직자가 미사용 빵을 들고 있고 다른 성직자들은 신실한 복종과 감사의 기도를 하며 땅에 엎드려 잇다.
승전을 거둔 이들은 함께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린다. 제단 뒤에 한 남자가 앉아서 기도하는 이들을 위해 오르간으로 성가를 연주하고 있다. 왼쪽 아래의 젊은 전사는 다리에 난 상처를 동여 매고 있고, 강인해 보이는 아낙이 새로운 세대의 상징인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왼쪽 뒤편으로는 햇살이 비치는 포르지츠 성문이 성곽과 함께 보이고, 오른쪽 뒤에는 비트코프 언덕의 윤곽이 드러나 있다 붉은색 망토를 걸친 지슈카 장군 발 밑에는 전리품들이 놓여 있다.
신의 가호를 받은 전사들이 거둔 이 기적적인 승리에 감격해 지슈카 장군은 큰 고마움을 표한다.
비트코프는 지슈카 장군의 이름을 따서 1877년에 지슈코프(Zizkovfh) 명칭이 바뀌었고, 오늘날 이 언덕에는 얀 지슈카 장군의 기마상이 서 있다.
페르트 헬치쯔키
No.12. Petr of Chelcice, 1918,Tempera on canvas, 405 X 620cm, 체코 프라하
초토화되어 불타오르는 도시에 두터운 연기 기둥이 피어 오른다. 이곳 사람들은 우선 가까운 곳으로 피신하여 죽은 자들과 부상자들을 연못가에 내려놓는다. 그림 중앙 뒤편에 도피 행렬이 보이고, 그림 왼편 아래쪽에는 바구니에 접시 몇 개만 챙겨 가까스로 들고 나온 소녀가 울고 있으며, 옆의 여자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에 통곡하고 있다.
오른쪽의 어린아이는 오싹했던 광경에 힘들어하며 혈육의 품에 매달려 있다. 불타는 삶의 터전을 망연자실해서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싹튼다. 이 그림의 중앙에 헬치쯔키의 모숩이 있다.
우분에 차서 주먹을 쥔 채 으름장을 놓는 사내를 붙들고 헬치쯔키는 용서의 힘에 대해 말한다.
“분노에 휘둘리지 마시게나. 악을 악으로 되갚아서는 아니 되네. 마음에서 악을 내려놓으면 악은 스스로 사라진다네.”
포데브라디 출신의 이르지
No.13. The Hussite King Jiri z Podebrad, 1923, Tempera on canvas, 405 X 480cm,체코 프라하
그림에서 보이듯 교황의 서신에 대한 이르지 왕의 반응은 매우 즉각적이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넘어져 나뒹군다. 이르지 왕은 후스주의를 단념하거나 백성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교황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왕이 의자를 권하지도 않아 교황의 특사들은 서 있다.
지난번 보헤미아 왕국의 특사들도 로마에서 자리에 앉으라는 권유도 못 받고 교황 앞에 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교황의 특사들은 이르지 왕의 서슬 퍼런 답변에 새파랗게 질렸던 반면, 보헤미아 왕국의 귀족들은 의기양양하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모자를 쓴 청년은 로마ROMA라는 제목의 책을 덮어 버렸는데, 이로써 교황과 이르지 왕 사이의 모든 논의는 끝났음을 상징한다.
미쿨라슈 즈린스키가 투르크 병사들에 항전한 시게트 요새 방어
No.14. The Depence of Sziget by Nikola Zrinski, 1914,
Tempera on canvas, 610 X 810cm,체코프라하
그림은 투르크 병사들이 이미 함락시킨 도시 시게트 요새 방어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즈린스키는 잔존한 병사들에게 열화와 같은 고함을 쏟아내며 사기를 돋운다.
병사들이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 성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다.
사력을 다하고 있는 병사들은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움직이도록 모든 무거운 장비들은 아예 내려놓았다.
