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기쁜 소식), 유앙겔리온의 유래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은 BC 490년
페르시아가 지중해를 건너 도시 국가인 아테네를 침공함으로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의 병력은 무려 2만 5천명 최강군이었다.
그 당시에 아테네 이는 민병대 수준의 1만 명, 이 전쟁은 보나 마나
페르시아가 이길 거라고 점쳐지는 전쟁이었다.
그래서 페르시아 군대는 승전 기념비까지 깎아서 그걸로 깎아서 올 정도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이 전투는 마라톤 평야, 근대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의 유래가 되는
고대 ‘마라톤 평야’의 전투 전장이 마라톤 평야가 됐다.
페르시아의 2만 5천 명의 군대가 쳐들어왔고 그리스는 민병대 수준의 만 명이니까
이거 질 것이 뻔한 것이다.
우리 죽지 않으면 노예가 된다고, 이런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데 여기에 변수가 있었다.
아테네 지휘관이 아주 지대하게 뛰어난 전략가인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 장군이었다.
그는 모든 화력과 전투력을 집중하면서 드라마틱하게 승리하였다.
그는 페르시아군의 가장 약한 점을 정보를 통해서 파악한다.
그리고 그곳을 공격함으로 이 전투에서 기가 막힌, 드라마틱한 승리를 거두게 되자.
그래서 아테네가 북쪽에서 승리하게 되는데,
페르시아 그의 군사가 6,400명, 아테네 그의 군사가 192명, 이 정도의 전투 결과는 대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군의 전령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 병사가 논스톱으로
약 42km를 달려와 아테네 도심에서 이렇게 외쳤다.
유앙겔리온!! 유앙겔리온!!..(복음이다. 복음이다. 아테네가 이겼다!!)-
“복음”이라는 용어의 의미와 유래를 정리한다.
“복음”을 영어성경에서는 Good news 또는 Godspel 이라 하는데 이는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란 뜻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어떤 좋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의 의미를
내포한다.
즉 죄로 인하여 형벌 받을 운명에 놓여 있었던 인간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죄를 사하시고
크신 복을 주시기 위하여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알려주셨는데 그 예언이 이제 성취되어 이미 시작하였다는 내용으로
곧 크리스토 예수가 복음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복음”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 이에 적절한 용어를 찾다가 ”복음“(복된 소식)이라는 용어로 확정하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 원어인 그리스어(헬라어)로는 “유 앙겔리온”이라 하였는데
이 말에는“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란 의미가 있다.
초대교회는 크리스토가 이 땅에 온 그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기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구별하기 위하여 “유 앙겔리온“이라는
특별한 용어를 채택하여 사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유 앙겔리온‘이라는 용어의 유래를 좀 더 살펴보겠다.
“유 앙겔리온“의 유래
페르시아는 B.C. 538년에 제국인 바벨로니아를 정복하고 세계제국의 권좌에 올랐다.
그동안 바벨로니아가 지배하였던 많은 나라들을 페르시아가 인수하고서 행정구역 개편,
납세부과 등 새로운 정책으로 통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후 페르시아는 지배영역을 더욱 넓히기 위하여 먼 지방까지 자주 원정을 나가기도 했는데
어느 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지역을 벗어나 마게도니아(유럽)로 진출하여 거기에서 그리스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그리스는 규모가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대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남자들은 페르시아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기로 최종 결정하고 모두 전쟁터로 나가 맞섰다.
당시 전쟁에서 대항하지 않고 항복하면 민족이 멸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항하였다가 패하면 그 결과는 참혹한 멸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개인들의 재산은 모조리 약탈당하고 건물들과 도시들은 불에 타 페허가 된다.
모든 남자들은 칼에 죽을 것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붙잡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간다.
