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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 이제 세 번째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번 두 번째 이야기 끝에 제가 하느님이 창세기 4장에 하신 중요한 네 가지 물음을 찾아보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찾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6절에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입니다.
그리고 9절에 세 번째 질문이 나오죠.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마지막 10절에 네 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오늘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세 번째의 중요한 주제는 ‘물음과 답, 그리고 책임’입니다.
‘하느님이 물으시고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것인지’,
그다음 ‘내가 이 세상에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살아가야 하는지’가 오늘의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네 가지의 질문을 생각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
바로 카인과 아벨의 부모였던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이 하신 인류 최초의 질문이었습니다.
뭔지 아시죠? ‘네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했던 인류 최초의 질문은 네가 현재 어디 있느냐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분명히 이것은 장소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 겁니다.
현재의 상태를 얘기하는 것, 그것이 정답일 겁니다.
영국의 시인 엘리엇(T.S. Eliot)은 다음과 같이 인간에 대하여 재미나게 이야기했습니다.
‘동물은 참으로 상쾌한 친구들이다. 그들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아무런 비평도 하지 않는다.’
이 엘리엇이라는 시인으로서 인간의 내면을 굉장히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남에게 질문받기를 꺼리는가를 그는 잘 통찰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남에게 질문받기를 과히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을 받아도 답변할 수 없을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답변하기 쉬운 질문은 많습니다.
‘취미가 뭡니까?’, ‘지금 어떤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까?’, ‘자식이 몇이나 됩니까?’, ‘사시는 데가 어디지요?’
이 정도의 질문이라면 복잡한 사정이 없는 한 대답하기에 과히 고통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한 달 월급은 얼마를 받으십니까?’,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아마 이런 질문은 사람에 따라서는 이 근처에서부터 차츰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더 파고드는 질문이 되면 질문 자체에 고통을 느끼게 되죠.
누구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고통스러워 본 적 있으셨을 겁니다.
이렇게 우리끼리 서로 주고받는 질문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굉장히 대답하기 어렵고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질문 자체가 고통스러운 질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끼리 주고받은 질문, 사람에게서 받은 질문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받은 질문이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또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들의 주소나 취미, 자식 수와 같은, 사람들이 흔히 묻는 그런 질문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맞죠? 하느님의 질문 밑바닥에는 항상 먼저 의(義)가 깔려 있습니다.
의로움이 깔려 있다는 얘기입니다. 정의가 깔려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반드시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질문을 늘 하고 계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질문 ‘아담아,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묻는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질문임이 분명합니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는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네가 설 곳은 도대체 어디냐?’,
‘너는 무엇에 속해 있느냐?’ 이러한 영적인 질문이지요.
‘몇 번지에 서 있느냐’하는 장소를 묻는 건 아닐 겁니다.
사제인 저에게도 계속 이 질문을 하셨지요.
‘김 신부야,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정신 차려 베드로야, 넌 어디 있느냐?’
‘루시아야, 넌 어디 있느냐?’
‘너는 어디에 있느냐?’는 그 질문에 우리 믿는 자들이 대답해야 할 정답이 뭔지 압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물었을 때 하느님이 듣고 싶으신 정답은
‘항상 하느님 앞에 서 있습니다. 저는 나의 구세주 예수님에게 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라도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 같이 하느님을 피해 숨어 있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러면 창세기 4장에 카인에게 했던 그 네 가지 질문 중에서 카인은 몇 개 대답했습니까?
딱 하나, 세 가지는 대답을 못 했습니다.
‘왜 화를 내느냐?’, ‘왜 고개를 숙이고 있느냐?’,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이 세 가지 질문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과 동생에게 분노해서 살인한 것이기 때문에 ‘네가 무엇을 했느냐?’의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었죠.
한 가지는 대답했습니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는 이 세 번째 질문에만 카인은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말도 옳은 대답일 수가 없었습니다.
뭐라고 얘기합니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이 질문이야말로 카인에게는 하느님이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질문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카인은 진심으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질문이었던 겁니다.
카인는 이렇게 대답해야만 됐습니다.
‘죽을죄 지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동생을 죽였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카인은 모른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내가 내 동생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정말 소름 끼치는 대답을 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어째서 하느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일까요?
아마 그것은 대답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인간은 항상 거짓말하고 남에게 죄를 전가합니다.
똑바로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하지 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원죄를 진 아담, 하와, 카인의 모습이고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겁니다.
동생을 돌로 때려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모습도 소름 끼치지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냐라는 이 답은 정말 소름이 끼치는 인간의 입에서 나온 첫 번째 말일 겁니다.
동생은 형이 책임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제가 아주 오래전에 교도소 사목을 했습니다, 수인 사목이라 그러죠.
수인 사목을 하면서 많은 후원자와 수인들을 연결해 줬습니다.
거기에 죄수들의 대모라고 할 정도로 정말 열심히 한 자매님이었습니다.
자기 개인 돈을 써가면서 죄수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지극한 사랑을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사제인 저도
감명을 크게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같이 차를 타고 오다가 그 자매님에게 ‘자매님, 너무 열심히 하지 마세요.’ 했더니
그 자매님은 이런 말로 저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신부님, 일단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저의 책임입니다. 하느님이 저에게 맡기신 사람들이지요.
그렇기에 저는 아무 조건 없이 일할 뿐입니다.’
일단 알게 된 사람들은 자기 책임이라는 이 말, 하느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이라는 이 말.
저의 가슴에 얼마나 격렬하게 큰 울림으로 왔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단순히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그분의 삶 자체가 그 말을 보증하는 삶이었던 겁니다.
먼 훗날 그분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정말 많은 분이 오셨습니다.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도 수백 명이 밖에 서 있었죠.
