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19
3월4일[사순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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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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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ObbUuzuPAI (임시백 치백요셉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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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사람들!>
여러분들 오늘 예수님의 당부 말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도 해도 너무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오 복음 5장 44~45절)
생각해보십시오. 내 인생을 완전히 망쳐놓은 사람, 우리 가정을 풍비박산 낸 사람, 사랑하는 내 가족을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 눈에 피눈물 나게 만든 사람,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가 안 되는 그 사람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원수 사랑, 말은 쉬운데, 정말 어려운 숙제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불가능한 과제라고 여겨집니다.
요 며칠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이해가 불가능한 104주년 삼일절 기념사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성의 없음은 물론이고, 그 내용은 설마 하는 탄식과 함께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고, 경악을 금치 못할 표현들로 가득했습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아랫사람을 극도로 신임하는 것인지? 내용을 읽다 보니, 정말이지 일본 총리의 기념사라고 해도 무방한 내용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일본 내 극우파, 국내 친일파가 극찬하고 있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조선에 대한 일제 강점의 책임이 야욕과 사심으로 가득 찼던 일본제국주의에 있지 않고, 세계사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우리에게 있었다는 표현은, 일제 강점과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그릇된 식민사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저쪽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받은 상처와 손해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도 하지 않고 배상도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일본을 향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 운운하는 것은, 그들 앞에 먼저 고개를 조아리는 굴종 외교, 종속 외교를 시작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평화롭게 지내던 우리 집으로 옆집 사람들이 담장을 허물고 넘어왔습니다. 집안의 기둥인 듬직한 아들은 꽁꽁 포박해 끌고가 죽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딸도 끌고가 몹쓸 짓을 하고 팔아넘겼습니다. 집문서 땅문서를 비롯해 쓸만한 가재도구는 다 쓸어갔습니다. 성도 이름도 자기들 것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그토록 끔찍한 만행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는데, 그 피해 가정의 아버지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잘못해서,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렇게 된 일입니다. 이미 흘러간 물입니다. 지난 일 자꾸 되새김질해봐야 좋은 것 하나 없습니다. 그 집 사람들은 이제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지난 일 다 잊고 우애 깊은 형제로 지냅시다.”
원수 사랑,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만행에 대한 진지한 자기 성찰, 진정성 있는 사과, 다시는 동일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 그에 따른 정확한 손해 배상!
아마도 우리는 지상 생활 내내 근원적 결핍, 근본적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달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원수 사랑, 진정한 용서는 힘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존재 자체로 불완전하니까요.
언젠가 우리가 지상 여정을 모두 마치고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원수 사랑이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그토록 어려워 보이는 원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처럼 완전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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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WeFty0j4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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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기 전에 이것부터 연습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실천법으로 이렇게 하시는 하느님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힘이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곧 죄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법입니다. 원수라 여기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을 내가 심판하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려면 심판을 멈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3-4.8-9)
제가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차별의 예로는 L.A. 흑인 폭동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 흑인 학생이 도둑이고 그가 총을 꺼낸다고 여겨서 총을 쏴서 살해한 사건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차별한다면 나도 분명 차별 받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려면 먼저 내가 차별 받지 않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 ‘크래쉬’(2004)는 수많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 “어떻게 해야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야심한 밤, 도로 한 복판에서 울리는 총성. 젊은 백인 경찰관 핸슨이 한 흑인 청년을 쏴 죽입니다. 핸슨이 흑인 소년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 흑인 청년이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자 위협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총으로 그 청년을 쏴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 흑인 청년은 둘 사이에 꽤나 재미난 공통점을 공유하려던 것뿐이었습니다. 흑인 청년이 주머니에서 꺼내려던 것은 단지 작은 성 크리스토포로스 조각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흑인 청년을 쏴 죽인 이 ‘핸슨 결찰관’은 불과 36시간 전의 대낮에는 다소 의외의 모습을 보입니다. 선배 경찰관인 라이언의 인종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상관에게 근무 파트너를 바꿔 달라고 청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을 극도로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차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차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본인이 차별과 편견의 굴레에 살고 있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종차별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에게 라이언 경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아? 너는 네가 누구인지 몰라!”
