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는다는 것 / 권상진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 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변용.
ㅡ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 (걷는사람, 2023.04) --------------------------
* 권상진 시인 1972년 경주 출생. 2013년 전태일문학상 등단. 시집 『눈물 이후』 『노을 쪽에서 온 사람』 등. 2015년 복숭아문학상 대상, 2018년 경주문학상 수상
********************************************************************************************** *** 지난주 금요일 1박 2일로 포항을 다녀왔습니다. 포항의 문화공간 <책방 수북>에서 포항의 詩民들과 시와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공식 행사를 마친 후에는 소설가 김강, 시인 최미경, 조각가 서동진, 눈깔사탕 외계인, 그리고 오늘 시를 소개하는 시인 권상진 등과 밤 늦도록 술과 담소의 뒤풀이를 가졌습니다. 권상진 시인은 지면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지요. 반가운 마음에 그의 시 한 편을 부려놓았습니다. - 접는다는 것 시인들은 참 비슷한 족속들이지요. 다른 족속들이 보지 못하거나/않거나 혹은 외면하는 곳/것을 굳이 들여다보곤/들추어내곤 하거든요. 그리하여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뜻과 지평을 보여주곤 합니다. 다음의 시편들을 함께 읽어보시면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 순간, 햇살에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 박영희, 「접기로 한다」 (『팽이는 서고 싶다』, 창작과비평, 2001) 전문 * 귀퉁이가 아니라 귀다 입술보다 더 많은 말을 간직한 귀 말없이 나를 읽어주던 귀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려버리지 않는 귀 그러나 비밀을 옮기지 않을 귀 가볍지 않으나 너무 무겁지도 않은 귀 배신할 리 없는 귀 그래서 함께 여행 중이었던 귀 꿈과 상징으로 가득한 귀 아기 코끼리 덤보처럼 비상할 수 있는 귀 손가락을 거는 대신 나는 그의 귀를 가만히 접는다 잠시 후에 다시 만나! - 강기원, 「책장의 귀를 접다」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민음사, 2010) 전문 * 책을 읽다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으면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위쪽 귀를 조금 접어둔다 삶은 읽으면서 동시에 쓰는 거라는 걸 앞서간 이들로부터 진작 배우긴 했으나 책을 읽다 귀를 접는 건 읽는 힘이 쓰는 힘을 불러오기 때문이겠다 돌아보면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은 비문투성이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고 표지를 덮듯 관 뚜껑을 덮고 사라졌을 때 누군가 나라는 책을 들추다 살짝 귀를 접는 페이지들이 있을까? 내 귀는 잘 접히지 않아 늘 소란이 들끓는 시간을 살며 우물쭈물 여기까지 왔다 접히지 않는 귀를 지그시 눌러본다 바깥 소리 대신 내 안의 소리를 담아 제대로 된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 박일환, 「귀를 접다」 (『귀를 접다』, 청색종이, 2023) 전문 '접다'라는 동사 하나에 이러한 다양하고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시를 읽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접다'라는 하나의 단어가 같은 듯 다른 울림을 주지요. 시를 읽는 여러 이유 중 하나입니다. 2024. 2. 26.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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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읽은 부분을 접게 마련이다. 물론 책장이 접히지 않도록 무언가를 붙이는 사람도 많지만, 대개 귀퉁이 한 부분을 접게 마련이다. 시인은 그 접는 행위에서 성찰을 하였다. 접힌 부분을 경계하고 생각했다. 그 경계는 너와 나, 우리 사이의 연속성에서 잠시 쉬어가는 부분이기도 하고, 삶이라는 정해진 종말을 향해 가는 우리 인생의 어느 부분과 부분의 경계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경계가 경계에서 끝난다면 경계는 경계 자체로의 기능만 존재할 뿐 미래지향적 가치를 잃게 된다. 골이 생기고, 감정의 계면에 선을 긋고, 다만 그것에서 종료된다면 접힌 부분의 의미는 단절로 귀속되는 다만 그것뿐이다.
시인의 아포리즘은 3연에 부각된다. 경계를 그은 것에 대한 반어적인 의미, 경계는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경계 이후를 생각하라는 선험적 교훈이다. 앞 장과 뒷장이 같이 포개지라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해와 간구를 요구하는 것이며 다음 장을 위한 [쉼]이라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4연에서는 3연의 주장을 합리적인 관점에서 부연해 설명해 주고 있다. 모든 경계의 선을 긋는 행위는 어쩌면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자기반성에 그 요체가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내 몫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 몫이라는 말속엔 중심이동이 나로부터라는 말이 내재하여 있으며 반성이 더해져 있다. 내 몫이 아닌 네 몫에서 원인을 찾을 때 모든 문제는 더 커지며 더 많은 문제를 반드시 만들게 되어있다. 너와 나라는 말은 우리라는 말과 같다. 우리라는 말은 좀 더 포괄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말한다. 삶이라는 말이다. 변명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명 속에서 반성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 김부회 평론집 『아포리즘이 더 필요한 시대』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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