어느 사제가 죽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지 않았을 겁니다.
성당 안에 들어오지 못한 분들 가운데 사람의 눈을 피하듯 울고 있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한눈에도 그들은 그늘진 사회에 살고 있었던 무리임을 알 수가 있었죠.
그 사람들을 보고 ‘아 저 사람들도 그분에게 사랑받은 친구들이었구나.’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뜨거워지게 했습니다.
확실히 그분이 일단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당신 책임 범위 내에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던 겁니다.
‘너의 동생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느님에게 질문을 받은 카인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됐을 겁니다. 해서도 안 되는 말입니다.
창세기에 이 구절을 읽고 있으면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제가 책임을 지는 사람들입니다’라는 그 자매님의 말이 칼처럼 꽃입니다.
신앙은 관계성이라고 그랬습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내 이웃과의 관계,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가 깨어져도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도 온전치 못합니다.
내가 내 자신도 사랑하고 내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제일 중요한 존재이지만,
그다음 단계로 사람과의 관계도 우리는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알게 된 사람들은 내 책임하에 있는 겁니다.
카인의 경우 동생 아벨을 죽인 직후에 하느님께서 물으셨죠.
그래서 더욱 완강하게 아벨과 무관계한 태도로 가장했을 겁니다.
하느님에게 ‘너의 동생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들은 도대체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동생’이라는 말을 바꿔서 말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를 상징하는 말일 겁니다.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 함께 자란 존재는 가장 친숙한 존재여야 됩니다.
가장 친숙해야 할 존재인 형제자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들은 참으로 책임지고 하느님에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느님은 먼저 하십니다.
이 질문은 ‘너는 어디에 있느냐?’ 그 질문에 이어서 당연히 나와야 할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의 형제자매는 어디에 서 있느냐?’ ‘너의 형제자매는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라는
의미가 담긴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형제들이 있으시지요? 자매들이 있으시지요? 몇 남매요? 다 하느님의 자식입니까?
하느님이 여러분에게 카인에게 했던 질문처럼 ‘네 언니, 네 오빠 어디 있느냐?’ 이 질문에 우리들이 대답을 못 한다면,
실제로 형제자매를 내가 죽이진 않았어도 좀 심하게 얘기한다면
영적으로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책임이 아주 큰 겁니다.
성서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 뜻은 뭡니까? 나 이외에는 모든 사람이 내 이웃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한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직장 사람들도, 모두 우리들의 형제자매인 겁니다.
신약 성서에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죠.
산중에서 강도를 만나 중상을 입은 행인을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불쌍히 여겨서 그를 구해서
자기 나귀에 태우고 마을의 여인숙까지 데려왔고,
또 정성껏 돌보고 주인에게 간호를 부탁하면서 방값과 약값을 모두 지불해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타국에서 오다가다 만난 사람도 우리에게는 이웃임을 그리스도는 그 비유를 통해서 아주 강하게 알려주고 계시죠.
‘너는 어디에 있느냐?’는 그 질문에 정답이 뭐라 그랬습니까?
‘저는 하느님 앞에 늘 서 있습니다. 저는 늘 주님 안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이 정답이라고 그랬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서 있는 것이 확정된 인간은 당연히 ‘너의 동생이 어디 있느냐, 너의 이웃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예, 제 동생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식구들 모두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책임지는 대답을 우리는 해야 하는 겁니다.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우리들은 영적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느님 앞에 올 곱게 서게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사제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주님 앞에 그래도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
저는 저에게 맡겨진 양들을 최선을 다해 돌봤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서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살았습니다.’라는
말을 저는 하느님 앞에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저에게 찾아오는 주님의 양들이 상처받고 괴롭고 힘들 때 그들을 치유시켜 주님 앞에 똑바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
저의 책임이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습니다.
저는 정말로 긴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을 알고 살았죠.
제가 싫어서 떠난 사람들을 잡을 수는 없지만 제 쪽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제가 밀어낸 사람은 없습니다.
카인은 하느님이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내 동생 지키는 사람입니까?’ 합니다.
만일에 사제 입에서 ‘내가 내 신자들 지키는 사람입니까? 왜 나한테 그런 말씀하십니까? 나는 이 성당 떠나면 그뿐입니다.’
한다면, 벌 받을 소리죠.
그것은 카인의 마음입니다.
‘네 형제들의 영원 구령을 위해 가족들에게 전교했느냐?’ 물으실 때 ‘그게 내가 해야 하는 겁니까?
자기들이 알아서 신앙생활 하든 말든 자기들이 선택해야죠. 내 형제들의 구원까지도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겁니까?’
이런 말을 한다면 벌 받을 소리죠.
우리는 유혹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카인의 후예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또 어떤 때는 믿음을 갖고 하느님에게 칭찬받았던 아벨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도 많지요.
악마는 어둠은 우리를 카인의 후손으로 자꾸 만들려고 합니다.
오늘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을 정리 해 봅니다.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에 정답은
‘저는 주님 앞에 늘 서 있습니다. 저는 주님입니다. 저는 주님에게 속해 있는 그런 영혼입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거고요.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것은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겁니다.
‘네,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형제들, 조만간에 주님 앞에 서게 하겠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 집안 성가정에 이르도록 애쓸 겁니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기쁜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무책임했던 거 용서하십시오.
이제 적극적으로 형제들에게 좋은 표 양 보이고 사랑받는 존재가 돼서 그들에게 주님 알려 그들 쪽에서 먼저
주님께로 인도해 달라는 말이 나오게 저도 삶을 변화시키면서 감동을 주겠습니다.
제 형제들 제가 책임지렵니다. 주님 안심하십시오.’
이런 말씀을 드리는 회개한 카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강의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좋은 표 양 보이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게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