아마 핸슨이 불과 이틀도 안 되어 차별의 굴레 안에서 살인을 저지를 것을 알았던 것일까요? 이 영화에서는 아랍인이라고 인종차별을 받은 한 사람이 멕시코인 열쇠 수리공을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차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려면 자신도 차별 받지 않는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차별 받는다고 느끼면 그건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인정 받은 사람은 예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천대 받던 시절, 수학 천재 라고 불리던 흑인 소녀가 수많은 차별 속에서 결국 NASA에서 인정받기 까지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6학년인 나이에 대학에서 자신의 뛰어난 수학 실력으로 교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 인정받음으로 견디기 힘든 인종차별을 견뎌내며 위대한 업적을 이뤄냅니다. 그때 교수가 백묵을 주며 문제를 풀어 달라는 청을 받은 것처럼, 나사에서도 그를 지지해주는 백인 상관으로부터 백묵을 받아 정부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문제를 풀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차별 받지 않으셨을까요? 성모님은 차별 받지 않으셨을까요?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차별 받는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인정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당신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과 원수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차별 받지 않는데 누구를 차별하겠습니까? 차별하지 않고 차별 받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이미 죽었고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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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신학교에는 전설과 같은 교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신약학을 가르치셨던 신부님의 성함은 ‘박상래’ 신부님입니다. 학생들은 신부님의 별명을 ‘박살래’로 부르곤 했습니다. 신부님은 신약성서를 아주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신부님은 성서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론도 가르쳤는데 ‘예수’에 대한 책도 번역하였습니다. 신부님의 가르침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책은 젊은 신학생들에게는 죽비와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이끄는 모세와 같았습니다. 광야에서 황금 소를 만들어서 숭배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엄중하게 꾸짖었던 모세와 같았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복음’에 대한 신부님의 강의가 선명하게 생각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나라였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표징이었습니다.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는 신학생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라틴어를 가르쳤던 허창덕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말로만 엄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행동(?)으로 엄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L’과 ‘R’의 발음을 잘 구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수업시간에 발음을 시키셨습니다. 발음 구별을 잘못하면 분필이 날라 오기도 했습니다. 발음 구별을 잘 하면 잠시 웃기도 하였습니다. 사제가 될 사람들이 발음 구별도 못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북간도에서 사목을 하였습니다. 해방이 되어 북한으로 갔다가 공산주의를 피해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신부님께서 1년에 한 번 ‘순한 양’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의 생일에 신학생들은 ‘선구자’를 불러드렸습니다. 그때는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던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일생의 숙원 과제였던 ‘라틴어 사전’을 만드셨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젊은 신학생들도 신부님 앞에서는 모두 어린양이 되었습니다. 수업시간에 해 보라고 하셨던 ‘랄렐릴롤루’가 문뜩 생각납니다.
군대에서 흔히 듣던 말이 있습니다. “훈련 중에 흘린 땀 한 방울은 전투에서 흘리는 피 한 방울과 같다.” 훈련을 충실하게 받은 군인들은 실전에서 부상당하거나 사망할 확률이 그만큼 낮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상급부대였습니다. 저도 주로 행정업무를 보았습니다. 사격훈련도 거의 하지 않았고, 행군도 거의 없었습니다. 9시에 사무실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해서 내무반으로 돌아오는 일과였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대통령이 부대를 방문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1달 전부터 전방에서 군인들이 와서 외곽 경계근무를 하였습니다. 가끔씩 사병식당에서 전방에서 온 군인들을 보았습니다. 발걸음도, 행동도, 눈빛도 행정업무를 하는 저희 동료들과는 달랐습니다. 배식과정에서 약간의 시비가 있었지만 한마디로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훈련에서 땀을 많이 흘렸던 군인들이었습니다. 전방에서 온 군인들에 비하면 우리는 소위 ‘당나라’ 군인들이었습니다.