성문 건너편 연기 자욱한 탑 안에 있는 대포는 파죽지세의 투르크 병사들을 지옥의 화력으로 맞이한다.
적군에게 이 도시를 결코 내어 줄 수 없기에 병사들은 죽음을 불사하며 방어하고 있고, 부녀자들까지 전투에 뛰어든 가운데 즈린스키의 아내가 불 붙인 송진 주머니를 화약고로 힘껏 던져 넣는다.
다른 여자들도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그녀에게 합세한다.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항전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신앙과 영토 수호에 목숨을 바친 슬라브 민족의 기백을 되새긴 장면이다.
요새 폭발을 표현하며 그림을 세로로 나누고 있는 검은 연기 기둥은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간 생명이 치르는 고귀한 희생을 상징한다.
이반치쩨에 있는 형제파 교단 학교
No.15. The Printing of The Baible of Krilice in Ivancice, 1914,
Tempera on canvas, 610 X 810cm, 1914년, 체코프라하
이 작품에서 무하는 도시 성곽과 성당 탑이 있는 자신의 고향 이반치쩨를 유럽 종교사의 한 장으로 묘사한다.
이 그림은 형제파 교단 학교의 야외수업에 학교의 설립자가 방문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는 오른쪽 차양 밑에 앉아 새로운 성서 인쇄본을 훑어보고 있다.
왼쪽에는 재미있게도 젊은 시절 무하의 얼굴을 쏙 빼닮은 청년이 앞 못 보는 사람에게 성서를 읽어 주고 있다. 해가 비치는 가을의 정경은 중세 가톨릭의 부패에 저항하고 종교개혁을 부르짖던 ‘후스주의 전쟁(1419-1434)’이라는 격동의 세월이후에 도래한 신앙적 결실의 시간이다.
교회 탑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새 떼는 앞으로도 기나긴 여정이 형제파 신도들에게 남겨져 있음을 상징한다.
얀 아모스 코멘스키
No.16. Jan Amos Komensky, 1918, Tempera on canvas, 405 X 620cm, 체코프라하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를 통해 코멘스키가 망향의 회한에 젖은 모습을 그렸다. 그림 속 노년의 코멘스키는 더 나이 들고 병이 깊어지기 전에 저녁마다 해변에 나가 멀리 떨어진 고국을 추억했다. 그림 왼편에는 병약해져 가는 코멘스키를 향한 루이스드 기어의 절망의 제스처, 그리고 코멘스키의 아내 야나의 회한 섞인 비통함이 보인다.
귀향의 꿈은 모래사장 위의 등불처럼 사그라든다. 코멘스키 스스로도 고국의 상황은 자유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암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오랜 기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가족과 주치의가 지켜보는 가운데 167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림 속 저 멀리에는 코멘스키가 영면하고 있는 나르덴(Naarden) 실루엣이 어슴푸레 보인다. 코멘스키의 망향의 애환은 바다 너머 어딘가의 이상향을 애타게 그렸던 것일까?
아토스 산
No.17. The Hony Mount Athos, 1926. Tempera on canvas. 체코 프라하
이 그림은 아토스 산 성모 마리아 사원의 내부이다. 수많은 촛불이 밝혀진 사원 속으로 햇살의 광채가 스며든다.
성화 벽 앞에 선 정교회 성직자가 성스러운 유품들에 경의를 표하는 순례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림 왼쪽 하단에는 한 젊은이가 노쇠한 순례자를 부축해 나서고 있다.
둥근 천장에는 스라브 수호성인의 모자이크가 보인다. 성모 마리아 모자이크 아래에는 숭고한 지혜를 지녔다는 지품천사들이 스라브 정교회 수도원들의 모형을 들고 빛의 광채 속에 떠 있다.
중앙에 보이는 두 수호성인은 순결과 신앙을 상징한다. 스라브 문화와 신앙에 빛이 되어 왔던 비잔틴의 성지 아토스 산을 묘사한 이 작품 속에서 무하는 슬라브 민족들 간의 공통분모를 엄숙하게 구현해 냈다.
