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출장중(?) 03 by 에란디스
일본 측 사람들과의 저녁식사는 그다지 K의 뇌리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라면을 먹었는지 돈까스를 먹었는지도 관심이 없었고
(실제로는 꽤 비싼 일본식 정식 집에서 먹었다)
이어진 술자리에서도 마시는 둥 마는 둥.
아무것도 모르는 현지인들은 그저 여행으로 좀 지친 것 뿐이라고,
매우 고맙게도 알아서 착각해 주었다.
덕택에 원래 예정보다 좀 빠르게 예약된 숙소에서 쉴 수 있게 된 K.
비극은 그가 등목 수준의 샤워만을 마치고 핸드폰을 켠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B가,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분명 오기 전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좋으니 자신의 전화만은 반드시 받으라고 해 뒀는데.
욕실에서 샤워중일지라도, 설령 휴대폰이 습기로 흠뻑 적셔지는 한이 있어도 받으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거늘.
어찌하여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냐, B. 응? 응? 으응―?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외출 한 건가?
하지만 벌써 저녁 8시인걸. 오늘 바깥에서의 스케줄은 오후 5시까지 아니었던가.
(K는 떠나오기 전에 B의 일주일 스케줄표를 반강제로 요구했다)
그럼 잠시 집 앞 마트에 가면서 휴대폰을 놓고 갔나?
하지만 내가 어디 갈 때 놓고 다니지 말라고 목걸이형 휴대폰 줄까지 사 줬는데?
K가 두려워하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한 생각이, 한꺼번에 바닥에 들이부은 탁구공처럼
마구 튀어 오르려는 조짐을 보였다.
K는 거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눈물겨운 자주적 노력은 별로 소용이 없었다.
결국 심호흡을 통한 심신안정은 그닥 효과가 없었고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큰일나겠다는 자각이 든 K는
스스로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방 안에 놓여 있던 텔레비전을 켰다.
[――싫어요!! 이러지 말아요!!]
[흐흐… 자기도 좋으면서 뭘 그래. 응? 남편도 없겠다, 좋은 기회잖아.]
……오 마이 갓. 이 무슨 작가의 농간(…)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TV옆 작은 협탁 위에 놓여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고 ON 버튼을 누르는 순간 K의 눈앞에 펼쳐진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외국의 only 성인 시청 등급의 드라마였다.
그것도 대단~히, 불륜~스러운 내용의 클라이맥스 부분.
K는 리모컨을 한 손에 쥔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특히 양쪽 귀에서 무섭게 메아리치는 내용은 ‘남편도 없겠다, 남편도 없겠다, 남편도……’
약 10여초 뒤 TV를 끄고 침대 위에 리모컨을 내팽개친 K는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고 맹렬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귀에 익은 B의 컬러링 음악이 악마의 웃음소리 비슷하게 들리는 건 어째서일까.
제발 받아라, 제발 받아. 내가 다 잘못했다. 지금까지 잘해주지 못했던 거 모두 용서를 빌게. 제발 전화만 받아줘, 제발…
[여보세요? 자기, 무슨 전화를 그렇게 많이 했……]
“거기 어디야, 너어어어어――――!!!!!”
순간, 분노에 가득 찬 K의 고음에 공격당한 B의 비명이 수화기 저편에서 꺄악- 하고 작게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앞뒤 재어볼 만한 이성이 증발하다시피 한 K에게는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무엇? B의 위―치, 그리고 N의 위―치. B는 N과 만났는가 안 만났는가.
어째서 자신의 전화를 그렇게 긴 시간 동안(고작해야 30분 정도) 받지 않았는가.
받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K는 지금 야당 혹은 여당 대표와 토론을 시켜주면 30분 안에 울며 도망치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무―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건데! 놀랐잖아!]
“대답해! 어디서 뭘 하다가 내 전화 안 받은 거야! 잠깐, 그 전에 지금 거기 어디야!!”
[어디기는, 집이지! 자기 진짜 이상하다. 가기 전에도 CCTV니 경호원이니 수상하더니 진짜 왜 이래?
어디서 사채빚이라도 잔뜩 졌어?!]
사채빚보다 더 지독한 N놈의 습격 때문이다, 이 둔한 여자야!! 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꾹꾹 참고,
간신히 돌아오기 시작한 이성의 가느다란 끈에 K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소리 지른 건, 미안해. 하지만 자기가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잖아. 난 걱정이 되어서…”
[이건 걱정 수준이 아닌 거 같은 데? 역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맞잖아? 좋은 말로 할 때 그게 뭔지 불어!!]
확실히 K의 태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자신도 그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죽어도, N놈(이미 호칭이 이렇게 굳어버리고 만 K였다)과의 문제라고는
B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도 매우 쪽팔린 일이라는 걸 자각은 하고 있는 듯.
“…말했잖아. 결혼하고 난 후 이렇게 오래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 불안하다고.”
[그러니까 어떤 부분이 그렇게 불안한 건데!]
“그건……말할 수 없어.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어차피 내가 돌아가면 다 해결 될 테니까.
그것보다 왜 내 전화 안 받았는지부터 빨리 말해봐.”
[804호 놀러가서 김치 좀 담가주고 왔어. 남편인 R씨가 아무리 사랑으로 덮으려 해도,
도저히 S 씨의 김치는 못 먹겠다잖아. 하긴, 나부터도 마마이트가 양념으로 들어간 보쌈김치라는 건
상상만으로도 토할 거 같은 걸.]
툴툴거림이 섞인 B의 대답에 K는 잠깐 동안이지만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B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지 않은가?
S 씨네 집에 간 알리바이야 어차피 말을 맞추도록 지시하면 되는 거고…
“…자기의 그 말, 나 믿어도 좋은 거지?”
[……나중에 와서 아파트 CCTV라도 확인해 보지 그래?]
이 말에는 B도 좀 화가 났는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거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깜짝 놀란 K는 황급히 B에게 몇 가지 식상한 사과용 멘트를 날린 다음,
지금 당장 현해탄을 건너서라도 보고 싶다는 식의 애교 섞인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 즈음에는 B도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그리고 바람피우면 죽어―’ 라고 덧붙인 뒤
통화를 끝냈지만. 글쎄올시다. 지금 K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윈드서핑(?) 의심용의자인 B의 말은
K에게는 약 20도 정도 곡해되어 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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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되었습니다.
로맨틱 코메디의 껍질을 뒤집어 쓴 엽기&바보물의 서막이….
이대로 허접결말을 향해 달려라, GOGOGO!!!
…우웅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