신앙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물에 물 타고, 술에 술 타듯 대충 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결단이고, 행동이며 실천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박해와 순교는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보상 받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이 신앙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기도 했고, 노비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이 신앙 때문에 만 명이 넘는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선조들이 걸어온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충실하게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후손들이 우리들의 신앙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제2의 그리스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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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숭이, 바나나, 판다 곰’을 보여주면서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을 짝지어 보라고 할 때, 동양인과 서양인의 판단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동양인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인은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양인은 ‘원숭이와 판다 곰’을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와 판다 곰은 같은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인은 종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동양인과 서양인은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인과 서양인은 각기 다른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동양인은 순환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계절이 가고 오듯이, 윤회와 업보를 생각하며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서양인은 직선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동양인 중에서도 한국인은 ‘우리’라는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간직하였습니다. 우리라는 문화와 전통은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의병들이 외부의 적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경제위기로 국가의 부도 사태가 있을 때는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대한민국 팀을 응원하였습니다. 저도 광화문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팀이 좋은 경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태안 바다에 유조선의 침몰로 기름 유출이 있을 때는 많은 사람이 유출된 기름을 제거하였습니다. 우리의 바다가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의 팬데믹에서도 ‘거리두기, 손 씻기, 마스크 쓰기’를 잘 지켰습니다. 우리 모두가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세대인 요즘의 젊은이는 ‘우리’라는 관계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여행이 자유롭고, 인터넷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소통하면서 동양인과 서양인 그리고 한국인의 생각도 석물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할 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 위에 높이 세우시고,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이 가야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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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43-48: 하느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게 되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원수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그를 미워하기만 해도, 우리는 그에 대해서보다 우리의 영에 더 큰 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미움이 우리를 더 휘저어 놓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주님의 법은 모든 법을 뛰어넘는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기 때문이다.(루카 18,27 참조)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신다. 이것은 원수에 대한 최고의 정점이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그러므로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아드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킬 때만이 가능하다. 이 자녀들은 아드님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될 것이라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45절) 아드님을 통해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해와 비는 바로 당신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을 따라 당신의 자녀가 되고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절) 친구를 사랑하는 삶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한다. 이때 그는 큰 보물을 지닌 사람이 된다. 자기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를 사랑하며 악을 피하고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의로움을 지니라고,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 하신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써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우리가 아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완전한 사랑이라는 선행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이런 사랑은 믿지 않는 이들과 죄인들 사이에서도 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복음적인 사랑의 법으로 인간적 사랑을 넘어서길 바라신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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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미 레위기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9,18)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이웃”은 ‘동포’의 뜻이 강합니다. 같은 민족 사람들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표현이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새로운 차원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에 밝힌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라는 말씀이 구약 성경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른 민족들에 대한 언급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신명 23,3-6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도록 가르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새로운 의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동포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 사람들도 이웃에 포함됩니다. 그토록 강한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나에게 잘해 주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도 이웃에 포함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태도를 넘어서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는 분명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착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 되는 데에 그치지 말고 그것을 넘어 하느님을 닮도록, 그분의 완전하심을 닮도록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완전함은 세상이 말하는 완전함과는 다릅니다. 그 기준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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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44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도 계속해서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는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에는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니라, 나아가서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랑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또 오늘, 대체 누가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까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5장 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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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44절)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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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주님의 규정과 법규를 따르고 실천하면 하느님께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상선벌악의 가르침은, 구약 시대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살겠노라고 결심하고 살아가려면 많은 희생이 요구되지요. 