슬라브 보리수나무 아래서 한 오믈라디나의 맹세
No.18. The Oath of Omlandina under The Slavic Linden Tree,1926~1928,
Tempera on canvas, 405 X 480cm, 체코 프라하
이 작품에서 무하는 체코 민족의 자유와 슬라브 민족들의 결속을 다지는 의지를 표현한다.
그림에는 거대하고 신성한 슬라브 보리수나무가 등장하는데, 과거로부터 보헤미아·모라비아·실레지아 사람들은 결혼식이나 기념할 일이 있을 때 보리수나무를 심는 풍습이 있었다. 보리수나무 아래서 설교를 하거나 마을회의를 열기도 했다.
보리수나무가 체코 민족의 국목國木이 된 것은 1848년6월에 슬라브 민족 사절단들이 프라하에 모여 개최했던 전 슬라브 회의+에서였다. 독일을 상징하는 떡갈나무에 대응되는 보리수나무는 슬라브 민족의 상징이다.
1861년 러시아 농노해방
No.19. The Abolition of Serfdom in Russia, 1914~1915.
Tempera on canvas, 610 X 810cm, 1914-1915년, 체코 프라하
이 작품에는 또 다른 운명의 굴레를 쓴 이들을 향한 무하의 애잔한 휴머니즘이 표현되어 있다.
이그림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사원 앞 2월의 싸늘한 오전을 포착해 그리 것이다.
크렘린 궁의 우뚝 솟은 탑과 둥근 연단이 보인다.
이곳에서 러시아 차르의 특별 공표인 농노해방을 전달한 후 차르의 관료들과 귀족들이 떠난다.
광장에서는 시골사람과 도시사람이 함께하며 새로이 주어진 자유와 만난다.
그들은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가능성에 기뻐하고 다른 이들은 이제 어떡해야 할지 모르고 있기도 하다.
자유를 상징하는 오전의 첫 햇살이 성 바실리 사원의 탑들 위에 무겁게 내려앉은 안개를 서서히 뚫고 나온다.
슬라브 민족의 역사 찬미
No. 20. The Apotheosis of the Slavs, Slavs Humanity,
Tempera on canvas, 480 X 405cm, 1926-28년, 체코 프라하
이 그림은 <슬라브 서사시>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여기에서 무하는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요약한 초시간적 연합을 네 가지 상징적인 색으로 표현했다.
먼저 푸른색은 신비로운 고대를 표현하고 본향의 스라브인들을 연상시킨다. 검은색은 억압의 시대이다. 프랑크족과 투르크족의 공격, 빌라 호라 전투 패배 이후 거의 300년에 달하도록 지속된 암흑의 시대를 나타낸다.
붉은색은 보헤미아 왕국위 프르제미슬 왕조와 황제 카렐4세의 영광, 얀 후스의 종교개혁사상, 포뎨브라디 출신의 왕 이르지의 외교적 결단력, 오스트리아-형가리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한다.
그림의 중앙은 기쁨과 자유를 상징하는 황색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붕괴 이후 여러 슬라브 민족이 자유를 얻었다.
전쟁에서 귀환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의용군,이탈리아,프랑스,영국,세르비아 병사들을 사람들이 보리수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영한다. 다채로운 슬라브 의상을 입은 여자들이 화환을 엮고 독립을 기념하는 커다란 깃발을 준비하고 있다. 드디어 자유를 맞이하게 된 감격에 벅차 하늘을 향해 고마움을 표하는 노인의 모습도 보인다.
뒤에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국기가 휘날리고 여러 슬라브 민족의 대표자들이 서 잇다. 가장 크게 표현된 것은 승리와 화합의 화환을 손에 들고 있는 슬라브 젊은이의 모습이다. 무지개 아래에서는 그리스도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출처] 알폰스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이야기|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