전쟁에서 대항하였다가 패한 나라는 이처럼 비참하게 역사의 종말을 맞는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대항하여 이길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이제 페르시아에 의하여 그리스의 종말은 시간 문제였다.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무서운 죽음의 종말을 기다려야 했고
더러는 들이나 산속으로 피난하여 거기에서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전쟁터의 소식은 감감하였고 그리스 주민들은
매일 불안과 두려움과 함께 마음을 조리고 있었다.
어느 날 전쟁터 쪽에서 멀리 한 군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그 군인을 지켜보았다.
42킬로가 넘는 거리에서 달려온 그 병사는 죽을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가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동포들 앞에 다가와서는 힘없이 쓰러지면서
“승리는 우리에게” 한마디를 웨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유 앙겔리온”하며 웨치기를 시작하였고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큰소리로“유 앙겔리온”하며 즐거워 하였다.
이때의 전쟁을 역사에서는 필로폰네서스 전쟁이라 하는데
그 후 그리스 왕 알렉산더가 B.C.331년에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서 세계제국이 되었다.
“유 앙겔리온”은 그리스어로“ευαγγελιον”으로 표기하는데
ευ는 기쁨이란 뜻이고 αγγελιον 은 천사란 뜻으로
이 두 단어를 합하니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란 뜻이 된다.
이 단어는 그들이 그 때의 그 기쁜 소식을 전해준 그 병사를 생각하며
즐겨 사용했던 새로 만들어진 단어였다.
초대교회에서는 크리스토의 복음의 기쁨이 너무나 크고 위대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구별하기 위하여 약350년전 한때
그리스인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유 앙겔리온“이라는
단어를 도입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크리스토교 복음의 특성
첫 번째 특성으로 복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경험되는 기쁨은 관계된 자들에게만 해당될 뿐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하거나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 쪽은 기쁨이 되지만 패한 쪽은 기쁘지 않다.
그러나 크리스토교 복음은 양쪽 모두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즉 나에게도 기쁨이 되지만 너에게도 기쁨이 되고 그에게도 기쁨이 된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이웃나라나 먼 다른 나라 사람이나 남녀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은 기쁨을 제공한다.
이와 같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은 세상에는 없다.
그러나 복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결같은 기쁨을 제공하는 신비한 특성이 있다.
복음의 두 번째 특성은 기쁨의 지속성이다.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그때 잠간이요 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물거품처럼 식어지고 사라진다.
행복을 안겨 줄것 처럼 보였던 그 기쁨은 사라져 없어지고 허전함과 아쉬움만 남겨준다.
잠시 나타나 보였다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들은 참된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온통 쉽게 변하고 사라지고 부패해버리는 거짓된 것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참 기쁨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은 오래토록 지속하는 참 기쁨을 제공한다.
어제도 기뻐했지만 오늘도 기쁘고 내일도 기쁨이 된다.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어도 기쁨의 감정은 변하지 않고 여전하다.
어려움과 가난과 고난이 닥쳐와도 변하지 않고 핍박이 와도
그 기쁨은 사라지지 않고 빼앗기지도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참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참 기쁨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참 기쁨을 이해하지 못한다.
크리스토 안에서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변하지 않는
참 기쁨을 이해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이처럼 복음은 변하지 않는 참 기쁨을 제공한다.
이것이 또 하나의 신비한 복음의 특성이다.
복음의 세 번째 특성은 큰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제공하는 기쁨들은 순간적이면서도 극히 작은 것들 뿐 이다.
사람들은 유치하고 저급하고 작은 기쁨에 매달려 좋아하고 즐거워한다.
모두 다 허풍스럽고 사소한 것들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처럼 복음의 신비스런 특성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차별을 두려고
“유 앙겔리온“ 이라고 하는 특별한 단어를 도입하여 사용하였을 것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롬1:16)
오늘날에도 복음이 바르게 전하여 지기만 한다면
그리고 듣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바르게
듣고 이해하기만 한다면
참되고 크고 신비한 기쁨의 삶을 누구나 체험하며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