나만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모습에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주님의 계명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보다, 악을 일삼는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이 세상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 나라가 자비가 넘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악인과 선인을 동등하게 대우해 주십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당신의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비를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심판으로 가득하고 하느님의 자비가 없는 곳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선인에게만 해를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모습에 우리는 속상한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그러나 공정과 정의는 우리가 훗날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은 공정과 정의보다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큰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의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은 지금 이곳에서 주님의 계명과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시작됩니다. 그 길이 지금 우리의 눈에는 부당하고, 억울하게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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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그렇게>
마태오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늘 그렇게>
늘 그렇게
오로지 사랑하고
늘 그렇게
오로지 진실하고
늘 그렇게
오로지 올바르고
늘 그렇게
오로지 따뜻하고
늘 그렇게
오로지 부드럽고
늘 그렇게
오로지 깨끗하고
늘 그렇게
오로지 아름답고
늘 그렇게
오로지 어질고
늘 그렇게
오로지 착하고
더디더라도 쉼 없이
완전하게 더욱 완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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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만이 영원하리라>
소공동체 모임의 말씀 나누기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한 형제님이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가 너무도 힘들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면 자기도 모르게 치유를 받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분도 그에 공감한다며 “사랑이 중요하다. 사랑을 담아 그를 위해 기도하면 그도 좋아지고 나도 분명히 좋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미운 사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처방을 내렸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 5,44-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참된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내신 사랑,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분명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이 그를 한순간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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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들은 의사만큼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질병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모든 직업은 고귀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의 노고가 제일 대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밖에도 우리의 일생을 지켜 준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택배 기사, 버스 운전사, 음식 배달원, 요양 보호사 등등…. 이들도 코로나의 위협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켜 준 고마운 분들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마움을 생각하기보다 막 부려 먹는 종으로 생각하는지 여기저기서 갑질의 모습이 들려왔고, 실제로 흔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을 지켜 주는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이 없다면 자기 삶을 지금처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병자는 죄의 결과로 병을 얻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으로 낙인을 찍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역시 하느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로 어루만져주듯 하나하나 손을 대 치유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 상관없이 모두가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당시에도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이 있기는 했지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을 해야 하지만, 원수는 미워했어야 했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은 늘 약자였습니다. 주변 국가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만든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에 실려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글귀. '똑같이 보복한다'라는 의미의 동태복수법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따르는 이라면 더 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한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완전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하느님께서 소중한 자녀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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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의 사랑 깜냥>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완전한 자 되려면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시고,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느님처럼 되라 하십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이렇게 돼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율법에서 저렇게 얘기하지만,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니 제자 되는 것을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도전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깜냥’이라는 순우리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가늠해, 해낼 만한 능력’이라는 뜻이고, ‘깜냥깜냥’이라는 부사는 자신의 힘을 다한다는 뜻이며, 그래서 보통 ‘너는 그것을 해낼 깜냥이 안 된다.’라는 식으로 쓰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실 때 그럴 깜냥도 안 되는 제자들과 우리에게 원수 사랑을 말씀하셨을까요?
바꿔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 깜냥을 가늠할 능력이 없으셔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랑 깜냥을 모르고 하신 말씀일까요?
당장은 안 됩니다. 당장은 깜냥이 안 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생각하신 겁니다.
아니, 사랑할 거라고 우리를 믿어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그럴 사람이 못 된다고 미리 접습니다.
주님께서는 멀리 보고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인데 우리는 당장의 나를 보고 나를 믿지 못하고 나의 미래까지 접어버립니다.
원수 사랑하는 것은, 지금 어려운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믿어주시는 주님의 믿음에 배신하지 말고 우리도 자신을 믿고, 한번 도전해보라는 주님의 격려에 힘을 얻어 사랑의 의지를 세우고, 그러나 시작은 작은 원수부터, 차츰 큰 원수까지 사랑하면 됩니다.
욕심은 이런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 욕심을 가진다면 이런 욕심을 가져야지 허접스러운 욕심은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돈을 욕심내지 말고 사랑을 욕심내야 한다는 말이고, 사랑을 욕심내더라도 만만한 사랑이 아니라 원수 사랑을 욕심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깜냥을 믿어주시는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깜냥깜냥 원수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오늘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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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과제>
-성인이 되십시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 119,1)
어제 마태복음 5장은 산상설교중 첫째 대당명제에 해당됐다면 오늘은 마지막 여섯째 대당명제로 소주제 역시 “원수를 사랑하여라.” 아주 선명합니다. 산상설교의 결론이자 절정부분처럼 생각되는 마지막 다음 구절입니다. 예수님 말씀안에 하느님의 소망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말그대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하느님의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그만큼 당신 자녀들인 우리에 대한 당신의 믿음, 희망, 사랑을 반영합니다. 우리만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또한 우리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기대에 부응하여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일부 영적 엘리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하여 저는 지체없이 강론 제목을 “평생과제-성인이 되십시오.”로 정했습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참으로 주님을 닮은 고유한 참나의 성인입니다. 말그대로 평생과정이요 평생과제입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성인이 되기에 좋은 환경을 구비한 자들이 우리 수도자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인이 되려는 경쟁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도원에 들어온 목적도 여기 있을 것입니다.
“수도자는 무엇을 ‘하기 위해’(to do) 수도원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to be)서다” 라는 말마디가 이를 입증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성인이 되는 것은 평생과정임을 깨닫습니다.제가 요즘 뒤늦게 탐구하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옛 한국의 사표가 될 위인들이요 선비들입니다. 천주교식으로 말해 성인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분들입니다. 공통적인 점은 참으로 치열히 참사람 성인이 되기 위해 평생 분투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500년 이상된 왕조는 한국밖에 없다고 합니다. 중국도 200년이상 된 왕조가 없다 하는데 한국은 삼국이나 고려나 조선이, 다 500년이상입니다. 바로 정신적 중심 가치인 선비문화가 건재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계된 책을 주문해도 한참만에 받아보기에 까닭을 수도형제가 알려 줬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주로 보는 책은 자기계발이나 인간관계, 사업상에 관한 대부분 실용적인 것이라, 수사님 주문한 인물 평전에 대한 책을 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재고를 찾아 보내다 보니 늦어진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대략 50년전, 1970년대 제가 초등학교 교사시절,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열변을 토하면 당시 아이들은 통했는데 아마 지금 아이들이나 젊은 부모들은 공감하지도 탐탁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당시 아이들이나 부모들은 참 정신적으로도 건강했고 순수했고 소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는 물론 믿는 우리들에게는 평생과제는 단 하나 주님을 닮은 참사람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나 참행복도 이런 참나의 성인이 되는데 있을 것입니다. 인생 허무나 무지에 대한 유일한 해법도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면담성사시 성인이, 성녀가 되라고 많이 강조합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부터 다시 새롭게 노력하는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요 실천입니다. 매일 성인이 되려는 선택과 더불어 치열한 영적 훈련을 요구합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는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합니다. 강조되는 말마디 “오늘”이 무려 3회 나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 명령하십니다. 바로 그 구체적 처방을 오늘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우리 수도자들이 성인이 되기를 바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우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라.” 이래서 끊임없이 보고 배워 성인이 되라 우리 천주교회는 무수한 성인들이란 살아 있는 보물을 지니고 있고, 신자마다 성인의 세례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완전한 성인은 완벽한 성인이 아니라 온전한 전인적 성인을 뜻합니다. 저절로가 아닌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치열한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하는 사랑입니다. 둥글둥글 둥근 마음, 둥근 사랑, 둥근 삶을 뜻하는 온전한 사랑, 원만圓滿한 사랑, 원숙圓熟한 사랑, 집착이 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과 빛을 주는 사랑, 차별이 없는 공평무사한, 대자대비하신 주님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바로 다음처럼 묘사되는 하느님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싫어하는 사람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과 배려의 아가페 사랑, 참으로 성숙한 온전한 사랑입니다. 이래야 원수도 사랑할 수 있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유유상종, 끼리끼리의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하고 환대하라니 참으로 어려운 숙제이나 주님은 우리에게 치열히, 가열차게 분발하여 노력할 수 있는 열정과 사랑을 주십니다. 이런 아가페 사랑 역시 자발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이 거룩한 매일 미사은총이 성인이 되는 평생훈련, 평생과제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요,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2코린 6,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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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하느님의 보편사랑과 역설사랑!>
오늘 복음(마태 5,43-48)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기울지 않는 하느님의 보편사랑에 우리도 참여하라고 하십니다. 아니, 그 보편사랑을 뛰어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역설사랑에 참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실행할 수도 없을 것처럼 다가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힘든 역설사랑을 실행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지금 여기에서 살고, 죽음 저 너머에서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 5,46)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보편사랑'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은총의 비'를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는 그 은총을 받고, 또 못 받습니다. 내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편은총(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내가 '죄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만과 인색과 시기의 우산, 탐욕과 음욕과 분노와 게으름의 우산'을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치우치지 않는 '보편사랑'을, 그 사랑을 뛰어 넘는 역설사랑인 '원수사랑'을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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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Y06XBo-q11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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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
당부의 말씀이
우리의 안일한 삶을
흔들어 다시
일으킵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버림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십자가의
완전한 사랑입니다.
최선의 지혜는
온전한 사람
온전한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고
깨우쳐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보살피고
섬기는 사랑으로
우리를 바꾸어
주십니다.
관계를
살필 줄 아는
마음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마음이 하늘의
아버지
마음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은
우리가 깨끗한
믿음으로
완전하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각박하고
변덕스러운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부터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는
나 중심으로
살아온 습관을
바꾸어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것은
진실한 기도
온전한 사랑
완전하신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가슴을 때립니다.
마음을 닦는
사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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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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